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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시트와 가여운 짐승들-78화 (77/104)

78화.

“오랜만이군.”

암흑 속에서, 낯선 듯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로 흘러들었다. 그러나 주변이 너무 시끄러워서 확신할 수가 없었다. 콰카캉! 나무가 뭉텅이로 갈려 나가는 소음이 흡사 천지가 뒤집히는 듯 시끄러웠다.

쥰은 천천히 눈을 떴다. 갑자기 빛이 쬐어 들었기 때문이다. 착각일까. 커다란 장막이 드리워졌다가 걷힌 기분이었다.

실상은 이레이의 날개가 고목을 튕겨 내는 걸로 모자라 일대의 나무까지 전부 베어 버린 것이었지만, 그 날갯짓에 라피난도 어디쯤 날아가 처박히고 말았다지만, 꼼짝없이 죽다 살아난 쥰의 입장에서야 그런 게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어차피 쥰이 눈을 떴을 땐 이레이의 날개는 모습을 감춘 지 오래였다. 우연찮게 떨어져 나간 한 조각 비늘조차도 그녀가 볼 수 없는 곳으로 날아가 버렸다. 아마 숲 입구에나 어정거리고 있을 터.

만약 누군가 발견한다면, 그건 이 자리에 마땅한 용무가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레이는 비죽이 웃으며 쥰을 땅에 내려 주었다.

“어째서 황제의 남편씩이나 되는 자가 황실 근위대장을 죽이려 했는지 알고 싶겠지.”

“이, 이레이 대장님……?”

그제야 이레이를 알아본 쥰이 놀라움에 말을 더듬었다. 딱하게도 그녀는 라피난에게 발목을 짓밟힌 여파로 제대로 서 있지 못했다. 안대는 빼앗기고 팔은 부러지고 다리는 땅을 딛지도 못하니, 온몸을 뒤덮은 상처야 말해 봤자 입만 아팠다.

이레이는 별반 대수롭지 않게 무릎을 굽힐 뿐이었다. 무심한 손길로 쥰의 발목을 맞춰 주며 아무런 감흥 없이 말했다.

“곧 재상이 돌아올 거다. 사력을 다해 도망쳐. 내가 그를 상대하는 동안.”

“예?”

“왔던 길을 되돌아가다 보면 황제를 만날 거다. 머뭇거리지 말고 그 자리에서 네가 보고 들은 것들을 전부 고하도록. 명심해라. 기회는 한 번이다. 네게 다음 기회란 없다.”

망설이는 순간 죽게 될 테니까.

그의 새파란 눈동자가 느리게 깜박였다. 지극히 담담한 태도였다. 슬며시 닿았다가 떨어지는 눈빛에서 동요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인간이 하찮은 벌레를 내려다보는 느낌이었다. 언제든지 손가락으로 눌러 죽일 수 있지만 굳이 그러지 않겠다는 듯이…….

하지만 지금은 그런 눈빛을 문제 삼고 있을 때가 아니다. 버럭 쥰이 외쳤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죠? 재상님은 왜 저를 죽이려고 하시고, 폐하께서는 어째서……! 서, 설마, 그동안 대장님이 종적을 감추셨던 이유와 지금 이 상황이 관련 있는 겁니까?!”

“음, 벌써 왔나 보군.”

이레이는 질문에는 전혀 대답하지 않고 몸을 일으켰다.

그새 치료를 끝낸 건지 발목이 한결 가뿐해져 있었다. 쥰은 초조한 마음을 붙들고 재차 소리를 질렀다.

“이레이 대장님! 제발, 진실을 알려 주세요!”

대답은 등 뒤에서 돌아왔다.

“말을 삼가도록, 쥰 데이티니스. 그자는 더 이상 제국 소속이 아니다.”

라피난의 목소리였다. 황급히 뒤를 돌아 확인한 그의 표정은 도무지 말로 설명하기 힘들었다.

그때 이레이가 쥰의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리고 쥰이 끼어들 새 없이 입을 열었다.

“내가 언제는 그런 적이 있었나? 지금도 황제께 초대받고 찾아왔을 뿐이다.”

“처음부터 이럴 계획이었나.”

“마음대로 생각해라. 대개 인간들이란 자신의 죄를 숨기려 들수록 더 깊은 구렁텅이에 빠져들게 된다는 걸 모르더군. 바닥에 닿고 후회한들 그땐 아무 소용 없다는 것도 모르고.”

“넌 이미 그 바닥에 있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곧 만나게 되겠군.”

피식, 그의 입가에 미소가 스친 순간이었다. 라피난이 까득 이를 악물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허튼수작 부리지 마.”

낙엽과 가시덤불, 이제는 부서진 나무 파편까지 나뒹구는 땅 위로 거친 발걸음이 내디뎠다. 갑자기 이레이는 반대편으로 쥰을 떠밀었다. 지금이야말로 도망칠 절호의 기회라는 듯.

“왜 그러나, 카일 재상.”

그가 라피난을 막아서며 덧붙였다.

“그대가 선대 황비를 죽인 건 명백한 사실일진대.”

“…….”

“가엾은 황제는 아직까지도 진실을 모르고 있지.”

듣고 있던 쥰의 다리가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뭐? 충격이 휩쓸고 간 빈자리를 본능이 비집고 들어왔다. 도망쳐야 한다!

폐가 찢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달려야 했다. 가서 황제에게 모든 걸 아뢰어야겠다. 다만, 미처 사실 여부를 확인하지 못한 건 당장 그녀의 목숨이 위태로웠기 때문이다. 이미 라피난은 쥰을 죽일 듯 노려보고 있었다. 쥰은 곧장 뒤돌아서 미친 사람처럼 뛰기 시작했다.

당연히 라피난은 그런 쥰을 뒤쫓으려 몸을 날렸지만 또 당연하게도 그런 그의 앞을 이레이가 막아섰다.

라피난이 소리쳤다.

“비켜!”

살기등등하게 휘두른 단검은 그 즉시 이레이의 맨손에 가로막혔다. 날이 부러지기 직전까지 휘어졌다. 이레이는 어째서인지 검날을 부러뜨리지 않고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다가 말했다.

“언제까지 숨길 수 있을 거라 자만했나?”

“숨긴 적 없다. 폐하께서 직접 물어보신다면 언제든지 말씀드릴 각오였어.”

“너는 줄곧 그런 식으로 네 거짓말을 합리화해 왔다. 진실을 가려 두었을 뿐 그걸 열어 보지 않은 건 당신의 탓이라고, 황제에게 책임을 전가하면서.”

“닥쳐.”

“집안 내력인가 봐. 네 조상도 그런 식으로 나라 하나를 망하게 했지. 기억나? 하탄국이라고.”

“내 말이 안 들리나?”

라피난은 이레이에게 붙잡힌 단검을 포기하고 허리춤에서 새것을 뽑아 들었다. 그러자 이레이가 슬쩍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단검의 검날과 손잡이를 바꿔 쥐었다.

그들은 잠시 서로를 노려본 채 대치 상태에 머물렀다. 먼저 공격하는 이는 없었다.

“재상. 그대는 인간 중에 제법 똑똑한 편이니 알고 있겠지. 저 애를 죽임으로써 더 이상 거짓말에서 도망치지 못하게 될 거다. 지금껏 덮어 왔던 모든 진실이 의심이 되어 네게 쏟아질 테고, 심지어 그중에는 정말 네가 저지르지 않은 짓도 포함되어 있을 거다. 그 억울함을 감당할 수 있겠나?”

질문인지 저주인지 모를 말들이 쏟아져 내렸다. 라피난은 대답하지 않는 것으로 대답했다. 아마 이레이는 정확하게 알아들은 모양이다. 그가 갑자기 한 발 옆으로 비켜서더니 조금 전 쥰이 사라진 방향을 까딱 턱짓했다.

“가라. 이제 난 빠져 주지.”

“……원하던 게 이거였나.”

뒤늦은 깨달음과 동시에 라피난의 눈동자로 침통함이 스몄다.

어차피 부상당한 몸으로 숲을 빠져나가기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다. 결국 쥰은 라피난의 손에 붙잡히고 말 것이다. 그러니까, 왜 굳이 이런 어정쩡한 시간을 벌어서 쥰에게 헛된 희망을 품게 만들었는지.

이레이는 빙긋 웃었다.

“그래서 안 따라갈 건가?”

따라가는 순간, 따라가서 그녀를 베는 순간, 지금껏 라피난 카일이 지켜 온 모든 경계선이 무너지고 만다.

알고 있다.

비밀을 모르는 자의 죽음과 아는 자의 죽음은 같은 무게일 수 없었다. 회피와 기만의 차이만큼이나 달랐다. 그런데도 라피난은 어느새 멈출 수 없게 됐다. 그저 덮어 둘 뿐이 아니라 최선을 다해 치부를 숨기고 싶어졌다.

그런 욕망이 생겨난 지도 벌써 꽤 많은 시간이 흘러서……. 이 모든 게 눈앞의 사내가 파 놓은 구렁텅이라는 걸 알면서도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라피난은 힘겹게 입술을 뗐다.

“야만족의 왕이여.”

후회하겠지.

“내 딸이 너 같은 남자를 만나면 좋겠네.”

그래도 상관없다.

“우리가 친구였던 시절은 오늘부로 모두 끝났소.”

라피난이 오래된 망자의 목소리를 곱씹으며 이레이를 지나칠 적에, 이레이는 그가 들을 수 있도록 똑똑히 대답해 주었다.

“동감이야.”

*

다급하게 숲에 뛰어든 것에 비해 해시트는 신중하게 굴었다.

혹시 중요한 흔적을 놓칠 수 있으니 말에서 내려 두 발로 움직이기로 했다. 적당한 곳에 말을 묶어 두고 바닥을 훑어보자, 숲이 무너진 충격으로 너저분한 흙바닥에 희미한 발자국이 남아 있었다.

“두 명…….”

모양이 나란하지 않고 앞뒤로 약간 거리가 있다. 안내해 주는 이와 뒤따르는 이로 추정됐다. 해시트는 천천히 발자국을 따라가 보았다. 슬슬 다리가 아파 올 즈음 담장처럼 돋아난 가시덤불이 나타났다. 높이가 거의 허리께였다.

그녀는 자신이 길을 잘못 든 게 아닐까 의심하며 다시금 바닥의 흔적을 확인했다. 그러나 발자국은 정확히 가시덤불 안쪽을 향하고 있었다.

잠시 자리에 서서 고민했다.

분명 성 안의 누군가는 숲이 무너지는 굉음을 들었을 것이다. 머잖아 상황 파악을 위해 정찰대가 찾아올 터, 그때까지 기다렸다가 함께 들어가는 게 여러모로 현명하다는 판단이었다.

해시트가 주위를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적당히 몸을 운신할 곳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때 가시덤불 저편에서 바스락거리는 인기척이 새어 나오자 그녀는 화들짝 놀라 몸을 굽혔다. 곧장 가시덤불 틈새의 촘촘한 구멍으로 시선을 들여보낸다.

심하게 절뚝거리는 인영 하나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큰 부상을 입은 듯했다. 연신 뒤를 돌아보는 행동은 추격자의 존재를 짐작하게 했다. 숨죽여 인영을 지켜보던 해시트의 눈이 별안간 커다랗게 확장됐다.

“쥰?”

맙소사. 그녀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폐, 폐하…….”

“쥰! 네가 왜 여기 있나.”

그녀는 제가 질문해 놓고도 눈빛을 망연하게 물들였다. 숲 입구에서 발견한 붉은 물체는 의심의 여지 없이 이레이의 비늘이었다. 그러나 그가 쥰을 이 꼴로 만들었으리라 단박에 확신하지는 못했다.

쥰은 피가 흐르는 목덜미를 한 손으로 움켜쥔 채 꺼덕이는 소리를 냈다. 해시트의 질문에 대답하려는지 힘겹게 입술을 달싹였다.

“저, 저는……. 폐하. 거기 계십시오. 제, 제가 갈…….”

말할 때마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왈칵 핏물이 배어 나왔다. 자상이 깊은데 지혈할 여유가 없어 대충 손으로 틀어막은 모양이었다. 해시트는 퍼뜩 정신이 들어 맨손으로 가시덤불을 헤치고 쥰에게 달려갔다.

“목을 다친 거냐? 이리 보여 봐라!”

가까이서 본 쥰의 몰골은 더욱 가관이었다. 온몸이 상처투성이였는데 도무지 어디서부터 응급조치를 취해야 할지 우선순위를 정할 수 없었다. 마땅한 의료 장비조차 없는 지금은 숲을 빠져나가는 것이 급선무다.

“쥰, 의사에게 보일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마라. 이미 피를 너무 많이 흘렸다.”

“자, 잠시만요. 폐하. 급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지금도 겨우 따돌린 거예요. 곧 따라잡힐…… 쿨럭!”

기침 소리와 함께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해시트의 품에서 벗어난 쥰이 비틀거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출혈을 동반한 기침이 끊이지 않았다. 해시트는 저도 모르게 언성을 높이고 말았다.

“알겠으니까 나가서 말하라고!”

결코 그러려는 의도는 아니었지만, 추격자에게 위치를 적발당하기 딱 좋은 행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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