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젠장!”
해시트가 서둘러 쥰의 어깨를 감쌌다. 숨을 곳이 필요했다. 그러나 한 발을 떼어 내기 무섭게 저편에서 날카로운 무언가가 날아왔다. 휙! 다행히 해시트의 손은 눈보다 빨리 검을 뽑아냈다.
챙!
그녀는 방금 비껴 낸 것이 무엇인지 확인할 겨를도 없이 몸을 뒤집어 다음 공격을 대비했다. 누군가 엄청난 속도로 달려오고 있음이 느껴졌다. 아니나 다를까 해시트가 양손으로 검을 받쳐 든 찰나, 높이 도약해 있던 상대가 아래로 강하게 내리쳤다.
쾅!
충돌을 견디지 못한 해시트의 다리가 뒤로 길게 밀려났다. 전신이 울릴 만큼 엄청난 충격이었다. 그러나 부서진 것은 상대의 검이었다. 드래곤 비늘을 녹여 만든 검과 정면으로 부딪치고도 멀쩡하다면 그게 더 이상할 터였다.
부서진 칼날이 우수수 떨어졌다.
반짝이며 사방으로 흩어지는 쇳조각 사이로 라피난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도 해시트만큼이나 놀란 표정이었다.
“폐하?”
“라피난!”
해시트의 두 눈이 한계까지 확장됐다.
순간 그녀의 머릿속엔 숲길을 따라 뻗어 있던 두 명분의 발자국이 스쳐 갔다. 만약 쥰이 이레이의 공격을 받았다면 여태 죽지 않고 살아 있을 리 없다는 합리적 의심도 뒤늦게 고개를 쳐들었다.
아니, 잠깐,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파드득 고개를 내저은 그녀가 검을 내리며 질문했다.
“웬일이냐. 너도 폭발 소리를 듣고 왔어?”
“……저는…….”
라피난의 눈동자가 눈에 띄게 떨렸다. 이렇게 당황한 눈빛은 해시트에게도 익숙하지 않았다. 하물며 그런 눈빛을 숨기지 못한 채 해시트의 뒤에 엎어져 있는 쥰을 쉬지 않고 곁눈질하는 행동은 더더욱.
쥰은 한껏 몸을 웅크려 기침을 토해 내는 중이었다. 한 번 쿨럭거릴 때마다 검붉은 핏물이 낙엽 위로 쏟아졌다. 목에 입은 부상이 보기보다 더 심각했는지 이제 그녀는 숨 쉬는 것조차 버거워했다.
문득 라피난은 무언가를 결심한 듯, 쥰에게 둔 시선을 우뚝 굳히며 입을 열었다.
“폐하. 저를 얼마나 믿으십니까.”
그 말에 쥰이 얼굴의 반 이상을 땅에 처박고서 독기 어린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한쪽 눈밖에 뜨지 못하는 게 원통해 보였다. 그러나 그녀가 뭔가를 말하려 입술을 벌릴수록 요란한 기침만 터져 나왔다.
해시트는 라피난의 질문은 제쳐 두고 냉큼 쥰을 둘러멨다.
“당연한 소리 집어치우고 빨리 움직여. 추격자가 있다. 어서 여길 빠져나가야 해.”
“접니다.”
“그러니까 일단 나가서…… 뭐?”
“제가 쥰 경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부산스럽던 해시트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녀는 피투성이가 된 쥰의 얼굴과 라피난을 번갈아 보다가, 그러고 보니 더 이상 아무런 기척이 울리지 않는 숲 저편에도 한 차례 시선을 던졌다. 다음에 짧게 말했다.
“왜.”
딱히 분노한 기색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옹호하는 건 더더욱 아니었다. 단지 절차상의 문제라는 듯 건조한 말투였다. 라피난 역시 그녀의 추궁 앞에서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래야 했으니까요.”
“정확한 이유를 말해.”
“지금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저를 믿으신다면 끝까지 믿으시면 됩니다.”
“숲 입구에 이레이의 흔적이 있었다. 숲이 무너진 것, 그리고 쥰을 죽이려는 네 행동에 그가 관련되어 있나?”
이어진 심문은 좀 더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때맞춰 쥰이 몸을 떨자 해시트는 얼른 그녀를 앉히고 자신의 겉옷을 벗어 어깨에 둘러 주며 약속했다.
“쥰, 꼭 치료해 줄 테니 조금만 더 버텨라.”
“큭, 쿨럭! 폐…… 폐하…….”
쥰의 손이 덥석 해시트를 붙잡았다. 여태 지혈 중이던 목덜미에서 손바닥이 떨어져 나가자 흥건한 핏물에 잠긴 상처가 드러났다. 쥰의 손이 닿은 해시트의 옷깃에도 금세 시뻘건 핏물이 번져 갔다. 가까스로 쥐어짜 낸 목소리는 엉망이었다. 그리고 아주 절박했다.
“재, 재상이 서, 선대 황비…….”
순간 무언가를 감지한 해시트가 와락 뒤를 보고 소리쳤다.
“뭐 하는 짓이야, 멈춰!”
해시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미 그녀를 지나친 라피난의 손이 쥰의 멱살을 잡아챈 뒤였다. 곧장 바닥으로 내던져 숨통을 짓누르기까지 고작 몇 초조차 걸리지 않았다. 검이 부서지지 않았다면 진작 찔러 죽였을 것이다. 하지만 맨손으로도 충분했다. 무자비하게 숨통을 죄는 그의 손길에 쥰이 컥컥대며 발버둥을 쳤다.
“컥! 으으윽! 윽!”
“라피난 카일!”
해시트가 그에게 달려들었다. 반사적으로 무기를 들어 라피난을 겨냥한 그녀가 핏기 빠진 얼굴로 다그쳤다.
“떨어져! 또 네 멋대로 굴 셈이냐? 제정신이 아니라고 넘어가 주는 건 한 번뿐이야!”
“그럼 허락해 주시지요.”
“뭐라고?”
“허락해 주십시오. 저는 쥰 데이티니스를 죽일 겁니다.”
라피난은 여전히 쥰의 숨통을 옭아맨 채로 고개만 돌려 해시트를 바라보았다. 살기등등한 눈빛이 한때 이레이의 말을 베어 죽였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게 정신이 나가 보였다. 해시트는 말문이 막힐 것 같은 기분을 애써 견디며 되물었다.
“합당한 이유를 대라고 했잖아.”
“저를 향한 폐하의 믿음이 근거입니다.”
“그딴 엉터리 말고 진짜 이유를……!”
“폐하!”
버럭, 그가 해시트의 추궁을 자르고 소리쳤다.
“지금 누굴 의심하시는 겁니까! 제가 언제 폐하에게 해가 될 만한 짓을 한 적 있습니까?!”
“…….”
그럴 리가.
그런 적은 없었다. 전혀. 그래서 문제였다.
해시트가 혼란스러운 이유는 오직 그 때문이었다. 저 말도 안 되는 억지에서 설득력이 느껴져서.
내내 흔들리던 그녀의 눈은 찰나를 기점으로 돌연 무겁게 가라앉았다. 함초롬한 금안에 굳은 결심이 선다. 그녀는 괴로워하는 쥰을 바라보다가 끝내 시선을 돌려 버렸다.
“그래……. 널 의심할 수는 없지.”
그리고 자기암시처럼 반복해서 중얼거렸다.
“없고말고…….”
라피난을 겨누던 검 끝이 서서히 내려갔다. 급기야 검날과 검 손잡이의 방향을 뒤집어 라피난에게 내밀기에 이르렀다. 반드시 죽여야 한다면 고통이라도 줄여 주라는 선처였다. 사력을 다해 버티던 쥰이 절망에 빠진 듯 질끈 눈을 감았다. 한쪽 눈밖에 남지 않은 얼굴은 금세 눈물범벅이 되었다. 하염없는 눈물이 오른쪽 뺨을 적셨다.
라피난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망극합니다. 폐하…….”
검을 건네받기 위해선 잠시 쥰을 놓아 주어야 했다. 강하게 옥죄던 손이 떨어져 나가자마자 쥰이 밀린 들숨을 몰아 삼키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허억!”
그러나 더는 피할 곳이 없었다. 벌써 라피난의 손아귀엔 황제께서 친히 내린 무기가 들려 있었다. 그가 번쩍이는 황금빛 칼날을 높이 쳐든 순간, 그녀는 생에 대한 미련을 접고 통렬히 외쳤다.
“폐하! 재상이 황비…… 아, 안 돼! 아아아악!”
목숨을 건 쥰의 고발은 끝을 맺지 못했다. 그마저도 쩍쩍 갈라지는 비명으로 마지막 목소리를 쥐어짜야 했다. 곡성이 한바탕 하늘을 뒤흔들었다.
푹!
하얀 옷이 삽시간에 붉은색으로 물들었다. 옷의 주인은 해시트였다.
해시트가 쥰의 앞을 막아섰을 땐 이미 검날의 방향은 라피난의 통제를 떠난 뒤였다. 그나마 최대한 노력한 결과가 해시트의 팔뚝째 잘라 내지 않고 너덜거리게 만드는 것이었다.
“…….”
라피난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쥰은 비명을 찢어 낸 여파로 거의 기절 직전이었다. 목을 부여잡은 쥰이 컥컥대는 숨소리를 덮고 해시트는 단호하게 라피난에게 일갈했다.
“하지만 쥰 경도 이 몸에게 해가 될 만한 행동은 평생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
“재상. 짐이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겠나? 짐은 어떤 상황에서도, 무슨 일이 있어도 너를 믿는다. 이 세상에서 단 한 사람만 믿어야 한다면 반드시 너를 믿을 거야.”
“폐하.”
“그러니 지금은 네 판단력이 돌아오길 기다릴 뿐.”
팔이 잘려 나가다시피 한 상태로도 그녀는 고통스러운 기색 하나 없었다. 오히려 정신을 놓지 않기 위해 눈을 부릅뜨고 라피난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더는 못 참겠다는 표정으로 미간을 확 찌푸렸다.
“빨리 칼 치우지 못해? 난 네가 아무리 말을 안 들어 처먹어도, 향후 최소 삼십 년은 널 부려 먹어야 한단 말이다!”
행여 이 모습을 누가 보고 오해할까 두렵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라피난은 여전히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아마 쥰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검날에 해시트의 뼈가 닿아 있음이 여실히 느껴졌다. 산산이 으스러진 뼛조각을 지탱하고 있는 것은 그 위에 얼마 붙어 있지도 않은 살점이 전부였다. 그마저도 피투성이가 된. 조금만 늦었다면 꼼짝없이 팔뚝이 잘려 나갔으리라. 끔찍한 생각을 하자 이번엔 손이 떨려 왔다. 그는 손을 떨지 않으려 숨을 참았다. 결국 한참 뒤에야 참았던 숨을 내뱉으며 툭, 검을 땅바닥에 떨어뜨렸다. 라피난이 비틀거리면서 뒤로 물러섰다.
“폐하…….”
망연하게 중얼거린 순간, 주변의 나무들이 일제히 새카맣게 시들었다.
저벅.
시든 풀 위로 무거운 발소리가 내려앉았다. 그리고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이윽고 흘러나온 말소리는 그보다 더 낮았다.
“황제를 다치게 했군.”
죽은 나무 사이로 이레이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그가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숲 바닥의 가시덤불이 바싹 말라비틀어지고 숲이 황폐해져 갔다. 그는 압도적인 존재의 분노를 몸소 드러내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미약한 것들은 알아서 몸을 움츠려야 했다.
움츠러든 식물들과 마찬가지로 인간 세 명도 잠시 말을 잊어버렸다. 온몸의 관절과 혀가 딱딱하게 굳어 버린 가운데,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이는 해시트였다. 이레이가 그녀의 지척까지 다가와 고개를 들이민 덕분이었다.
그가 무심한 손길로 그녀의 턱을 치켜드는데, 꼭 입을 맞추기라도 할 것처럼, 해시트는 저도 모르게 분통을 터뜨리고 말았다.
“제릴은 왜 죽였지?”
“그걸 물어볼 줄 알았지.”
받아치는 이레이의 목소리는 태연했다. 그러나 못내 비아냥거림을 숨기지 못한 눈빛으로 해시트의 시선을 옭아매면서 그녀의 뒷목을 쳐 기절시켰다. 반항할 틈도 없이 쓰러지는 그녀를 안아 든 그가 싸늘한 표정으로 남은 두 사람을 훑어보며 말했다.
“근위대장이 황제의 뒤에 숨다니 치욕으로 알아라.”
특히 쥰을 향했을 땐, 피투성이가 된 몰골을 보고도 전혀 안쓰러워하는 기색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