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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시트와 가여운 짐승들-83화 (82/104)

83화.

타라는 엉망으로 흐트러진 머리를 천천히 쓸어 넘겼다. 탁한 은발을 갈색 손가락이 가르고 지나가자 붉은 눈동자가 드러났다. 그녀는 결코 제국 백성으로 보일 만한 외모가 아니었다. 그런 해시트의 혼란을 비웃듯 타라가 쐐기를 박았다.

“전쟁 포로로 끌려온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불과 몇 년 전까지 노예였지만, 어느 날 폐하께서는 포로와 혼혈을 시민으로 인정하겠다 친히 공문을 내려 주셨죠. 헛된 희망에 머리가 부풀었습니다. 하지만 금세 꺼져서 곤두박질쳤지요. 아무리 노예를 해방하겠다고, 학교에 보내 주겠다 선심쓰시면 뭘 합니까? 이후에 그들이 어떤 취급을 받는지 관심은 가져 보셨습니까?”

전쟁 노예 해방은 해시트의 취임 후 불과 일 년 만에 이루어졌다. 반발이 컸지만 강행했고, 그 빌미로 이교도 탄압 문제를 가시화하여 신전의 힘을 약하게 만들려는 수작이었다.

마침내 노예들의 의견을 물어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자는 돌려보내 주되, 이후 수시로 귀족들의 집을 수색해 정상적인 고용 관계로 확인되지 않을 시 엄벌에 처했다. 그 결과 제국에 남은 옛 전쟁 노예들은 대부분 이곳에서 대를 이었거나 뿌리를 내린 자들이었다. 지금껏 해시트는 그렇게 보고받았고 스스로도 그렇게 여겼다.

“학교를 가든 노역을 나가든 사람들은 여전히 저를 어디서 굴러먹다 왔을지 모를 년이라며 모욕하고, 남편이란 자는 제가 아이를 갖자마자 수도에 처자식이 있다며 저와 이 집을 두고 도망을 쳐 버렸는데요. 그래서 마을에 도움을 요청해도 군관을 찾아가도 백성이 아닌 자를 도울 방법이 없다며 썩 너희 나라로 꺼지라는 말만 반복하는 것을요!”

“…….”

“하지만 저는 갈 데가 없습니다. 제가 쓸 수 있는 말은 제국의 언어뿐이고, 엄연히 시민증을 지닌 백성이니까요! 그런데도 이 나라에 뿌리를 내릴 수가 없단 말입니다!”

타라는 혹독하게 해시트를 비난했다.

이럴 바엔 처음부터 사람 취급 받을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 주지 말았어야 했다며, 혼혈로 태어날 그녀의 자식은 또 어찌 살아갈 것이냐 따졌다. 사람들의 눈초리가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는데 어설픈 제도 하나 덜렁 바꿔 놓고 세상을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사실 해시트는 이런 식의 비난에 아주 익숙했다. 처음에 그녀가 전쟁 노예 해방을 선포했을 때 대신들과 머리에 피가 나도록 싸워 댄 덕이었다.

그때마다 해시트는 네놈들 수명이 고작 십 년 이십 년 남았다고 세상이 거기서 멸망할 줄 아느냐고 다그치곤 했다. 후세를 생각하지 못하는 돌대가리들은 필요 없으니 지금 다 깨부숴 버리겠다면서 위협적으로 검을 뽑아 들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의 타라 앞에선 그 비슷한 논리도 벙긋거릴 수 없었다.

왜냐하면 해시트부터가 단 한 번도 타라를 그녀의 백성이라고 의심해 본 적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제야 깨달았다. 이레이가 그녀에게 보여 주려는 진실의 의미를.

그는 해시트의 긍지를 빼앗고, 이상을 무너뜨리고 싶어 했다. 나아가 그녀 스스로 선택한 길을 뼈저리게 후회하도록 만들 속셈이다. 낱낱이 까발려진 위선 위에서 스스로를 치욕스러워하도록.

해시트가 이제야 깨달은 사실을 타라는 진작에 알고 있었나 보다. 언제부터인가 그녀는 원망 가득하던 눈가에 약간의 측은함을 담아 해시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폐하께서도 참 딱하시군요. 어쩌다가 저런 악귀 같은 남자에게 홀려서……. 그래요. 저는 그걸로 됐습니다…….”

그것이 타라의 마지막 인사였다.

해시트는 일개 개인으로서 동정받는 일에 익숙하지 못했다. 당신에게도 딱한 구석이 있으니 정상을 참작해 주겠다는 온정은 황제에게 있어 권리를 박탈당하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므로.

그렇다면, 아, 지금껏 짊어질 수 없는 것을 억지로 지고 왔던가? 불현듯 해시트는 고개를 들어 이레이의 존재를 확인했다. 이런 초라한 순간에조차 빳빳하게 턱을 치켜들고 노려보았다.

“…….”

“…….”

두 사람 다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침묵은 무거웠고 공기는 마냥 텁텁했다. 저녁 식사는 거르기로 무언의 합의를 본 뒤였다. 어차피 지금 무얼 먹어 봤자 게워 낼 게 뻔했다.

이레이는 타라가 방을 떠난 이후 쭉 같은 자리에 서서 해시트를 구경하고 있었다. 뭔가를 기다리는 낌새였다. 해시트에게 듣고 싶은 말이 있어 보였다. 원하는 질문을 듣기 전까진 죽어도 나가지 않을 것처럼 굴기에, 해시트는 정말이지 그를 만족시키기 싫었으나, 이것만은 하릴없이 그녀에게도 확인해야 할 문제였다.

“제릴은…… 네가 죽인 것이 맞나?”

자는 듯 고요하던 어린 소년의 사체에는 세로로 목을 꿰뚫은 한 뼘 길이의 자상만이 선명했다. 사체가 썩지 않도록 손을 쓰는 일은 꼭 죽인 당사자가 아니어도 가능했으리라.

해시트는 벌써 답을 알 것 같았다. 그녀의 질문이 떨어지기 무섭게 무표정하던 이레이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기 때문이다. 그는 마치 이 순간만을 기다려 온 사람처럼 천천히, 그러나 또렷이 대답했다.

“당신이 그랬잖아. 카일 재상은 늘 적의 목을 꿰뚫는다고.”

“…….”

그래, 정답이었나 보다.

뚜벅뚜벅 다가온 그림자가 삽시간에 그녀를 뒤덮었다. 뺨을 감싸 쥐는 손길이 서늘했다. 창문을 때리는 겨울바람은 더했다. 창밖에 펼쳐진 너른 수평선이 꽁꽁 얼어붙는대도 고개를 주억거리고 말 시린 겨울이었다.

해시트는 그의 차가운 손 위에 뜨거운 눈물을 떨어뜨리며, 인정했다.

“내 곁에는 온통 사슴을 말이라 부르는 놈들뿐이군.”

다가올 전쟁의 혼란을 대비해 남몰래 황제의 이복동생을 죽이고 돌아오는 충신의 그림자가 머릿속을 스쳐 간다. 이레이는 그녀의 뺨에 손을 대어 두고도 눈물을 닦아 주는 대신 뜻 모를 시선만을 기울이다가 말했다.

“그거야 당신 심장이 남들보다 빨리 뛰는 탓이겠지.”

반박할 수 없었다.

누군가 마음이 앞서 감당 못 할 이상을 추구한다면, 또 누군가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 길을 만들어 내는 것이 순리다.

울지 않고는 버틸 수 없는 비참함 속에서, 그녀는 제게 드리워진 그림자가 계속 짙어져 간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입술이 닿기 직전에 무심하게 속삭이는 숨결이 간지러웠다.

“지금은 흉내라도 내 주길 원하는 것 같은데…….”

그러는 본인이야말로 해시트의 허락을 기다리는 중이다.

겨울은 해가 짧다. 저녁이 지나면 금세 어두워졌다. 바깥은 어느덧 깜깜한 밤이었다. 그리고 겨울이었다. 사실은 언제나 그랬던 것 같다. 어제도 그제도 봄이거나 여름이었던 적 없었다. 해시트는 내키는 대로 눈을 감아 눈물을 흘려보냈다.

“맞아.”

“…….”

그러자 차가운 입술이 그녀를 집어삼켰다.

뺨에 댄 채로 굳어 있던 손가락이 차츰 풀어지며 제자리를 쓸어 댔다.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눈물을 닦아 주는가 싶더니 때때로 강하게 끌어당겨 입술을 벌렸다. 또 다른 손이 등 뒤에서 목덜미를 타고 올랐다. 머리카락을 헤집는 손끝에 자꾸만 소름이 돋았다. 무섭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그런 감각마저 망가뜨릴 만큼 파괴적이었다.

진작 이럴 걸 그랬다.

이렇게 말도 안 되는 방법으로 마음을 망가뜨리는 것도 의외로 나쁘지 않았다. 부서진 자리에 망가진 마음을 묻고 떠나자. 해시트는 그 옛날 이레이가 자신의 목덜미에서 붉은 조각을 뽑아내었듯이 자신의 심장 한 귀퉁이를 뜯어냈다. 부디 앞으로는 조금 느리게 박동할 수 있도록.

마침내 해시트의 눈물이 멈추었을 때 이레이의 그림자도 멀어졌다. 해시트는 감았던 눈을 뜨고 더럭 그의 뺨을 붙잡았다. 충동적으로 내민 손끝이 사정없이 떨렸다.

“잠깐만…….”

“…….”

이레이는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그녀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사소한 행동까지 모든 외우려는 것 같기도 했다. 또다시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 같기도 했고, 어쩌면 기대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럴 리 없겠지만 조금 기뻐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문득 해시트는 궁금해졌다.

어차피 짊어질 수 없는 헛된 희망을 지고 오던 지난 나날에, 욕망하는 단 한 가지를 더 얹을 수가 없던 이유에 대해서. 혹시 그 답을 이레이도 알고 있을까 궁금해서 조심스레 질문해 보았다.

“넌 왜 왕이 되었지?”

“기억 안 나는데.”

“왜 나를 여기로 데려왔나.”

“그것도 몰라.”

“……아는 게 뭐야.”

“글쎄.”

실망스러울 만큼 빠르고 성의 없는 대답이 잇따랐다.

별안간 그는 해시트의 손에 제 손을 겹치더니 그 위로 느리게 뺨을 문질렀다. 그녀가 손을 떼어 버릴까 봐 초조하다는 듯이. 해시트의 따뜻한 엄지손가락에 그의 입술이 쓸렸다. 그가 질끈 눈을 감았다 뜨자 푸른 눈동자가 전에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가 말했다.

“흉내로 끝나지 않게 해 주면…… 진지하게 고민해 볼게.”

이번에 그는 허락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해시트도 그를 피하지 않았다.

*

이레이는 약속한 대로 해시트를 수도로 돌려보낼 준비를 했다.

해가 완전히 뜨기도 전의 새벽이었다. 저 멀리 일출이 새뜻하게 붉었다. 창가에 선 그의 뺨도 덩달아 발갛게 타들어 갔다. 해시트는 침대에 누워 그 모습을 멍하니 구경했다. 그가 홧홧하게 부은 해시트의 눈가에 찬 손바닥을 올리고는 말했다.

“보지 말고 더 자.”

보지 말라는 것이 일출인지 그의 얼굴인지, 어쨌든 어떤 방법으로 수도까지 이동하는지 해시트에게 보여 줄 마음이 없다는 뜻이다. 못 이룬 잠이 스르륵 밀려들었다. 해시트는 수마에 몸을 맡긴 채 잠결에 그와 몇 마디를 더 나누었다.

“타라는 어디서 만났나?”

“이 동네에서.”

“어떻게.”

“누가 길을 막고 있길래 살짝 걷어찼는데 그게 타라의 전남편이었다.”

“죽었어?”

“몰라. 아무튼 그 뒤로 날 따라오더군. 이제 갔으니 다시 볼 일 없겠지.”

“그래…….”

“……그게 다야?”

“이 동네는 왜 온 거야?”

“그런 거 말고.”

이 질문엔 별로 대답하고 싶지 않았나 보다. 해시트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어제부터 벼르던 말을 겨우 꺼냈다.

“내 백성을 구해 줘서 고마워.”

이따가 깨면 다른 것들도 물어봐야지, 생각했다.

하지만 다시 눈을 떴을 땐 익숙한 천장 아래였다. 또 익숙한 눈빛과 익숙한 목소리가 지척에서 그녀를 불렀다.

“폐하.”

벌써 성으로 돌아왔구나. 저를 부르는 라피난에게 해시트는 도무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곤란했다. 벌써 이레이와 함께 본 일출이 그립다고 낯 두껍게 굴 수도 없었다. 끝내 그녀는 천장에 매달린 조명을 좇으며 물었다.

“라피난. 네가 제릴을 죽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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