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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시트와 가여운 짐승들-72화 (71/104)

72화.

라피난은 그들의 인사를 받아 줄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야 평소에도 눈빛이나 한번 흘긋 스치고 말았겠지만, 지금은 그 정도 성의조차 보일 마음이, 아니, 겨를이 없었다. 황제가 밤마다 창문을 열고 기다리는 이가 누구인지 캐묻지 않아도 짐작이 갔다.

그는 말없이 걸음을 이어 방문을 열었다. 시종들이 후다닥 멀어지는 발소리가 들렸다. 그들이 굳게 닫아 두고 간 침실 창문을 보면서 그는 잠시 갈등했다. 물론 오래 버티지는 못했다.

이 감정이 비참함이라는 것을 이제 그만 인정해야만 했다.

*

겨울의 초입이었다.

계절을 막론하고 전쟁은 고된 일이나, 그래도 시체 썩는 냄새가 고약한 여름보다는 낫다고 생각할 즈음이면 막사로 새어 들어오는 찬 바람이 어김없었다. 이러다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얼어 죽겠다. 병사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거늘 침대 하나에 서넛씩 몸을 붙여 누웠다.

해시트도 추위를 탔다. 아마 남들보다 많이 탔다. 살을 엘 듯한 찬 바람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어깨를 떨곤 했다. 하지만 볏짚으로 쌓은 침대맡에 겨우 작은 횃불 하나를 땔 뿐, 그마저도 침대에 옮겨붙을라 멀찍이 떨어뜨려 놓고 밤을 지새우기 일쑤였다. 전쟁터에서 선황이 죽던 밤에 그 남자에게 안겨 잠든 기억을 잊지 못하는 한 평생을 이럴 게 뻔했다.

“젠장. 추워.”

결국 오늘도 잠들지 못한 채, 그녀는 나지막이 욕설을 내뱉으며 침대 위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았다.

베누스로 보낸 정찰대 중 단 한 명만이 살아 돌아왔을 때 이미 예견된 전쟁이었다. 왕의 초상화를 그려 오라 일렀던 예인은 귀머거리이자 장님이 되어 돌아왔다.

손목이 잘렸으니 그림을 그릴 수도 없으리라. 듣지 못하는 그에게 증언을 얻기 위해선 손목에 글자를 그려 소통하는 수밖에 없었다. 해시트는 라피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직접 그의 팔뚝에 손을 올려 물었었다.

[야만국의 왕을 보았나?]

과거 촉망받는 예인이었던 손은 온데간데없고, 고문의 흔적으로 너덜너덜하게 갈린 손목이 징그러웠다. 굳이 심부름꾼에게까지 이런 잔인한 방법을 택하는 자였던가? 해시트는 제 기억을 의심했다. 곧이어 돌아온 사내의 비명을 들은 순간엔 그토록 실낱같은 미련을 버리지 못한 자신이 미워졌다.

“암만! 순수한 악! 그는 악이오! 악마도 그보다 잔인하진 않겠소!”

사내는 완전히 미쳐 버렸다. 꿰맸다 뜯어낸 바늘자국이 남은 입술로 침을 질질 흘려 가며 악다구니를 쓰다가 이내 머리를 움켜쥐고 바닥을 뒹굴었다.

라피난은 충격받은 해시트를 억지로 그에게서 떼어내고는 직접 사내 앞에 앉았다. 동요 없는 그의 심문에 마침내 쓸 만한 증언을 얻어 내는 데 성공했다. 야만국의 왕은, 야만국의 왕은 핏물처럼 붉은 머리에 바다를 얼린 듯 새파란 눈을 가졌다고 했다.

자연히 해시트는 언젠가 이레이의 눈을 바라볼 때 느꼈던, 바다를 유영하는 듯 황홀하던 기분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제국에서 떠돌이 취급 당하던 그의 붉은 머리카락을 되뇌었다.

그러자 더는 그가 베누스의 왕이 아니라고 우길 수 없게 되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려 보라지. 가려지지 않아서 며칠을 앓았다.

열이 들끓는 와중에 차가운 손바닥이 그녀의 이마를 짚어 주는 꿈을 꾸기도 했다. 익숙하고도 그리운 체온에 반짝 눈을 떠 보면, 번번이 물수건을 쥔 라피난과 눈이 마주쳤다. 실망하는 표정을 들켰을까 곤란했다. 라피난이 늘 모르는 척해 주는 것을 알아서 더욱더 곤란했다.

“이렇게 자꾸 아파서 세상은 언제 바꾸시려고요.”

빨리 털고 일어나라는 잔소리치고는 열을 재는 손길이 퍽 걱정스러웠다.

좀 우습다. 어릴 땐 독감에 걸려도 완전히 모른 척하더니. 그래서 그녀도 아프지 않은 척했는데 말이다. 어리광을 들어줄 거면 그때나 들어주었어야 했다. 해시트는 괜히 그의 손을 쳐 내고 쌀쌀맞게 대꾸했다.

“걱정하지 마. 너를 갈아 넣어서라도 바꿀 거니까.”

“부패 신관 명부라면 완성한 지 오래입니다만.”

“진작 말하지. 승인해 줄 테니 서류 가져와라.”

“나중에요.”

라피난은 그녀에게 거절당한 손목을 만지작거리며 여상히 화제를 돌렸다.

“그건 그렇고. 이제 더 큰 그림을 그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큰 그림?”

“언제까지 위에서 아래로 향할 수는 없으니까요. 언젠가는 아래에서 위로 뻗도록 해야죠. 슬슬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듣자 하니 종이도 마르기 전에 물감 뜯는 소리더라. 그답지 않게 성급하게 굴길래 해시트는 잠깐 할 말을 잃었다. 빨리 정신 차리라고 일부러 이러나 싶었다. 아무렴 잔소리를 들어 마땅하지. 그녀는 엷게 웃었다.

“그런 건 한 오십 년 뒤에. 아니지, 내가 그때까지 살아 있을 확률은 희박하니까……, 한 이십 년쯤 잡고 천천히 진행하자고. 지식의 개념을 정리하는 데 최소 십 년, 백성들에게 설파하는 데만 다시 십 년은 족히 걸릴 거다. 넌 그때까지 매일 야근할 각오하고 건강관리나 잘해.”

“설파하는 데 십 년이라……. 그렇군요.”

그제야 라피난도 희미한 미소와 함께 해시트의 이마를 쓸어 주었다.

“절대 마음 약해지지 마십시오.”

“…….”

“어떤 상황에서도요.”

백번 옳은 충고였다. 이마를 스쳐 가는 라피난의 따뜻한 손끝에 해시트는 눈을 감았다. 다시는 이 손을 다른 이와 헷갈리지 말아야지, 다짐했다. 다짐은 곧 습관이 되었다. 마침내 병치레가 다 지나간 뒤에도 그녀는 이따금 자신을 나무라곤 했다.

“잊어버려.”

그를 잊어야 한다.

이레이는 해시트에게 받은 상처를 돌려주고자 돌아왔다. 단지 복수에 그쳤다면 그녀 혼자 슬프고 말았을 텐데. 애석하게도 그녀의 존재가 제국의 존망과 함께했던 고로 결국 이레이의 사사로운 마음은 제국 백성들에게로 향했다. 이미 제위와 그 남자 중에 백성을 선택한 바 있는 그녀는 그 결정을 번복할 수 없었다.

“네가 아는 그놈은 이제 세상에 없다.”

최면하듯 반복했을 때였다.

“적이다! 적들이 움직인다!”

막사 밖에서 거친 외침이 울려 퍼졌다. 그녀는 당장 이불을 걷어 내고 검을 낚아챘다.

*

사흘의 전투 끝에 제리 해변까지 야만족 놈들을 밀어내는 데 성공했으나 과정에서 제국군의 피해도 만만치 않았다.

마지막 일격을 잠시 유보하고 대치한 날이 다시 나흘째. 이대로 하루만 더 버티면 지원군이 도착한다. 승리가 코앞이었지만 해시트는 불길한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전투가 시작된 지 일주일이 다 되어 가는데도 아직 야만족의 왕을 만나지 못한 탓이었다. 그가 참여하지 않은 전투에서 승리해 봤자 아무 의미가 없음을 해시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지원군이 바로 옆 마을까지 진입했다는 소식이 들려온 밤에 마구잡이로 불화살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어차피 거리가 멀어 이쪽 진영에는 채 닿지도 못했다. 대신 텅 빈 민가에 꽂혀 불을 퍼뜨렸다.

아무리 해안가일지라도 겨울엔 바짝 메마를 수밖에 없었다. 불이 아예 마을을 삼킬 듯 커지자 해시트는 소대 한 개를 통째로 들여보내 진압을 명했다. 대피한 주민들이 돌아왔을 때 아무것도 남지 않은 마을을 보여 줄 순 없었다.

전차와 포환을 준비해 궁수들이 탄 배를 하나둘 전복시켰다. 화살 비에 정신이 팔린 틈을 타 숲과 바다에 숨어 있던 돌격대가 달려들었다. 아악! 누군가가 비명을 질렀다. 어두컴컴한 모래사장에 희뿌연 먼지가 일었다. 어느 순간부턴 형형한 고함이 끊기지 않았다.

뒤에서 작전을 지시하던 해시트도 금세 검을 뽑아 들었다. 달빛에 반사된 검신이 찬란한 금빛으로 빛났다. 그녀는 일부러 거친 말씨를 읊었다.

“쫓겨나기 전에 마지막 발악을 하는 모양이다. 빈손으로 베누스로 돌아가 봤자 무자비한 왕에게 몰살당할 테니까! 그렇다면 여기서 모조리 목숨을 끊어 주는 것도 자비겠지. 모두 알아들었나?”

“예! 폐하!”

“쥰, 네가 선봉에 서라.”

오늘도 야만족의 왕은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았다. 조무래기만 판치는 이런 전투에까지 황제가 선봉으로 나선다면 오히려 아군의 사기가 떨어진다.

당연하게 쥰에게 지시하고 후방을 지키려는데, 갑자기 망루의 나팔수가 신호를 울렸다. 우우웅! 경고음이다. 해시트를 비롯한 모두가 고개를 쳐들었다.

“저기 야만족의 왕이 보인다! 왼쪽! 열한 시 방향이다!”

고민조차 하지 못했다. 몸은 사고보다 빠르게 말을 찾고 있었다. 해시트는 순식간에 안장에 올라 고삐를 쥐었다. 곧장 쥰이 소리쳤다.

“폐하!”

“내가 맡겠다. 투항해 오는 포로들은 격리한 뒤 철저히 감시하도록!”

“해시트 폐하!”

그게 만류하는 부름임을 알면서도 못 들은 척 고삐를 내리쳤다. 이랴! 거친 채찍질과 함께 거대한 군마가 뿌연 흙먼지를 일으키며 목적지로 튀어 나갔다. 왼쪽. 열한 시 방향이다.

*

이레이가 지금까지 어디서 뭘 하느라 이제야 나타났는지 해시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지난 일주일 동안 유명을 달리한 베누스의 병사가 몇 명이었거늘, 셀 수도 없는 목숨이 들풀처럼 꺾이고 스러진 시체가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는데도 그들의 왕은 얼굴 한 번 비치지 않았다. 왕은 그래선 안 된다. 그래서 해시트는 이레이가 왕이 된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 놓고 전세가 완전히 기울어진 지금에야 홀연히 모습을 드러내다니? 그녀가 가장 방심했을 때 찾아와 비웃어 주려는 못된 심보라면 차라리 두려움이 덜하겠다. 달려드는 적들에게 가차 없이 검을 휘두르며 해시트는 이레이의 꿍꿍이를 알아내려 애썼다.

밤부터 시작된 전투가 길어지며 달이 새벽 어스름에 걸렸다. 초승달 주위에 몰려든 먹구름 아래에 수백 명의 병사가 마구잡이로 뒤엉켜 있었다. 저마다 투구를 쓰고 있어서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적군인지 아군인지만큼은 여실했으니 상관없었다.

더욱이 해시트는 시커멓게 뭉친 무리의 틈바귀에서도 단번에 이레이를 찾아냈다. 투구 때문에 머리색도 보이지 않고 눈가에도 그늘이 드리워져 푸른빛을 알 수 없었는데, 그냥 한눈에 보였다.

갑옷을 제대로 챙겨 입지 않은 몸에 그의 몸집만큼 거대한 망토만이 펄럭인다. 그다. 이레이 린이 저기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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