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이레이 대장님……?”
“기사. 널 죽이지 않는 건 순전히 황제가 너를 살리기 위해 몸을 던졌기 때문이다. 목숨 간수 잘하도록. 헛되이 했다간 네가 아끼는 자들을 모두 죽여 버리겠다.”
선득한 경고에 살의가 느껴졌다. 비록 오래전이라고는 하나, 한때 그의 부하로서 신의를 다했던 쥰은 벌어지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대장님……. 갑자기 왜…….”
“그래, 나도 네가 나를 왜 기억하고 있는지 모르겠군. 이번 생에 나와 풀어야 할 연이 없다면 날 기억할 수 없을 텐데……. 혹시 나를 좋아하기라도 했나? 진심으로.”
설핏 미간을 찌푸리고 이레이가 덧붙였다.
“멍청하긴.”
“이레이. 폐하를 내려놔라.”
라피난이 떨어진 검을 주워 그에게 겨누자, 이레이는 슬그머니 그를 돌아보며 허락을 구하듯 고개를 까딱였다.
“곧 돌려드리지. 나흘.”
“지금.”
“닷새.”
“당장!”
“그럼 일주일, 열흘. 아니, 한 달?”
짐짓 장난치는 태도였다. 라피난이 이를 악물었다.
“또 무슨 속셈이지?”
“딱히. 귀하신 분이 다치셨기에 치료해 드리려는 건데.”
“거짓말 마.”
“진실이다.”
“닥쳐!”
사나운 다그침에도 이레이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느릿한 고갯짓으로 안타까움을 표현하더니 그를 내버려 둔 채 걸음을 물렸다.
“이레이 린, 거기 서!”
라피난은 훤히 드러난 그의 등에 대고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아무것도 베이지 않았다. 빈 공기를 갈라낸 자리에 낙엽이 후드득 떨어졌다. 라피난의 몸이 크게 떨렸다. 미친 사람처럼 몸부림치며 사방을 둘러보아도 이레이와 해시트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멀리서 우렁찬 사내들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즈음이었다.
“폐, 폐하께서 납치당하셨다!”
첫 음성은 사뭇 겁에 질려 있었다. 그 뒤를 분기탱천한 전령이 따랐다.
“야만국의 왕이다! 야만국의 왕이 폐하를 납치했다!”
“모두 이동하라! 재상님을 보호하라!”
“뭐 하느냐! 어서 군대에 연통하질 않고!”
“야만국이 전쟁을 선포했다!”
“봉화를 피워라!”
“전쟁이다!”
전쟁이다.
소란을 듣고 숲을 수색하던 무리가 조금 전 상황을 빠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이레이의 날갯짓에 숲이 무너져 내리고, 그의 걸음에 숲이 말라비틀어진 탓이었다. 이 또한 이레이가 의도한 바인지, 무작정 그의 간계라 치부하기엔 어느덧 라피난의 칼날 같은 이성이 흐려져 혼란스러웠다.
곧바로 봉화가 피어오르더니 마른 땅을 밟는 말발굽 소리가 요란했다.
전쟁! 전쟁! 전쟁!
연거푸 외치는 얼굴들이 하나같이 광기에 차 있었다. 마치 쥰을 죽이려 들던 라피난처럼.
라피난의 얼굴이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안 돼, 전쟁만은!”
그는 다시 고개를 돌려 이레이를 찾았지만, 큰 충격에 휩싸여 있는 쥰과 시선이 마주쳤을 뿐. 야만국의 왕과 제국의 황제는 홀연히 종적을 감춰 버린 뒤였다.
*
입술에 차가운 무언가가 닿는 느낌이 났다.
곧 비집고 들어온 것은 씁쓸한 맛이 나는 액체였다. 삼킬 때까지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 처음 몇 번은 뱉어 내려던 해시트도 결국엔 숨이 막혀 받아들였다. 누군가 머리를 쓰다듬어 준 것 같다.
‘잘했어.’
뭘 잘했다는 얘기인지. 정신이 몽롱하다. 다친 팔이 떨어져 나갈 듯 뜨거웠다. 아팠다. 눈 뜨는 순간 밀려올 고통을 확신했기에 해시트는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꿈과 현실의 모호한 경계 속에서 남자는 화롯불에 바늘을 달구고 있었다.
*
다음 날, 아니, 다음 날인지 그다음 날인지 모를 아침에 깨어나 보니 너덜거리던 왼팔이 말끔하게 꿰매져 있었다. 억지로 맞붙여 놓은 피붓결이 강박적일 정도로 꼼꼼했다. 흉터 하나 안 남겠다. 환부가 퉁퉁 부어 있는 것만 빼면 제법 멀쩡해 보여서, 무심코 팔을 움직여 본 해시트는 즉시 고통에 찬 신음을 흘렸다.
“흐윽……!”
“뼈가 예순두 조각으로 쪼개졌다. 일일이 찾아서 맞춰 두긴 했지만 붙기 전에 움직였다간 뒤는 나도 장담 못 해.”
문득 옆자리에서 까슬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심히 가라앉은 말투가 귀에 익숙했다. 걱정이 짜증으로 이어진 말투. 종래엔 짜증이 걱정을 이겨 버린.
그가 여기, 이런 목소리로 존재한다는 건, 해시트와 같은 방에서 자다가 방금 깨어났거나 아니면 밤새 한마디도 하지 않고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거나 둘 중에 하나였다. 해시트는 바짝 긴장한 채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왜 대신 칼에 맞았나.”
“…….”
이레이가 의자에 앉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답 없는 그녀와 지그시 눈을 맞추다가 재차 다그쳤다.
“이유가 있었을 텐데.”
해시트는 그제야 불 앞에서 바늘을 꿰던 남자의 기억이 꿈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대답 대신 질문이 튀어 나갔다.
“네가 날 치료했나?”
“그래.”
“왜.”
“그건 당신부터.”
살벌하게 윽박지르는 태도에 그새 적응이 됐는지 그럭저럭 흘려들을 만했다. 그녀는 덤덤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조명의 형태가 제국의 것과 상이했다.
“여긴 어디냐.”
그러자 이레이가 슬며시 한쪽 눈썹을 까딱였다.
“혹시 귀가 먹었나?”
“아니. 여기가 어디냐고 물었는데.”
“내가 먼저 물었잖아. 왜 계집 대신에 칼에 맞았느냐고.”
“말조심해라. 계집이 아니라 제국 황제의 근위대장이야.”
“그리고 난 적국의 왕이지.”
“왕의 처소치고는 단출하군.”
냉담히 받아친 해시트가 눈을 가늘게 뜨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바다 냄새……. 설마 베누스는 아니겠지?”
“말이 안 통하는군.”
후, 이레이의 입가에 한숨이 어렸다. 그는 벌떡 의자에서 일어나 그녀를 향해 허리를 굽혔다. 부지불식간에 뻗어 온 커다란 손이 예고 없이 해시트의 상처 위를 감쌌다. 비명을 내지르지 않은 게 용할 만큼 아팠다.
“뭐 하나? 손 치워!”
해시트가 고통에 찬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을 때, 이레이는 한 손으로 그녀를 붙들고 나머지 한 손으론 맞은편 협탁을 더듬어 부목과 붕대를 챙기고 있었다. 딱딱한 대꾸가 이어졌다.
“말을 이리 안 들으니, 분명 뼈가 붙기 전에 사달을 낼 것 같아서.”
기껏 수술해 준 보람이 사라지기 전에 조치를 취하겠단다.
그는 상처 부위를 피해 두 개의 부목을 대더니 말없이 붕대를 감기 시작했다. 해시트는 그를 뿌리칠까 말까 고민하다가 그냥 내버려 두었다. 이만한 덩치의 남자를 밀어 내려고 팔을 휘저었다간 뼈가 다시 예순두 조각으로 쪼개진대도 이상할 게 없었다.
침묵 속에 붕대 감는 소리가 간지러웠다.
어느 순간 해시트는 침묵이 그녀의 감정을 동요시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결국 머뭇거린 끝에 입을 열었다.
“라피난은 처형 시 무조건 목에 있는 급소를 찌른다. 쥰은 몸을 숙이고 있었으니 내가 앞으로 끼어든다면 팔밖에 맞을 곳이 없었지. 중간에 녀석이 힘을 뺄 거라 믿긴 했지만……. 팔 하나쯤은 없어진다고 해서 사는 데 큰 지장이 있는 건 아니니까.”
“계집의 눈 한쪽을 빼앗은 과거에 면죄부를 얻고 싶었다 이거군. 알아들었다.”
이제 그는 이죽이지도 않고 그런 말을 했다. 이를 악물고 못 들은 척 넘겨야 했다. 아직 이레이가 붕대를 감는 중이었다.
종전과 엇비슷한 침묵이 흘러간 뒤, 이번엔 이레이가 먼저 입을 뗐다.
“제리 해변.”
달랑 네 글자로 끝이었다.
의아해하던 해시트는 잠시 후에야 그게 제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다는 걸 눈치채고 눈을 깜박거렸다.
제리 해변이라면…… 미케나의 영토다.
수도까지 이동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약 한 달. 어쩌면 인근에 군관이 있을 수도 있다. 기회를 봐 관각(觀閣)을 찾아내야 한다. 한데 왜인지 그런 중요한 문제보다, 이러고 있으니 꼭 옛날로 돌아간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만 앞섰다.
그녀는 물끄러미 이레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비스듬히 어긋난 시선 덕분에 몰래 훔쳐볼 필요는 없었다. 예전과 달리 이마를 훤히 드러낸 모습이 낯설었다. 해시트의 팔에 붕대를 감느라 내리깐 속눈썹은 여전히 가지런했다. 더러운 성격에 비해 제법 예쁘게 생겼다고 속으로만 생각한 날이 많았었다. 그게 벌써 오 년 전인데, 아직도 그렇다. 그는 오 년 전에 견주어 전혀 나이 든 모습이 아니었다.
“하나도 안 늙었군.”
저도 모르게 흘려보낸 감탄에 이레이가 피식 실소를 터뜨렸다.
“그래. 황제 당신께선 퍽 늙으셨소.”
“말투는 어쩌다 그 모양이 됐지?”
별안간 붕대의 끝이 매듭지어지고 그의 손이 떨어져 나갔다. 해시트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파서 그랬다고 오해했는지 이레이가 또 언짢은 내색을 했다.
“드래곤 비늘을 제련한 검에 맞고도 이 정도인 걸 다행으로 여기도록. 그러게 후회할 짓을 왜 하나.”
“후회 안 해. 쥰은 내 백성이니까.”
그 말에 이레이의 표정이 언뜻 묘해졌다.
“황제, 당신의 백성은 종류가 몇인가.”
“뭐?”
“지켜야 할 백성, 사명을 진 백성, 버려도 좋은 백성. 그 외에 또 있나?”
“세상에 버려도 좋은 백성이 어디 있어.”
결국 제 발등을 찍을 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녀는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있었으니까, 버린 적. 아니나 다를까 이레이가 차갑게 조소하며 중얼거렸다.
“아, 아예 백성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던가……. 어쨌든.”
그는 가물가물한 과거를 회상하듯 한 차례 허공을 훑더니 이내 무심해져 해시트를 바라보았다.
“당신이 그 계집을 그저 지켜야 할 백성으로 여겼다면 근위대장직에 앉히지 말았어야 했다. 인간에게 사명을 쥐여 줘 놓고 그걸 역행하게 만들다니. 계속 그런 식이라면 그 계집은 머잖아 제 자존심에 못 이겨 미치고 말걸. 자결할 수도 있다.”
“쥰이 너 같은 줄 아나?”
“나 같았으면 진작 당신 곁을 떠났겠지.”
“…….”
“지금의 나였다면 더욱더 빨리 떠났고.”
너무 확신에 차서 오히려 담담한 목소리였다. 전혀 늙지 않은 외모와 달리, 이레이는 오 년 전에 비해 허튼소리를 즐기지 않았다. 그건 두 사람이 아무리 한 공간에 마주앉아 단둘이 이야기를 나눈들 결코 옛날로 돌아갈 수 없는 이치와 비슷했다.
느긋이 몸을 일으키면서 그가 태연히 화제를 바꿨다.
“나흘쯤 곱게 쉬고 있으면 알아서 데려다주겠다. 하루에 세 번, 식후에 약을 가져다줄 테니 남기지 말고 마셔.”
“싫어.”
“환부가 썩어 들어가도 좋다면.”
“제국에도 의사는 많다.”
해시트는 잠시 처지를 잊었던 자신이 한심해서 일부러 더 냉랭하게 굴었다.
“남은 치료는 성에서 받으면 돼. 난 이만 돌아가겠다.”
“착각했군.”
“곱게 쉬고 있으면 데려다준댔지 그 전에 보내 준다는 소리는 안 했다.”
이레이가 그녀의 말이 끝나길 기다렸다는 듯 빙글 뒤돌아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