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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시트와 가여운 짐승들-74화 (73/104)

74화.

어느새 그는 어디서 다가왔는지 모를 흑마의 갈기를 쓰다듬고 있었다. 곧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안장에 몸을 올렸다. 가 버린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해시트는 벌떡 일어나서 그에게 달려갔다.

“안 돼, 그는 안 돼!”

어찌나 다급했는지 지척까지 다가온 적군의 도끼도 보지 못할 정도였다. 피칠갑을 둘러쓴 야만족 병사 하나가 찢어질 듯한 고함을 내질렀다.

“으아아악! 죽어! 황제여, 죽어라!”

번뜩이는 도끼날을 해시트가 발견했을 땐 늦어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투구도 무기도 없었다. 할 수 있는 거라곤 그저 눈을 질끈 감는 것뿐.

퍽!

머리가 깨질 때 나는 소리가 꼭 연못에 돌 던지는 소리와 비슷했다.

“커, 커헉……! 쿨럭!”

사내는 그가 모시는 왕이 던진 단검에 이마가 쪼개져, 몇 걸음인가 자리에서 비틀거리다가 두 눈을 부릅뜬 채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어느새 일출이 비추기 시작한 백사장 위로 뜨거운 핏물이 왈칵 쏟아진다. 그것이 자신의 피가 아니라는 걸 확인하자마자 해시트는 참았던 날숨을 토해 냈다.

“하아아…….”

그러나 안도할 틈이 없었다. 싸늘한 이레이의 목소리가 곧 귓전을 때렸다.

“당신이야말로 아직 안 되지, 황제.”

“…….”

“내가 당신에게 보여 줄 게 얼마나 많은데.”

나직하지만 다정하지 않았다. 듣고 있자니 그녀는 이유도 모른 채 두 눈을 시뻘겋게 물들여야 했다.

“너……!”

이레이, 이레이 린. 그녀가 미친 사람처럼 그의 이름을 불렀다. 머잖아 거추장스러운 눈물까지 매달고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에 대고 외친다.

“멈춰!”

그러나 남자는 벌써 그 자리에 없고, 오직 말발굽에 걷어차인 모래 알갱이들만이 어느새 완전해진 햇볕에 부서지고 있었다. 반짝이는 백사장 위로 핏물이 또다시 울컥 덮친다.

그러나 그게 뭐 대수겠냐는 듯, 그저 대단치 않게 아침을 맞이하고 있었다. 백이십여 년 전, 모탈루아족이 제국군과 맞서 싸우던 그날처럼.

*

오 년 전 결혼식에서 그들이 사랑을 맹세했던가. 솔직히 그런 질문이 존재했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았다.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으니까.

느닷없이 먹구름이 밀려든 아침, 라피난은 새롭게 단장한 해시트의 서재를 구경하고 있었다. 대외적인 이유는 금고를 제자리에 가져다 두는 것이었으나 겸사겸사 시종들이 청소를 잘 마무리 지었는지 확인할 목적도 있었다. 아무렴 티끌 하나라도 남아 있을 리 없겠지만.

매끄럽기만 한 책장 위를 손가락으로 쓸며 그가 중얼거렸다.

“너무 깨끗하면 오히려 쉽게 더럽혀지지.”

그리고 더러워진 한 점을 숨기기 위해선 나머지를 몽땅 흩트려야 했다. 그것도 남들의 의심을 사지 않도록 아주 교묘하게, 철저한 규칙을 세워 배열해야만 한다. 그래야 가장 들키고 싶지 않은 이에게 의심을 사지 않을 수 있을 테니까.

슬며시 고개를 기울인 라피난이 책장 속의 책 한 권을 살짝 잡아당겼다. 완벽한 질서 속에서 단 한 권만이 어긋나 도드라졌다. 그게 거슬렸다. 아마 현재 자신의 심경이 이럴까 싶었다. 내면의 더러워진 한 점.

글쎄, 어쩌면 아주 오래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이 감정의 불분명한 시작점을 곱씹어 보았지만 명확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아무 고민 없이 숨겨 온 그것. 그래도 딱히 상관없던 과거, 그리고 감정. 그야, 말마따나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으니까…….

다만 문제란 언제나 그렇듯 의외의 곳에서 발현되는 법이다. 라피난은 침통하게 중얼거렸다.

“이제 별로 숨기기 싫군.”

그러자 대뜸 타인의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뭘 말이지. 네 마음? 아니면 너의 비밀?”

“…….”

우뚝, 책장을 어른거리던 라피난의 손이 고장 난 시계 초침처럼 멈췄다. 반대로 소리가 들린 곳을 향해 고개를 돌리기까지는 아주 짧은 순간만이 필요했다.

먹구름 진 창가에 기대고 선 이레이가 조용히 말했다.

“네가 아직도 황제를 기만하고 있을까 갑자기 궁금해지더군.”

반갑다거나 놀랍다거나, 당연하게도 서로의 안부를 묻는 흔한 말이 오가지는 않았다. 라피난은 당장 그와의 간격을 떨어뜨려 최소한의 대비를 갖췄다. 그다음에 대꾸했다.

“신경 끄도록.”

오 년 만의 재회가 충격적인 건 충격적인 거고, 별개로 이쪽의 사생활을 저쪽에서 관여하게 둘 마음은 없었다.

이레이는 곰곰이, 냉랭한 라피난의 반응을 되뇌기라도 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처럼 너스레를 떨지도 이죽거리지도 않았지만 나름 호의랍시고 한마디를 둘렀다.

“어렵다면 내가 대신 밝혀 줄 수도 있지.”

때마침 창밖의 먹구름에서 하나둘 빗방울이 떨어지지 않았더라면 정말로 호의라고 오해했을지도 모른다. 투툭, 묵직한 빗방울이 창문을 때리기 무섭게 맥없이 미끄러졌다.

문득 라피난은 이레이의 무언가가 달라졌음을 깨달았다.

“너…….”

하지만 과연 그게 뭘까 오래 고민하진 않았다. 지금에 와선 그럴 가치가 없었다. 라피난은 옅은 실소를 띠운 채 말했다.

“여전히 허풍이 심하군.”

웬걸, 대놓고 비아냥거리는 말에도 이레이는 발끈하지 않았다. 퍽 귀찮은 눈빛으로 가만히 바라보는 게 완전히 딴사람 같기도 했다.

“선물은 잘 받았나. 네 성의를 봐서 화백을 살려 보냈다.”

“죽이는 게 나았을 거다.”

“왜. 그대의 황제께서 예인을 퍽 아끼시는 듯하여 내가 배려해 드렸거늘.”

담담하게 읊조린 뒤, 갑자기 이레이는 손바닥을 들어 자신의 왼쪽 눈두덩을 덮었다. 라피난의 눈매가 사납게 좁혀졌다.

“적당히 해. 쥰 경을 건드렸다간 너도 평생 용서받지 못한다.”

“너는 이미 용서받지 못할 짓을 저질렀잖아.”

“협박할 생각이라면 관둬라.”

“언제는 허풍이라더니.”

들을수록 가관이었다. 하필 이런 자에게 약점을 잡힌 자신의 업보였다. 물론 눈앞의 남자란 기껏 남의 약점을 잡아 놓고도 제대로 써먹지 못하는 천하의 바보 천치라지만……. 라피난은 꾹 분노를 가라앉히곤 짓씹듯 읊조렸다.

“넌 못 해.”

“그야 예전엔 그랬지.”

“아니. 네가 정말 폐하께 진실을 아뢸 수 있었다면 진작 저질렀겠지. 최소한 오 년 전에, 폐하께서 나와 혼인하기로 결정했을 때. 그게 네가 원하는 걸 쟁취할 유일한 방법이었으니까.”

“…….”

“하지만 그때 못 했으니 이제 영원히 할 수 없다. 장담하지. 아마 천지가 개벽해도 못 할 거다.”

그의 주장은 시작부터 끝까지 단호하기 이를 데 없었다.

듣고 있는 이레이의 눈빛에도 차츰 묘한 빛이 흘러들어 갔다. 반박할 말을 찾다가 실패했을까. 만약 아니라면 방금 전의 라피난처럼 반박의 필요성을 찾지 못했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그는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

“그럼 너의 하늘과 땅을 뒤집어 보지.”

내내 창가에 비스듬하니 기대어 있던 그의 몸이 그 순간 바르게 곧추섰다. 다행히 금세 설명이 따라왔다. 다만, 정말로 다행이었을지는.

“석 달을 주마.”

연달은 목소리는 이번에야말로 협박이 틀림없었다.

“석 달. 그 안에 네가 직접 진실을 밝혀.”

“신경 끄라고 했을 텐데.”

“들어 보면 생각이 바뀔 텐데.”

그는 어지간히 믿는 구석이 있는 모양이었다. 뜻 모를 미소를 띠우더니 슬며시 책장 위에 손을 얹었다. 살짝 닿기만 했을 뿐인데 부지불식간에 천장에서 파편이 떨어져 내렸다.

처음엔 먼지처럼 작았던 것들이 점점 커다란 덩어리로 변해 가고, 이러다 곧 무너질까 올려보았을 땐 예상대로 와르르 책들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이미 지탱할 힘을 잃은 책장이 폭삭 주저앉고 있었다.

“제길, 결국 일을 벌이나!”

거칠게 욕지기를 터뜨린 라피난이 검을 휘둘러 머리 위로 추락하고 있는 장식용 흉상을 갈랐다. 반으로 쪼개진 흉상이 가까스로 그의 머리를 피해 떨어졌을 제, 어느새 서재에는 제대로 앞을 볼 수 없을 정도로 매캐한 분진이 내려앉아 있었다.

오직 이레이의 목소리만이 차단된 시야 속에 선명하게 남았다.

“명심하게, 친구여.”

설마 거기서 그렇게 부를 줄은……. 라피난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레이는 그의 동요에 전혀 동요하지 않은 목소리로 하던 말을 이었다.

“내 경고를 무시했다간 석 달 뒤엔 네 손으로 직접 쥰의 목숨 줄을 끊고 있을 거다. 네 주군이 보는 앞에서.”

그러니까 누가 그런 말을, 친구 앞에서 할 수 있느냔 말이다.

라피난은 연기 너머 사라지는 남자의 인영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지만 끝내 검을 던지지는 못했다.

*

해시트가 승리의 깃발과 함께 돌아온 것은 그로부터 열흘이 지나서였다.

웬일로 성 밖 백성들의 환호에도 오래 대꾸해 주지 않고 전속력으로 성문을 돌파해 들어온 그녀는, 이례적으로 간단한 승리 연설조차 없이 다짜고짜 라피난의 안부부터 확인했다.

“라피난!”

버럭, 외친 뒤엔 급기야 그의 얼굴을 잡고 이리저리 돌려 대며 물었다.

“너 괜찮나? 안 다쳤어? 어디 봐.”

“무슨 말씀이십니까. 출정은 폐하께서 다녀오셨습니다만.”

“하, 하지만 분명 그가……!”

목소리 속에서 여실히 느껴지는 안도와 두려움, 그리고 의심과 허탈함까지. 한껏 뒤엉긴 상반된 감정에 라피난은 조용히 해시트의 팔을 걷어 냈다. 역시 전장에서 이레이와 마주친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당신의 소원대로.

그가 말했다.

“폐하께선 다치신 곳 없습니까? 야만족들은 어떻게 됐고요.”

“……짐은 멀쩡하다. 베누스 놈들은…… 몰살했고.”

그러나 띄엄띄엄 대답하는 얼굴은 그다지 멀쩡해 보이지 않았다. 하얗게 질린 안색 위로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그래도 말하는 도중 이성이 돌아왔는지 차츰 단단해져 갔다.

라피난은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잘됐군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폐하의 서재는 멀쩡하지 못합니다.”

“뭐? 서재?”

“예. ‘그’가 다녀갔거든요.”

“…….”

이번엔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물론 라피난도 이런 반응을 예상하고 꺼낸 얘기였다. 그녀는 ‘그’와 관련해선 이상하리만치 쉽게 당황하곤 했으니까. 벌써 오 년이나 지났는데도 그렇다.

때마침 나머지 행렬이 성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행렬의 마지막에는 포박된 야만족 병사들이 끝없이 이어졌다.

감히 대미케나 제국의 영토를 탐한 결과는 처참했다. 대부분의 병사들은 죽었고 베누스의 왕은 교섭 한 번 없이 포로들을 버렸다. 겨우 함대 한 척만이 살아남아 꽁지가 빠져라 도망을 쳐 댔는데, 하필 바람이 그들의 돛을 열심히 밀어 주는 바람에 추격에는 실패했으나 완벽한 미케나 군의 승리였다.

겉보기에는.

“작살을 내놓고 갔군.”

해시트는 엉망이 된 서재 앞에서 허탈하게 입술을 벌렸다.

“성질하고는. 이럴 거면 청소라도 하기 전에 부수던가.”

까딱거리는 눈썹의 각도가 애절함보다는 언짢음에 가까웠다. 그녀에게 보여 주기 위해 일부러 그대로 보존한 보람이 있었다고 해야 할지, 라피난은 슬쩍 이마를 어루만지다가 이내 서재의 문을 닫았다.

함께 복도를 걸어가며 나눈 대화는 제법 차분했다.

“열흘 전입니다. 모탈루아 해안에서 수도 아르테나까지는 최소한의 휴식만 가지고 말을 달리더라도 대략 그 정도의 시일이 필요합니다. 이레이 린이 찾아온 날은 아마, 폐하께서 모탈루아에서 이레이와 대치하셨다는 밤의 다음 날쯤 되겠지요. 다시 말해 그자는 하루 만에 그 거리를 이동할 수 있다는 뜻이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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