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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시트와 가여운 짐승들-73화 (72/104)

73화.

해시트는 황급히 고삐를 잡아당겼다. 히이잉! 피 냄새에 흥분한 말이 쉽게 멈추지 못하고 날뛰어 댔다. 그와 좀 더 가까워졌을 땐 불현듯 먹구름이 걷혀 보다 선명한 달빛이 쏟아져 내렸다. 창백한 빛이 파르라니 그의 뺨을 적셨다.

마침내 그의 푸른 눈이 드러난 순간, 해시트는 이곳이 적진이고 지금 적장과 눈을 마주했다는 사실마저 잊은 채 멍하니 입술을 달싹였다.

“이레이 린.”

가면처럼 드리워진 투구 아래에 새파란 안광이 이질적이었다.

흙먼지 너머 나부끼는 붉은 머리는 그새 핏물을 머금었는지 평소보다 축축해 보였다.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멀리서도 분명하게 알아볼 수 있었다. 지겨워 죽겠다는 표정이다. 도무지 의욕이라고는 없어 뵈는, 그런 표정으로 그에게 달려드는 제국군을 찔러 죽이길 반복했다.

아니. 죽인다는 표현으론 부족하다. 그보다는 학살이라는 단어가 훨씬 잘 어울렸다.

푹!

“크아악!”

두꺼운 칼날이 또 한 명의 갑옷을 꿰뚫었다. 그에게 달려든 모두는 유언조차 남기지 못했다. 몸통이 잘려 죽은 병사는 그나마 나은 편이었다. 얼굴 정면으로 검을 맞아 뒤통수로 내보낸 이는 끽소리조차 못 내고 즉사했으니까.

콰득……! 코뼈가 통째로 으스러지며 핏물이 사방에 튀었다. 해풍에 섞인 피비린내가 유독 역했다. 또다시 단말마의 비명이 이어진다. 퍼뜩 정신을 차린 해시트가 검을 고쳐 들었다. 박차를 가해 그에게 돌진한다.

휙, 동시에 이레이가 그녀에게 고개를 돌렸다. 말도 안 되지만, 그 짧은 찰나에 서로 무언의 대화를 주고받은 기분이 들었다.

“…….”

“…….”

뺨에 튄 피를 손등으로 닦으면서 그는 그녀에게 둔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그런 채로 반대쪽 팔을 휘저어 그에게 달려드는 제국군 병사의 목을 낚아채더니 그대로 으스러뜨렸다. 살점과 근육이 터져 나가는 소리가 비명 아래 파묻혔다.

“아악!”

그의 장갑 틈새로 파고든 핏물이 바깥까지 흘러넘쳤다.

그때 해시트는 자신이 무엇을 보았고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저 본능에 따라 검을 휘둘렀을 뿐이다. 이를 세게 악물었다. 예리한 검날이 내리치며 공기를 갈랐다.

분명 보이지 않을 만큼 빨랐는데, 이상하게도 그녀의 시야엔 모든 움직임이 느린 상으로 맺혔다. 이레이의 오른손에 들려 있던 납작한 검이 그녀에게 향하는 순간까지 모두 생생했다.

챙!

검날끼리 쓸려 듣기 싫은 마찰음이 났다.

흡사 번개 같은 잔상이 위에서 아래로 미끄러졌다. 그러자 어긋났던 시간 축이 제대로 돌아왔다. 이 뒤로는 모든 것이 빠르게 움직였다.

“크윽!”

관성을 이기지 못한 해시트가 말에서 뛰어내려 아슬아슬하게 바닥을 짚었다. 곧장 앞을 올려다보려 했지만, 그녀보다 한발 빠른 낮은 음성이 귓가로 새어 들었다.

“황제.”

“…….”

무엄하다고 다그쳤어야 했다.

하지만 그녀를 처음 대하는 듯한 말투를 듣자마자 혀가 빳빳하게 굳어 버렸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보니 가장 먼저 희뿌연 흙먼지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반짝이는 백사장이. 마지막으로 올려다본 자리에는 키가 큰 남자가 종전과 별반 다르지 않은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지겨워 죽겠다는 얼굴. 도무지 의욕이라곤 느껴지지 않는…….

해시트의 혼란스러운 눈동자를 보았을까? 이레이는 고개를 슬쩍 기울이며 물었다.

“죽고 싶었나?”

그는 정말로 낯선 이를 앞에 둔 사람처럼 말했다. 해시트는 갑자기 바짝 정신이 들었다.

“네놈이야말로.”

“그럼 왜 날 찾아왔지.”

“왜겠어. 너희 야만족들을 처단하기 위해서!”

원색적인 어깃장이 이어질수록 그녀도 바짝 날을 세워 갔다.

“감히 네까짓 놈들이 제국의 땅을 밟게 둘 것 같으냐? 썩 꺼져 버려!”

“재미있군. 한데 이곳이 언제부터 제국의 땅이었다고?”

그녀와 달리 이레이의 표정에는 전혀 변화가 없었다. 세 발자국 거리에서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더니 갑자기 주변을 둘러보았다. 베고 썰고 찌르고, 비명과 기합과 울부짖는 소리가 한데 어우러져 아비규환이 따로 없는 가운데 그 둘만이 살육을 저지르지 않고 있었다. 아무도 지켜보지 않는 연극이라도 하는 기분이다.

이레이가 말했다.

“백이십 년 전, 미케나는 이 땅에 살던 원주민들을 학살해 몰아내고 제리 해변을 갈취했다.”

“닥쳐. 모탈루아족은 제국과의 상호 합의하에 미케나에 편입되었다.”

해시트는 눈 하나 깜짝 않고 받아쳤지만, 이레이의 여유로움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이 백사장에 널린 모탈루아 족장 일가의 시체는 오가는 갈매기 떼에게 내장이 모두 쪼아 먹힐 때까지 묻힐 수 없었지. 부족민들은 여자 남자 할 것 없이, 선전포고도 하지 않고 들이닥친 제국군과 싸우다 장렬히 전사하였고 남은 이들은 비참한 꼴을 보기 전에 자살했다.”

“…….”

“물정 모르는 어린아이들만이 순진하게 살려 달라고 빌었지만 그들 중 제국 백성들과 비슷한 피부색, 머리카락, 골격을 가진 자들만 생을 부지할 수 있었다. 조금이라도 이질적인 외양을 가진 아이들은 모두 처형되어 저 전탑 아래 묻혔거든. 제국에선 그런 걸 상호 합의라고 부르나? 아니면 황제 당신이 배운 역사는 진실과 다른 건가.”

그는 꼭 제가 겪어 본 것처럼 생생하게 얘기했다. 그렇다면 그는 백이십 년 전에도 살아 있었단 뜻인가? 저도 모르게 퍼져 가는 상념에 해시트는 다급히 도리질을 쳤다.

“허튼소리 마라. 그런 말로 이 몸을 흔들 생각이라면 집어치워.”

“너야말로 수치스러워 마라. 역사란 원래 그런 것이니까. 승자가 쓰고 승자가 가르치는 것……. 내가 그 승자가 되면 그만인 것을.”

“뭐라고?”

그녀가 얼굴을 찌푸리며 되물은 순간이었다. 갑자기 이레이가 손을 들어 투구를 벗었다.

붉은 자국이 덕지덕지 말라붙은 은색 투구가 떨어져 나가며 적당히 그을린 살결이 모습을 드러냈다. 적 앞에서 목을 내어놓다니 겁도 없었다. 와중에 예전보다 조금 길어진 머리 모양이 눈에 띄었으나 변한 것이라곤 단지 그것뿐이라 허탈하기만 했다.

정말 나이를 먹지 않는구나…….

소년인지 청년인지 애매모호한 외모는 이제 속을 들여다보기 힘든 깜깜한 표정까지 더해져 모든 것을 감출 듯 까마득했다. 그러면서도 한 마디 한 마디를 내뱉을 땐 잔인한 진심을 뚝뚝 흘려보낸다.

“하지만 황제, 당신을 죽이는 건 너무 쉬워서 내키지 않아.”

“그럼 내키지 않은 채로 죽어라.”

해시트는 코웃음을 치며 검을 휘둘렀다.

어차피 손쉽게 막아 낼 걸 알았기 때문에 그토록 정확하게 급소를 노릴 수 있었을지, 아니면 정말로 이대로 그를 죽여 버리고 싶었던 건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이레이는 목덜미로 찔러 들어오는 뾰족한 검을 한 손으로 가뿐히 막아 냈고, 쇠로 된 장갑이 산산이 조각나 아래로 떨어지고 나서야 비죽이 웃으면서 맨손으로 칼날을 잡아당겼다.

“이 칼은 그 녀석이 줬나.”

맨손에 날이 배기자 검붉은 핏물이 새어 나왔다. 해시트도 보란 듯이 실소를 머금었다.

“그래. 뭘로 만들어졌는지 알아봤나 보군.”

“그럼 황제께서는 이걸로 날 어떻게 해 보겠다는 요량이신가.”

“못할 것 같나?”

“글쎄, 너무 무모하지 싶어서.”

해시트가 조금만 힘을 줘도 손가락이 잘려 나가기 딱 좋은 상황에서 여전히 유유자적하다. 그야, 사실 해시트는 지금도 안간힘을 다해 버티는 중이었다. 악력의 차이가 너무 심했다. 그는 일부러 그녀를 가지고 노는 중이었다. 이대로 질질 끌려가지나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빠져나갈 기회만 엿본 끝에 일순 해시트는 힘껏 도약해서 이레이의 배를 걷어찼다.

퍽! 반동을 동력 삼아 그의 손아귀에서 검을 빼내는 데 성공한 그녀가 허공에서 다시금 급소를 노렸다. 휘익!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로 공기가 쪼개졌다. 그러나 노력이 무색했다. 눈 깜짝할 새 전세가 역전당해 바닥에 뒤통수를 찧은 꼴이었다.

쿵, 소금 냄새 가득한 백사장의 모래가 사방으로 튀었다.

까끌거리는 모래 알갱이들이 갑옷 틈으로 마구 침범해 불편했다. 가장 불편한 건 턱 바로 아래를 겨냥하고 있는 이레이의 검집이었다. 모욕적이게도 칼날조차 단단히 가둔 검집 말이다.

다시 그가 말했다.

“무모하다고 했잖아.”

“…….”

어느새 다가온 그의 손이 그녀의 투구마저 벗겨 내고 있었다. 이마부터 천천히 헤집어 대는, 찬 겨울에 걸맞은 손끝이 시리디시렸다. 원체 숨결조차 싸늘한 남자였지. 그에게 얼굴을 훤히 내보인 해시트가 새삼 곱씹었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잠시간 아무 말 없이 해시트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한 손은 여전히 검집을 쥐고, 나머지 한 손은 바닥을 짚는 듯하다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두 사람 옆으로 한 자루의 검과 두 개의 투구가 백사장을 뒹굴고 있었다. 해시트는 또다시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기분이 싫었다. 그래서 아주 꼿꼿하게 턱을 치켜들고 물었다.

“내가 목숨을 구걸하기라도 기다리나?”

“그것도 말했을 텐데. 이렇게 약해 빠진 황제를 죽이는 건 내키지 않는다고. 알고 있겠지만 드래곤이란 타고나길 사악하며 간계를 좋아한다. 어쩌면 이런 게 바로 분수라는 걸지도.”

그는 마치 남의 얘기처럼 떠벌렸다. 별안간 백사장을 뒹구는 해시트의 검을 힐끔 보더니 재미있다는 듯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검에 이름이 새겨져 있군.”

“짐의 것이니까.”

“내가 연연하길 바랐나.”

“그런 적 없다.”

“그럼 그렇게 불러 주길 바라기라도 했나? 해스.”

“닥쳐!”

해시트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남자는 여전히 무표정했다.

“좋아.”

해시트의 숨통을 옭아매고 있던 검집이 서서히 떨어져 나갔다.

널찍한 몸뚱이에 갇혀 드리워진 그림자도 조금씩 멀어져 갔다. 포박이 풀렸으니 당장 일어서야 마땅했으나, 어째서인지 해시트는 그런 것들보다 이레이의 움직임을 쫓는 데 선수를 빼앗기고 말았다. 물론 이유는 있었다. 그의 눈빛이 종전과는 비교하지도 못할 정도로 섬뜩하게 물들어 갔기 때문이다.

이미 새파랬던 눈동자에서 한 겹이 더 걷혀진다. 해일 같은 푸른빛이 쏟아졌다. 모든 것을 집어삼킬 기세로, 아니 그러고도 만족하지 않을 게 뻔했다. 그는 흔한 겨울 입김 한 번 흩트리지 않으며 쉽게 내뱉었다.

“그렇군. 당신이 여기 있다는 건 그 녀석 혼자 성을 지키고 있다는 소리야.”

“…….”

심장이 내려앉는다면 이런 감각이겠다.

해시트는 직전까지 내리눌렸던 목울대를 콱 움켜쥐었다. 소리를 쥐어짜 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번에도 이레이가 그녀보다 한발 앞서 입술을 뗐다.

“궁금하군. 나의 본능이 아직도 그를 친구로 여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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