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시트와 가여운 짐승들-76화 (75/104)

76화.

“폐하. 굳이 그러실 필요까진…….”

“최대한 빨리!”

“……알겠습니다.”

사절은 스스로를 ‘죽어 마땅한 어른’이라고 지칭했다. 그건 언젠가 해시트가 이레이 앞에서 읊었던 단어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들이 아는 한, 죽어 마땅한 어른들 때문에 인생이 곤란해진 어린아이가 아직 세상에 하나 더 존재했다.

제릴 디어, 열한 살. 선황의 사생아이자 당대 황제의 이복동생이다.

해시트는 소년의 나이를 핑계로 여태 그 애를 살려 주었고.

“바로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그토록 유약한 그녀의 자비로움 덕분에, 오늘날 라피난은 소년이 이미 망자임을 확신하면서도 변방으로 사람을 보내야 했다.

*

보름 후, 열한 살 소년이 시체가 되어 수도로 돌아온 새벽이었다.

해시트는 마치 잠을 자는 듯 고요한 망자를 한참이나 내려다보다가 직접 감옥 탑으로 찾아갔다.

장의사는 죽은 지 벌써 몇 달이 훌쩍 지났으리라 추정했다.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시체의 외양이 너무 멀쩡하다며 의아해했다.

며칠만 더 빨리 찾아갔어도 반드시 살릴 수 있었겠다 싶을 정도로 깨끗한 사체였다. 목덜미에 세로로 난 한 뼘 굵기의 자상만 빼면 그저 곤히 잠든 것처럼 보였다. 유배된 북쪽이 너무 추웠기 때문일까, 아니면 누군가 시체가 썩지 않도록 손을 써 둔 걸지도…….

“일어나.”

해시트는 다짜고짜 수감실로 쳐들어가 죄인의 멱살을 끌어 올렸다. 뺨을 내리칠 기세로 힘껏 손을 들었지만 보름 사이 꽤나 부푼 배를 발견하곤 끝내 손찌검을 하진 못했다. 툭, 죄인을 내던진 해시트가 악문 잇새로 읊조렸다.

“가서 너희 왕에게 전해라. 언제든 성으로 찾아오면 귀빈으로 대접해 주겠다고.”

“쿨럭……! 망극합니다. 폐하.”

여자는 바닥에 널브러진 몸을 힘겹게 추슬러 해시트 발치에 바짝 엎드렸다. 무슨 속셈인지 이마까지 찧을 듯 굴더니 이내 뜻 모를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런데 폐하.”

슬며시 올려다보는 붉은 눈동자가 꼭 해시트를 놀리는 것 같았다.

“폐하께서는 제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

해시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궁금하다거나 궁금하지 않다거나, 그저 씨근덕거리는 숨을 진정시키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런 쓸데없는 문제를 고민하고 있기엔 다른 일들만으로 머릿속이 충분히 바빴다.

“거기 아무도 없느냐!”

“예, 폐하!”

“이 야만족을 풀어 줘라. 배가 더 불러 오기 전에 보내! 하루빨리 베누스에 당도해 짐의 말을 전할 수 있도록!”

“예, 알겠습니다!”

이윽고 언제 흥분했었냐는 양 냉랭한 얼굴로 돌아간 해시트는 죄인에겐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창살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정말로 해야 할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일단은 죽은 제릴의 어머니, 세르히라 디어 양에게 아들의 죽음을 알려야 했다.

태어나기도 전부터 이리저리 정치적으로 이용만 당하다가 그마저도 이복누이가 즉위하던 날 어머니와 생이별하고 변방으로 보내졌던 소년. 결국엔 누가 봐도 살해당한 꼴로 고향에 돌아오고 말았으니, 아마 세르히라 양은 해시트가 그 애를 죽였다고 오해할 게 뻔하다…….

그러나 따져 보면 틀린 말은 아니었으므로, 해시트는 그녀가 마음껏 오해하도록 내버려 둘 생각이었다. 모든 것을 잃은 이에게 원망할 대상을 안겨 주는 행위는 시대를 막론하고 가장 보편적인 자비다.

*

“귀빈 대접이라.”

바다 냄새가 났다.

바람결에 짭짤한 소금기와 갈매기 울음이 섞여 창을 타고 흘러들고 있었다. 해안 도시에 지어진 집은 외벽과 내벽 모두 새하얀 색이라서 꼭 함박눈을 맞은 듯 아름다웠다.

이레이는 발밑에 공손히 엎드린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달리 말을 걸지는 않고 지나쳤다. 그저 혼잣말로 중얼거렸을 뿐이다.

“조금 혹하는군.”

다녀오겠다는 인사 정도는 해도 괜찮았을 텐데. 여자는 이레이가 떠난 줄 몰라서 한참이나 있다가 몸을 일으켰다.

*

쥰은 한쪽 눈을 실명한 이래 더 이상 조각은 할 수 없게 되었으나 이따금 그림을 그렸다. 주로 직무 중인 해시트의 옆모습, 혹은 그녀가 잠시 책상에 엎드려 잠들어 있을 때의 풍경 따위를 연습장에 담곤 했다.

처음엔 몰래 그리다가 해시트가 쥰의 그림 그리는 취미를 퍽 흐뭇해하는 바람에 나중엔 대놓고 그리게 되었다.

그녀가 모시는 황제는 아마도 밤잠을 깊게 못 드는 듯했는데, 그래서인지 황제의 남편이자 쥰의 호랑이처럼 무서운 상사인 라피난 카일은 종종 ‘폐하께서 일하다 잠드시면 절대 깨우지 마라’라고 한마디씩 당부해 오곤 했다.

그래 놓고 간혹 해시트가 업무량을 소화해 내지 못할 때면 엄청나게 투덜거리기 일쑤였으니 지켜보는 입장에선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대체 왜 저러시나. 혹시 저딴 게 애정 표현인가? 설마. 쥰은 라피난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다 옛날 일이요, 요즘은 난데없이 군사 훈련장에 끌려와서 매일같이 모의 전술이나 세우는 실정이었다. 당연히 그림 그릴 짬 같은 게 있을쏘냐. 식사조차 어찌나 황급히 먹게 되는지 급체하기 딱 좋았다. 결코 과장이나 엄살이 아니다. 일과 내내 라피난이 쥰을 지켜보고 있었으니까.

대관절 이유라도 알면 좋겠다. 최근의 라피난은 아예 쥰의 뒤통수에 구멍이 나라고 고사를 지내는 중이었다. 이글이글 노려보는 눈빛이 따끔거리다 못해 아팠다.

심지어 오늘은 쥰이 잠시 화장실에 다녀온 사이 그녀의 가방 속에 들어 있던 연습장을 꺼내 제멋대로 들춰 보기까지 했다. 멀찍이서 라피난의 만행을 발견한 쥰이 깜짝 놀라 달려갔다.

“재상님! 그거 제 겁니다.”

“안다.”

아니, 상식적으로 그걸 안다는 걸 모를 리 없지 않나? 순전히 한 번 더 강조해서 내려놓게 만들려는 의도였는데 도통 먹히질 않았다.

스륵, 한 장을 넘기며 라피난이 말했다.

“폐하를 그렸군. 심지어 꽤 많이.”

“오해 마십시오! 그건 폐하께서 허락하셔서……!”

“이 남자는 누군가.”

“네?”

쥰은 라피난이 내민 그림을 확인하곤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선이 굵은 남자의 얼굴이 슥슥 그은 목탄화로 간단히 묘사되어 있었다. 그건 그녀가 근위대장으로 임명되기 훨씬 전에 그린 그림이었다. 대충 헤아려도 벌써 오 년도 더 됐다. 하지만 쥰이 놀란 이유는 단순히 과거작을 발굴당한 수치심 때문이 아니었다.

“정말 몰라서 물으십니까?”

“누구냐고 물었다.”

이젠 혹시 농담하는 건가 싶었다. 아무리 옛 실력이 지금만 못하다고는 해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는데……. 더구나 근위대장에 임명되기 이전의 쥰이 그릴 만한 사람이라 봐야 결국 한 사람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이레이 린 대장님이요. 이제 우리 대장님은 아니지만요.”

그러자 라피난의 눈이 확연하게 가늘어졌다.

“그를 기억하고 있군.”

“네? 그거야…….”

“따라오도록. 쥰 데이티니스 경.”

“아, 네.”

쥰은 하던 말을 멈추고 냉큼 라피난을 따라갔다.

얼마나 걸었을지, 처음 보는 수풀 길에 접어들었다 생각이 든 즈음 불시 라피난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은 대부분 그를 잊었다. 그가 떠난 뒤 아무도 그자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았어.”

귀신이 곡할 노릇이지.

중얼거리는 중에도 라피난의 걸음은 전혀 느려지지 않았다. 쥰에겐 뒷모습만을 보인 채 능숙히 수풀을 헤쳤다. 얼어붙은 풀이 그의 발에 짓밟히며 버석하게 부서지는 소리를 냈다. 이윽고 풀밭을 지나자 두꺼운 가시덤불이 나타났다.

쥰은 조금 전 라피난이 말한 ‘그’가 이레이라는 걸 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다들 그를 잊었다니 믿기 어려웠지만……. 하기야 돌이켜 보면 그녀부터가 이레이의 존재를 한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러다 재작년이었나, 흉측한 몰골의 부랑자를 데리고 성에 돌아오던 날 까맣게 묻혔던 기억이 생생히 되살아왔다.

그자, 이레이 린의 존재가.

“아마 그는 내게 의심과 불안을 심어 주려 했을 것이다. 석 달 내내 초조하게 너를 감시하며, 끊임없이 의심하고 불안해할 나를 기대하면서. 결국 내가 어떤 선택을 하든 흡족해했겠지. 목적은 단지 그것뿐이었을 테니까.”

읊조리는 라피난의 목소리에는 어쩐지 울화가 가득했다. 평소 이성적이다 못해 차라리 인간이 아니라고 믿고 싶을 만큼 냉혹한 사내였거늘 지금은 그저 친구와 싸우고 뒷담화를 하는 모양새에 가까웠다.

가만히 듣던 쥰이 조심스레 질문했다.

“재상님. 그런데 이레이 대장님은 대체 언제 떠나신 겁니까? 어느 날 갑자기 안 본 지 오래되었다는 생각만 했지, 정확히 언제 떠나셨는지는 왜인지 기억나지 않습니다.”

“네가 기억할 필요 없는 일이다.”

“하지만……. 조금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어 그렇습니다. 왜, 몇 년 전 입이 꿰매진 채 발견된 화백 말입니다. 그가 당한 고문 수법이 전쟁터에서 이레이 대장님이 행하던 것과 비슷했거든요. 들려오는 풍문에 야만국의 왕이 붉은 머리라는 말도 있고요. 그러니까 제 말은,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만…….”

“쥰 데이티니스.”

우뚝, 라피난이 갑자기 그 자리에 걸음을 멈추었다.

어느새 꽤 깊은 숲속까지 당도했는지 주변이 어둑했다. 이 한겨울에도 무성한 나무그늘에 갇혀 햇빛이 보이지 않았다. 수풀 너머 사방에서 울려 퍼지는 짐승의 울음소리가 어둠을 뚫고 스산한 존재감을 과시했다. 어디선가 쌉쌀한 냄새가 풍겨 오는 것 같기도 했다.

쥰은 자신이 말실수를 했다는 걸 깨달음과 동시에 덜컥 의문에 빠졌다.

성 안에 왜 이런 숲이 있지?

“여긴…… 사냥터가 아니군요.”

“그래.”

“처형당한 시체를 버리는 곳이에요.”

라피난은 말없이 뒤를 돌았다. 천천히 마주한 눈빛이 그가 이곳을 이용한 게 처음이 아니라고 일러 주는 듯했다. 꿀꺽. 쥰은 마른침을 삼켰다.

“왜죠?”

“…….”

“왜 저를 죽이시려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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