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시트와 가여운 짐승들-69화 (68/104)

69화.

최근 국무회의의 주요 안건은 단연 야만족 베누스에 관한 것이었다. 야만족의 세력이 하루가 다르게 커져 갔기 때문이다.

처음엔 해안선을 따라 비교적 작은 부족만 골라 침범하더니, 이제는 육로까지 탐욕을 뻗어 가며 전면전까지 마다치 않았다. 심지어 몇 달 전에는 바샤마일에서 크샨 왕국으로 바친 공물을 갈취하고 행렬을 몰살시키기까지 했다.

크샨에서도 베누스와의 전쟁을 선포하지 않고는 체면을 지킬 수 없었던 바, 결국 한여름 땡볕에 백만 대군을 이끌고 사막을 횡단했으나, 그들의 동선을 예상한 베누스 군사들이 몰래 크샨 산맥에 매복해 있다가 수도 병력이 빈 틈을 타서 왕국 백성들을 수탈하고 막대한 피해를 입혔음이다.

“외람되오나 폐하, 어중이떠중이로 이루어진 야만국에 그 정도의 지략가가 존재할 리 없습니다. 분명 외부의 도움이 있었으리라 사료됩니다.”

문득 또 다른 대신이 새로운 주장을 제기했다. 왜 그 말이 안 나오나 했다. 해시트는 기다렸다는 듯 조소했다.

“허면 누군가 세상에 혼란을 주기 위해 베누스를 이용하고 있다는 것이냐? 우리 미케나 이외에는 단 한 번도 전쟁에서 패배한 적 없는 크샨 왕국까지 공격해 가면서?”

“하지만 그렇지 않고서야…….”

“그래! 이번에 공격당한 나라가 크샨이 아니었다면 물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그런 짓을 할 만한 건 비열한 크샨 놈들뿐이니까!”

해시트가 더럭 언성을 높였다. 노기 어린 그녀의 반응에 다들 고개를 숙이며 시선을 회피했다.

“그러니 지금은 굳이 나설 필요 없다. 신중하게 그 둘의 싸움을 지켜본 뒤에 판단해도 충분해.”

아직 크샨과 베누스 두 나라 간의 싸움이 현재진행형이었다. 괜한 싸움에 숟가락을 얹었다가 불필요한 동맹군을 만들 필요도, 두 적군 사이에 끼어 배신과 모략을 미리 대비할 필요도 없었다.

“무엇보다 지금은 알테 공국과의 외교 행사 중이다. 화친단이 머무르는 동안 군사를 움직이는 건 안 될 말이지. 그대들이 그토록 중시하는 전통과 예의 아닌가?”

싸늘하게 통보한 그녀가 장내를 둘러보았다. 이래도 할 말이 있다면 어디 해 보란 뜻이었다.

다들 입이 붙어 버렸는지 무거운 침묵만이 돌아왔다. 오늘이라도 피를 안 보게 해 줬으니 고마운 일이다. 헛웃음 친 해시트가 거친 몸짓으로 회의장을 빠져나갔다. 라피난이 냉큼 그녀를 따라 나오자 한쪽 팔을 들어 그를 저지한다. 흘긋, 짧은 시선을 던지며 그녀가 말했다.

“넌 남아서 저 멍청이들 좀 달래고 와.”

“이후엔 편전으로 갈까요?”

“마음대로 해.”

“…….”

그녀의 말에 잠시 해시트를 바라보던 라피난이 이내 걸음을 되돌렸다.

*

회의장을 빠져나온 해시트는 편전이 아닌 귀빈 궁으로 몸을 틀었다. 갑작스런 방향 전환에 쥰이 의아한 기색을 내비쳤지만, 그녀는 따로 설명하는 일 없이 걸음만 계속해서 재촉했다.

귀빈 궁에는 알테 공국에서 온 사절단이 머무르고 있었다. 해시트는 단숨에 목표물을 찾아내 나무 그늘로 직진했다. 그늘에서 쉬고 있던 공국의 대사가 해시트를 보자마자 넙죽 풀 바닥에 엎드렸다.

“대미케나 제국의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거기서 듣도록.”

“망극합니다.”

해시트는 꼿꼿이 허리를 편 채 엎드린 사절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카일 재상이 그대에게 부탁한 물건이 있다고 들었다. 하나 세공 실력이 부족해 몇 년째 지지부진하다지.”

“송구하게도 그렇습니다, 폐하. 부디 너그러움을 베푸시어 조금만 더 기다려 주소서.”

사절이 고개를 더욱더 아래로 조아렸다. 가지런히 바닥을 짚은 양손에 굳은살이 투박했다. 그러나 검사나 궁수의 그것과는 달랐다. 주로 작고 반짝이는 물체를 세공하는 이들의 손이 이런 모양을 띤다. 유리나 보석, 혹은 단단한 고철을 세공해 온.

그 투박한 손끝을 눈여겨보다가, 불현듯 해시트가 바짝 몸을 숙였다. 무릎을 굽히고 어깨를 옹송그려 상대의 귓가에 얼굴을 가까이 댄다. 그리고 남들에겐 들리지 않을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봐. 이번에 공국으로 돌아가거든…….”

*

부랴부랴 편전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그새 라피난이 황제궁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늦으셨군요.”

“네가 빠른 거다.”

“예, 들어가시죠.”

어딜 다녀왔는지 묻지도 않는다. 딴 길로 샐 줄 이미 짐작했던 모양이다. 해시트는 머쓱하게 눈썹을 까딱이고는 시치미를 뚝 떼고 그와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수중 정원에 배를 띄운 두 사람은 뱃사공은 물론이거니와 쥰까지 육지에 떼어 놓고 연못 위에서 이야기를 나눴다.

뱃사공 대신 노를 저으며 라피난이 말했다.

“만약 크샨이 전쟁에서 패한다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만약이란 없어. 크샨은 패배할 거다.”

단언하는 해시트의 표정은 심각함보다 시답잖았다. 그런 쓸데없는 가정을 세우고 희망에 휘둘릴 시간에 전술집을 한 권이라도 더 읽는 게 나았다.

“확신하시는군요.”

“너는 의심 중이기라도 한가?”

“아뇨. 대책을 고민 중입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라피난도 해시트와 같은 생각이란다. 이제 해시트는 쓴웃음조차 짓지 못했다.

“내일부터 군사 훈련을 강화해라. 호들갑 떨지 말고 자연스럽게. 국경의 출입증을 새로 만들고, 기존에 발급받은 것은 사용하지 못하게 해. 새것으로 교환하러 온 자들도 꼼꼼히 신분을 확인하고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우면 가차 없이 반려하라 일러라.”

“특별히 융통성 없는 자들을 골라서 배치해야겠군요. 그리하겠습니다.”

그나마 크샨과 베누스가 전쟁을 치르는 동안 최소한의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짧으면 넉 달, 길면 일 년. 그동안 최선을 다해 국방력을 강화하고 전쟁에 대비하는 것이 지금으로선 할 수 있는 전부다.

“앞으로 늪지대와 절벽 지역까지 순찰대를 확대해라. 놈들이 크샨을 급습할 때 산맥에 숨어 있었다지? 절대 방심은 금물이야.”

정말로 방심해선 안 됐다. 해시트는 ‘그 남자’가 맨몸으로 크샨 왕국의 성벽 너머로 숨어들어 적들을 함락시킨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갑자기 더운 바람이 불어왔다. 라피난은 해시트에게 물길이 튀지 않도록 자연스레 노 젓는 방향을 바꿨다. 방향을 바꾼 배가 연못가에 희미하게 드리워져 있던 안개를 헤쳤다. 문득 울려 퍼진 라피난의 목소리가 촉촉한 안개와 잘 어울렸다.

“저는 요즘 들어 폐하께서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 말이 꼭 해시트의 의중을 묻는 듯했다. 정말 그렇게 전쟁에 철저히 대비해도 괜찮겠느냐고. 당신 지금 야만족의 왕을 죽이기라고 할 것처럼 말씀하고 계신다고 말이다. 그의 속내가 희뿌연 안개 속에서도 어쩜 그리 훤히 보이는지 신기할 지경이었다. 해시트는 무심코 실소했다.

“신기하구나. 짐은 그 반대인데.”

“그렇습니까?”

“응. 어린 시절 너를 알고 지냈던 십 년보다, 어른이 되어 너와 결혼한 뒤의 오 년 동안 너를 훨씬 더 많이 알게 된 기분이야.”

“……이만 돌아갈까요.”

라피난은 보란 듯 받아치는 대신 육지로 뱃머리를 돌렸다. 짧게 앞세운 침묵에는 기실 얕은 타박이 존재했더랬다. 끝내 꺼내지 않기로 한 지금은 그저 과거형에 그칠 뿐이다.

그거야 이제 폐하께서 감정적 우위를 차지하고 계시니까요.

그런 타박을 숨기는 데 급급했으니, 당연히 다른 속내까지 감출 재간은 없다.

*

크샨 왕국의 패전이 공표된 것은 그로부터 석 달 뒤, 해시트와 라피난의 예상보다도 한 달이나 이른 시기였다. 여름은 진작 다 가고 가을도 거의 끝물에 다다랐을 때. 그때는 알테 공국의 화친단이 일찍이 본국으로 돌아가서, 대미케나 제국의 황제께 바칠 선물을 완성한 직후이기도 했다.

쇳물에 영롱한 금빛이 섞여 신비롭게 빛나는 검.

얇은 검신에 빛이 닿을 때마다 그 검을 쥔 황제의 눈동자처럼 아름답게 반짝였다. 사람을 베기엔 너무나 섬약해 보이면서도 가볍게 휘두르는 족족 산천마저 벨 듯 날카로웠다. 라피난은 정작 검의 주인보다 더 그 검을 마음에 들어 했다.

“훌륭하죠. 알테 공국 최고의 대장장이가 폐하를 위해 만들었다고 합니다.”

“쓸 만하군.”

해시트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고개를 주억거릴 따름이었다. 공국 대신에게 귓속말로 속삭여 준 보람이 있었다.

“대장장이를 충분히 치하해 주어라.”

“예.”

허공에 몇 번쯤 검을 휘둘러 보니, 문득 그녀 안의 무언가가 깨져 사라진 듯한 느낌이 들더라. 아프지는 않았다. 해시트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이 검에 이름을 지어 줘야겠다.”

그리고 홀로 편전에 앉아 한나절을 내리 고민하여 지은 이름은 조금도 대단치 않았다.

“해스.”

그건 그녀의 이름이었으니까. 그러나 이제 그 이름을 불러 줄 이가 이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제법 특별하였다.

*

병사들은 오 년 만의 출정 준비가 낯설다는 얼굴로 몇 번이나 군장을 고쳐 멨다. 하지만 누구도 겁에 질린 기색은 아니었다.

야만국 베누스의 함선이 미케나의 서쪽 국경지대로 몰려오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온 새벽, 황제 해시트는 누구보다 먼저 군마에 올랐고 선봉에 서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들의 주군이 함께할진대 야만국 따위가 무서워 뒷걸음질 칠 수는 없었다. 모두 갑옷으로 무장하고 창과 검, 그리고 방패를 들었다. 다함께 앞으로 나아갔다. 모두 목표하는 바는 동일했다.

반드시 야만족 전부를 벌하여, 그들의 왕은 목을 잘라서 국경에 걸어 두리라.

병사들은 마치 군가라도 부르는 양 야만족의 왕에 대해 떠들고 또 떠들었다. 나중엔 다들 귀에 인이 박이도록 들어 처음부터 끝까지 외울 수도 있었다. 그러면서도 매번 처음 듣는 사람처럼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곤 했다.

이유는 모르겠다. 자꾸만 어디선가 들어 본 것만 같은 기시감이, 아니, 어디선가 꼭 한 번은 마주친 것만 같은 익숙한 기분이 들어서…….

“이봐, 그런데 베누스의 왕은 이름이 뭐라던가?”

“이름은 못 들었는데. 애당초 그런 야만족에게 이름이 있겠어?”

“뭐……. 그런가…….”

어느 작은 백인 소대의 대원 하나가 천천히 눈을 끔뻑였다. 밤새도록 떠들고 또 떠들어 댔던 베누스의 왕에 대해서 떠올리는 눈빛이었다. 입에 문 담배에서 가느다란 연기가 피어오른다. 불분명한 그의 기억처럼 탁했다.

그래. 베누스. 미천한 야만국. 그런 나라의 왕.

바람결에 실려 온 그의 소문을 또다시 곱씹어 본다.

어떤 남자가 혈혈단신으로 야만족의 왕을 죽이고 새로운 왕이 되었다는 이야기. 그러나 새로운 왕에겐 이름이 없다.

머잖아 위대한 제국으로 못된 야만족이 침략해 들어오기를, 그들의 왕은 핏물처럼 붉은 머리카락에 바다를 얼린 듯 새파란 눈을 가졌고, 너무나 잔혹하고 냉정하여서 사랑을 모른다고 하였다.

사랑을, 모른다고 하였다.

제3막. 사슴이 사라진 세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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