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시트와 가여운 짐승들-68화 (67/104)

68화.

은밀하게 해상 정찰대를 꾸리라는 서류가 넘어가고, 또 넘어가고, 마침내 제리 해변까지 닿는 데 약 보름이 걸렸다. 땅덩어리가 워낙 넓다 보니 무엇 하나 빨리 진행되는 일이 없었다. 보나 마나 베누스까지 닿았다가 돌아오는 여정은 더욱 길 터였다. 베누스까지 한 달로는 어림도 없다던 라피난의 충고가 과연 정확했음이다.

그러나 두 달이 지나고 석 달이 지나도 정찰대원들에게선 돌아오는 소식이 없었다.

라피난의 표현에 따르면 최정예 인재로 다섯 명이나 꾸려 보냈거늘 단 한 명조차 감감무소식이었다. 내내 내색하지 못하고 애만 태우던 해시트도 석 달이 훌쩍 지나갈 무렵부턴 초조함을 드러내며 후속 조치를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성문 밖 저잣거리를 배회하던 넋 없는 말과 그 안장에 오른 사내가 발견된 것은 완연한 가을마저 지나간 겨울의 초입이었다. 마침 휴일을 맞이해 성 밖 본가에 다녀갔던 쥰이 무언가 수상함을 감지하고 자신의 말을 멈춰 세웠다고 했다.

사내는 말에서 내리라는 쥰의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 타고 있는 말이나 고삐를 쥔 사내나 멍하니 넋이 빠진 것은 매한가지길래, 쥰은 별수 없이 그를 강제로 제압하기 위해 가까이 다가가야 했다.

한데 가까이서 보니 사내는 고삐를 쥔 것이 아니라 두 손목이 묶인 채 고삐에 매여 있는 상태였다. 묶인 손목 아래에는 손가락이 없었다.

맙소사. 놀란 쥰이 황급히 사내의 로브를 벗겨 냈을 때, 비로소 사내가 쥰의 명령에 따르지 않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는 두 귀가 잘린 데다 양 눈두덩이 움푹 파여 있었다. 듣지 못하고 보이지 않으니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끔찍하게도 위아래 입술까지 꽁꽁 바느질된 채였다. 도움을 청할 수 없던 이유다. 사내의 끔찍한 몰골을 목격한 저잣거리 사람들이 비명을 내지르며 멀찍이 뒷걸음질 쳤다. 쥰만이 그를 말안장에서 끌어 내려 생사를 확인할 뿐이었다. 희미하게 뛰는 맥을 확인하자마자 당장 의사를 불러오라며 고래고래 소리를 내질렀다.

그때 쥰은 혼란스러웠다.

그래, 혼란스러웠다.

꿈에 나올까 두려운 사내의 몰골이 어쩐지, 정말 이상하게도, 기묘한 기시감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왜 익숙할까.

이 잔인한 솜씨는 뭐랄까, 전쟁터에서 가장 잔인하기로 유명한 상관이 성벽을 함락한 직후에 본보기 삼을 포로에게나 할 법한 짓이었다. 갑자기 그런 목소리가 어른거렸다. 이렇게 해야 망설이는 말단 군인들이 우르르 투항한단 말이야. 아무리 나라도 돈 때문에 억지로 끌려 나온 어린애들까지 죽이긴 싫어.

이 목소리는…….

“……대장님.”

불시에 눈을 크게 뜬 쥰이 사내의 로브를 들춰 차림새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허리춤에서 꺼낸 호주머니 안에 단서가 들어 있었다. 쥰이 얼굴을 이지러뜨렸다.

“해군 정찰대.”

신분증의 금실 자수를 한 차례 어루만진 그녀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의사를 기다릴 시간이 없었다. 쥰은 곧장 사내를 자신의 말에 태우고 전속력으로 달렸다.

*

군의관은 환자의 상태를 보자마자 어찌할 줄을 모르고 방황하다가 우선 입술을 막고 있는 두꺼운 실부터 뜯어내자고 말했다.

“묽게 탄 소금물을 준비해 주십시오. 얼마나 굶었는지는 몰라도 곧바로 맹물을 마시면 급사할 수도 있습니다.”

군의관의 지시에 따라 몇몇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가운데, 이윽고 가위를 들고 돌아온 군의관이 환자 앞에 앉았다. 조심스러운 가위질에 입술을 봉한 실밥이 한 땀씩 풀어졌다.

가뭄이 든 우물처럼 쩍쩍 갈라져 있던 입술이 열리자, 깊은 안쪽에서부터 지독한 악취가 터져 나왔다. 그걸 코앞에서 맡으면서도 토악질 한 번 않고 묵묵히 소금물을 입에 넣어 주다니 의사란 대단한 존재임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사내는 군의관이 부어 주는 소금물을 절반도 다 삼키지 못했다. 물을 마시는 것보다 더 중요한 목적이 있다는 듯이 행동했다. 그는 형편없는 발음으로 황급히 웅얼거렸다.

“황제…… 폐하…….”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은 탓에, 그리고 넝마가 된 육신 때문에 목소리가 너무 작았다. 그런데도 필사적으로 황제를 찾는 모습이 섬뜩했다.

“폐하…….”

하기야 이런 반송장이 되어 고국으로 돌아온 판국에 황제께 아뢸 말이 없다면 그게 더 이상하리라.

상황을 지켜보던 쥰은 마른침을 삼키고 출입문을 흘깃 곁눈질했다. 회의에 들어간 해시트를 찾는 시종을 보내 두었지만 언제쯤 소식이 닿을지는 불확실했다. 솔직히 그 전에 사내가 죽어 버릴까 봐 걱정됐다. 초조하게 시간을 재던 쥰은 군의관의 손에서 소금물을 낚아채 직접 사내의 입에 넣어 주었다.

“이봐요. 말 그만하고, 일단 이것부터 마셔요. 힘들잖아요. 곧 폐하가 오실 테니까 치료받으면서 기다리면…….”

“그…… 대의…… 황제…… 폐하께서는…….”

하지만 사내의 그 행동이 몇 번이나 반복되자, 쥰은 불현듯 깨닫고 말았다. 이 남자는 해시트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이렇게 애쓰는 것이 아니다. 어차피 귀가 잘려서 제대로 듣지도 못하는걸. 추측건대 그는 귀가 잘리기 전에 전해 듣고 외운 대사를 읊는 중이었다.

“폐, 폐하께서는…… 여전히……. 시, 시…….”

이런 심부름꾼을 만들어 황제에게 전언(傳言)을 보내는 이는 누구인가?

누가. 왜.

그가 왜?

와락 등골이 서늘해졌다. 쥰은 역겨운 냄새도 잊고서 다급히 사내의 멱살을 낚아챘다. 충격을 분노와 구분할 수 없었다.

“말해요. 누가 시켰어요.”

“시…… 임…….”

“집어치우고 당장 말하라고요!”

그녀가 버럭 언성을 높였다. 그래 봐야 눈알이 도려져 나간 두 눈두덩은 쥰을 향하지 못했다.

“폐하…….”

“이봐요!”

고개를 억지로 붙잡아 고정해 본들 잘려 나가 짓무른 사내의 귀엔 그녀의 목소리가 닿지 않는 듯했다. 쥰의 손길에 맥없이 흔들리면서도 기어코 할 말을 마쳤다.

“그대의 황제 폐하께선……, 여전히 심장이…… 빠르게 뛰시는가…….”

“…….”

“빠르게…….”

전언의 완성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할 말을 마친 사내는 축 늘어져 침인지 물인지 모를 것을 줄줄 흘려 대기 시작했다. 쥰은 멍하니 사내에게서 손을 떼어 내고 뒤로 물러섰다. 잠시 후 물씬 가라앉은 목소리로 군의관에게 말했다.

“폐하께서…… 이자를 보셔야 합니다. 꼭 목숨을 붙여 두세요.”

“알겠습니다. 근위대장님.”

“부탁합니다.”

거듭 당부한 쥰이 다시 고개를 돌려 사내를 바라보았다. 허망한 눈빛을 금할 수 없었다.

그가 대체 왜?

지금껏 잊고 지냈던 이름이 심장을 쿵쿵 세게 울리고 있었다. 오늘에야 기억해 낸 것을 도리어 믿을 수 없었다. 어째서 그의 이름을 잊고 살았을까?

‘이레이 린.’

이날 쥰의 머릿속에 떠오른 수많은 의문은 그중에 어떤 것도 쉽게 납득 가지 않아 더욱 괴상하기만 했다.

*

“그대의 황제 폐하께선, 여전히 심장이 빠르게 뛰시는가?”

그 말이 누구의 입에서 빠져나와 대륙 최중심지인 미케나의 수도까지 흘러들어 왔는지는 자명했다.

“누구.”

남자가 느지막이 입을 뗐을 때, 남자의 시선은 이미 그보다 훨씬 전부터 포승줄에 묶인 다섯 명의 사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들이 손발이 묶인 데다 입에는 재갈까지 물려 있어서 대답하지 못한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다시 묻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내 얼굴을 그려 오라고, 누가.”

남자는 몇 년 새 머리가 꽤 자랐다. 과거엔 이마를 절반쯤 가리고 있던 앞머리도 말끔히 넘겨 버린 모습이 낯설었다.

덕분에 미간에 잡힌 작은 주름까지 훤히 들여다보였지만, 정작 그가 웃지도 찡그리지도 않으니 보인다고 한들 무용지물이었다. 남자의 얼굴에는 표정이랄 게 없었다. 아예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것이 부정할 수 없는 진실처럼 느껴졌다. 대관절 어떻게 반응해야 입에 물린 재갈이라도 풀어 주려나 가늠조차 안 된다.

사내들은 끙끙대며 서로의 눈치만 살폈다. 일순 남자가 흩트린 긴 날숨에 공간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저벅. 그가 계단을 밟아 내려온다.

붉은 융단이 깔린 계단 위로 더 붉은 망토 자락이 미끄러졌다. 묵직하게 흔들리는 벨벳의 꼭대기에는 꼭 핏물처럼 검붉은 머리카락이 그의 움직임에 따라 매끄럽게 흔들리고 있었다. 반면 단단한 목소리에는 흔들림이라곤 없었다.

“사실 누구든 상관없지.”

“…….”

“그게 황제든, 내 하나뿐인 친구든.”

눈꺼풀을 내리깔아 아래를 훑어보는 시선에도 흥미라고는 없다. 다만 정확하게 인간의 공포를 지배하는 손길로써 마주한 이들의 오금을 저리게 했다. 별안간 허리를 굽힌 남자가 예고 없이 사내 다섯 중 한 명의 턱 끝을 잡아챘다. 휙!

“하지만 누구의 목숨이 가장 질긴지는 꽤 중요한 문제다.”

“으, 으읍……!”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놈은 산 채로 고향에 돌려보내 주마.”

“으으으읍!”

턱을 붙들린 사내가 뒤늦게 몸부림치기 시작했지만 소용없었다. 뱀처럼 얼굴을 타고 올라온 손가락이 망설임 없이 눈두덩으로 직행했다.

“나도 심부름은 시켜야 하니까.”

푸욱……! 뼈와 살을 한데 짓뭉개는 소리가 축축하게 울려 퍼졌다.

*

오 년. 이레이가 제국을 떠난 지도 어느덧 오 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세월이다.

그사이 죽지도 병들지도 않은 나이 많은 대신 한 명이 오늘도 거칠게 국무회의장 탁상을 내리쳤다. 쾅!

“같잖은 야만국 놈들이 제 분수도 모른 채 활개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언제까지 그들을 두고 봐야만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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