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너에게 악감정은 없다. 하지만 그자가 제시한 패를 깨기 위해선 이게 최선이겠지.”
“패라니요?”
“글쎄, 그가 어떻게 너를 이용하려는 수작인지는 나도 아직 몰라. 이해하도록.”
그는 영문 모를 말을 아주 당당하게도 했다. 자칫 이해하지 못하는 쪽이 나쁘게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상대가 아무리 뻔뻔하다고 해서 순순히 목숨을 내어주는 바보 천치가 세상에 어디 있다고!
쥰은 혼란스러운 마음을 다잡고 빠르게 주변 지형을 살폈다. 상대의 주의를 흩트리기 위한 질문도 쉬지 않았다.
“혹시 지금 말씀하시는 사람이 이레이 린 대장님입니까?”
“죽음을 받아들이겠나? 그렇다면 대답해 주지.”
“으으음, 그건 너무 어렵습니다……. 방금 말씀으로 대충 대답은 된 것 같지만요…….”
“시간 끌 생각 마.”
물론 평범한 검사들에게나 효과가 있는 방법이었다. 라피난은 수작에 넘어가지 않고 무기를 들었다. 저벅, 다가온다.
옆으로 빠지면 맹수들이 우글거리는 숲속이었고 당장 눈앞에는 맹수보다 무서운 남자가 버티고 있었다. 뒤돌아 전속력으로 도망치는 건 가장 최악이었다. 적에게 등을 보이는 실수는 정말로 바보 천치나 저지르는 짓이었다.
그렇다면 정답은 하나 아닌가. 쥰은 거칠게 한숨을 내쉬었다.
“전 항복 안 해요.”
“그럼 더 쉬워지겠군.”
“결과는 모르는 겁니다.”
아니. 구 할 구 푼의 확률로 여기서 죽을 것이다. 그럼에도 쥰 역시 검을 뽑았다. 전우가 아닌 이들과 함께 묻히긴 싫었다.
*
“……카일 재상이 안 보이는데.”
국경지대 상황을 보고받던 해시트가 불현듯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하루 종일 라피난이 보이지 않았다. 시국이 시국인지라 첩자 활동이네 뭐네, 동맹 강화다 뭐다 이래저래 바쁠 만도 했지만 이렇게까지 오래 얼굴을 비치지 않는 건 드문 일이었다.
동맹국에 파병 각서를 받으러 간다는 소리도 듣지 못했다. 해시트는 가장 가까이 있는 대신에게 물었다.
“카일 재상 지금 어디에 있나?”
“송구합니다, 소인과는 점심 전에 군사 훈련장에서 마주친 것이 마지막입니다.”
“그럼 아직 거기 있겠군.”
그러잖아도 슬슬 훈련장에 방문할 시기였다. 라피난이 쥰을 들들 볶아 가며 뽑아내고 있다는 전술에 과연 진척은 있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녀는 당장 몸을 일으켰다.
“모탈루아 해안 건은 일단 이렇게 마무리하기로 하지. 제국군 위령비는…… 사료를 뒤져 최대한 비슷한 사례를 찾아내 적용하도록. 누구 이의 있나?”
“여부가 있겠습니까.”
“지당하십니다, 폐하.”
“좋군. 다들 일 보도록.”
하지만 몇 발자국 떼다 말고 언짢게 뒤를 돌아보아야 했다. 그녀가 움직이기 무섭게 우르르 따라붙은 수행원들 때문이었다.
“군사 훈련소에 갈 거다. 병사들 훈련을 방해하고 싶지 않군.”
하필 근위대장이 공석이라 행렬이 전에 없이 요란했다. 이래서야 훈련 중이던 병사들이 황제에게 예를 갖추느라 시간을 허비하리라. 해시트는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며 수행원 무리가 따라붙기 전에 재빨리 말안장에 올랐다.
밖으로 나와 보니 겨울바람이 몹시 차가웠다.
그냥 마차를 탈 걸 그랬나. 해시트는 체온을 빼앗기지 않으려 바짝 옷깃을 여몄다. 문득 깨닫길 그녀는 겨울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유독 겨울과 관련된 안 좋은 기억이 많았다.
이를테면 한겨울 눈밭에 피 묻은 손을 씻던 기억이라던가. 그러나 모순적이게도 그곳엔 지금까지 잠들었던 중 가장 따뜻한 밤이 함께했다. 간혹 그 밤에 기대어 쉬곤 했다.
“괜찮아, 천둥이 치고 있어.”
구름 한 점 없이 쾌청한 밤하늘에 대고 속삭이던 남자의 거짓말만이 온 세상에서 유일하게 그녀를 위로해 주었다. 겨울이 가고 곧 봄이 온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나아가 봄이 있는 한 다시 겨울이 올 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그래서 지금은 다시 겨울이 왔다.
“…….”
해시트는 가던 길을 멈추고 물끄러미 고개를 들었다. 끝없이 펼쳐진 새파란 하늘이 궁전의 지붕과 만나 유려한 곡선을 그려 내고 있었다.
그중 태양과 가장 가깝게 빛나는 건 단연 미케나 신의 표식이었다. 탑 꼭대기를 장식한 황금. 올려다보는 이의 눈을 찌를 듯이 번쩍거리던 그것이 한순간 햇빛과 만나 뾰족한 빛줄기를 만들어 내더니, 그대로 쭉 뻗어 먼 곳을 가리켰다.
마치 신이 인도하는 양.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해시트는 반사적으로 빛이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황금의 빛이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오롯이 한 점만을 향해 뻗어 가고 있었다. 해시트의 눈이 가늘어졌다.
“저 숲…….”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모여 빼곡한 어둠을 이룬 겨울 숲이 바로 거기에 있었다.
늘 성 안에 존재했으나 정작 성의 주인인 해시트는 아직 한 번도 들어가 본 적 없는 곳이었다. 죄인이 버려지는 곳, 과거 해시트를 찾아왔던 수많은 암살자와 의사들이 시체로 묻힌 장지였다. 아마 라피난이 가장 자주 방문했을지도 모르겠다.
또 이레이가 종종 밤 사냥을 나서던 곳이기도 했다. 먹지도 않을 짐승들을 자꾸 사냥해와설랑 썩을 때까지 내버려 두기에 해시트가 참다 참다 멱살잡이를 한 적도 있었다. 오래된 과거였다.
한편 라피난은 늘 해시트를 떼어 놓고 숲에 다녀오곤 했는데, 이유인즉슨 두 사람 외에도 저곳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설명이었다. 성 안에서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느냐며 짐짓 난감해하는 기색이길래 해시트도 다시는 묻지 않았었다.
망설이던 그녀는 결국 말머리를 돌렸다. 말로만 듣던 장소를 실제로 확인해 두는 것도 나쁘진 않을 성싶었다. 느긋하던 말발굽 소리가 점점 빨라져 갔다.
하지만 잠시 후, 숲 근처에 다다른 그녀는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쿠우웅!
파열음이 울리더니 연달아 넓은 지대가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콰카캉!
“뭐, 뭐야!”
그녀가 황급히 말고삐를 잡아당겼다. 놀란 말의 앞발이 허공을 짓찧어 댔다. 겨우 말을 진정시킨 뒤엔 해시트가 욕지기를 내뱉어야 했다.
“젠장!”
숲 안쪽에서부터 나무 그림자가 와르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고작 한두 그루가 아니었다. 숲 전체가 주저앉기 일보 직전이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그길로 왔던 길을 되돌아가 병력을 불러오려 했지만, 하필 그 순간 숲 밖으로 튕겨 나온 빛나는 작은 물체를 발견하고 말았다. 해시트는 한껏 찡그린 채 그것을 바라보았다. 거리가 꽤 멀었는데도 이상할 정도로 쉽게 눈에 들어왔다. 크기는 대충 손바닥만 했고 색깔은 붉었다. 그리고 볕에 드러난 즉시 맹렬한 반사광을 띄었다.
해시트의 눈동자가 바르르 진동했다.
“이레이.”
확신에 차 그 이름을 불렀다. 그 남자의 날개에서 떨어져 나온 조각이 틀림없었다.
그녀는 앞선 계획을 수정하여 곧장 숲속으로 달려갔다.
*
날카로운 단검이 정확하게 쥰의 목을 겨냥해 날아들었다.
“크윽!”
쥰은 눈을 감는 대신 힘껏 옆으로 굴렀다. 이미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참이라 차라리 다행이었다. 낙엽 아래 뒤엉긴 가시덤불에 찔렸는지 온몸이 따끔거렸다. 한참 전에 부러진 오른팔은 퉁퉁 부어오른 지 오래였다.
눈물 날 정도로 아팠으나 그녀는 꾹 참고 재빨리 상체를 일으켰다. 그래 봐야 금세 라피난이 휘두르는 단검에 쫓겨 턱을 한계까지 뒤로 젖혀야 했다. 휙! 이번엔 아예 정수리부터 꿰뚫을 듯 뒤에서 내리꽂힌다. 쥰은 몸을 수그리면서 순발력을 발휘하여 그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여기! 방심하셨거든요!”
퍽! 보통 넘어져야 정상일 텐데 다리에 철심이라도 박았는지 잠깐 휘청거리며 한 걸음 물러서는 걸로 그쳤다. 오히려 쥰이 걷어찰 때의 반동을 못 이기고 반쯤 공중제비를 돌아야 했다.
철푸덕.
착지는 턱으로 했다. 그래도 라피난에게 타격이 있긴 있었나 보다. 그는 눈에 띄게 짜증 난 표정으로 쥰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너무 쓸 만해서 죽이기 아깝군.”
“예? 지금 저 놀리시는 겁니까?”
“칭찬인데.”
“우와…….”
“불만 있나.”
사람을 이런 넝마 꼴로 만들어 놓고 칭찬 운운하면 당연히 열이 뻗칠 수밖에 없었다. 자존심도 적잖이 상하고말고. 그렇다고 성질나는 대로 달려들었다간 다음 생을 기약해야 할 판국이었으니, 쥰은 긴장을 늦추지 않고 그의 눈치를 살폈다.
“재상님. 그냥 살려 주시면 안 돼요?”
“안 돼.”
“그럼 이유라도 알려 주세요!”
“그것도 기각이다.”
가차 없는 거절과 함께 라피난이 또다시 팔을 들었다. 급기야 단검이 아닌 장검을 뽑아 드는 것으로 조금 전의 칭찬이 농담이 아닌 진심이었음을 공고히 했다.
“음마야! 이럴 줄 알았어!”
쥰은 이미 부러진 오른팔을 희생시킬 각오로 냅다 방어 태세를 갖췄다.
하지만 예상한 충격 대신 정체 모를 타격음만이 귓전을 때렸다. 쾅! 그다음엔 쩌저적! 썩은 나무줄기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라피난의 검날이 향한 곳은 쥰이 아닌 그 옆, 거대한 고목의 목이었다.
쥰이 상황을 파악할 새 없이 라피난이 그녀의 발목을 세게 짓밟았다.
“아악!”
비명과 함께 쥰의 고개가 뒤로 꺾였다. 라피난은 기다렸다는 듯 그녀의 왼쪽 눈가에 손을 뻗었다.
“증거는 남기지 않는 편이 좋겠지.”
짧은 중얼거림과 함께 군더더기 없는 손짓이 쥰의 안대를 낚아챘다.
주머니 속으로 그녀의 안대를 쑤셔 넣는 라피난의 의중이 너무나 명확했다. 이제 쥰은 명예를 잃고, 이름 없는 시체로 숲의 먹이가 될 것이다.
고목의 그림자가 엄청난 먼지를 흩날리며 그들을 덮쳐 오고 있었다. 둥지 잃은 새들이 부산스레 하늘을 뒤덮었다. 라피난은 흘긋 눈을 굴려 나무의 위치를 확인하더니, 고민하지도 않고 그 한가운데로 쥰을 밀쳐 넣었다. 반대로 본인은 사뿐히 빠져나가는 모양새가 야속하기 그지없었다.
문득 쥰은 자신의 왼쪽 눈에 눈물이 차오르지 않는다는 것이 너무나 서러워졌다. 결국 오른쪽 눈마저 질끈 감아 다른 한쪽의 부재를 잊을 따름이었다. 이렇게 죽는구나. 뜨거운 눈물이 그녀의 오른뺨을 적셨다.
그때였다.
쿠우웅!
아주 무거운 무언가가 땅에 내려앉는 느낌이 든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