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시트와 가여운 짐승들-67화 (66/104)

67화.

“읽어 보시죠.”

어쩐지 라피난의 목소리가 딱딱했다. 해시트는 의아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다가 이윽고 종이를 집어 들었다.

어느 용병과는 다르게 단정한 필체로 꾹꾹 눌러 쓴 문장들은 그녀가 기대하던 대로 베누스의 새로운 왕에 대해 아주 자세히 설명하고 있었다.

혈혈단신으로 야만족의 왕을 죽이고 새로운 지배자가 되었다는 젊은 남자, 그는 어느 날 홀연히 사람들 앞에 나타나서 한순간에 모두를 제 발밑에 조아리게 만들었다고 한다. 잔혹하게도 군림한다더라. 그에게 반발하는 자들은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목이 잘려 바닥을 뒹군다고…….

그래서 야만족의 새로운 왕을 목격한 이들은 하나같이 같은 증언을 남겼다.

“야만족의 왕은…….”

“아니. 그럴 리 없다.”

해시트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큰 소리로 되풀이해 외쳤다.

“절대 그럴 리 없어. 세력이니 권력이니, 그놈이 그런 귀찮은 일에 얽매일 리 없잖아!”

“폐하.”

곧장 그녀를 타이르는 라피난의 부름이 돌아왔다. 믿을 수 없게도 어린아이 달래듯이 자상한 말투에 해시트는 삽시간에 억지를 쓸 용의마저 잃어버렸다. 더 이상 어떤 이야기도 듣고 싶지 않다. 떨리는 눈으로 허공을 내려다보던 그녀가 이내 한 손으로 책상을 짚고 다른 손으로 허공을 휘저었다.

“혼자 있고 싶다.”

“…….”

해시트를 부축하려던 라피난의 손이 그대로 물러갔다. 이미 해시트의 어깨에 닿을 것처럼 다가와 있었지만, 차마 마지막 한 뼘을 옮기지 못하고 제자리로 돌아간다.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에 미처 숨기지 못한 섭섭함이 티끌처럼 톡 튀어나와 있었다. 이대로 두면 점점 커져서 다 들키고 말 것이다. 일순 라피난은 눈을 세게 깜빡여 티끌을 감췄다. 따가웠다.

그러나 벌써 들켰다는 건 그도 몰랐겠지. 라피난의 서운함을 발견하고 만 해시트는 끝내 그것을 알은체하지 못했다. 결국 스스로 방을 빠져나가야 했다.

“잠깐 산책 좀 다녀오마.”

“그러신다고 제 보고서가 바뀌진 않습니다.”

“알아.”

입바른 소리를 하는 라피난을 지나쳐 방문을 쾅 닫아 버렸다.

굳게 닫힌 문짝에 등을 기대고서야 참았던 숨을 토해 냈다. 손끝이 벌벌 떨렸다. 끝에서부터 타고 오른 혼란함은 금세 입술까지 옮았다. 평소처럼 집무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쥰이 갑작스런 해시트의 등장에 놀랐는지 퍼뜩 튀어 올랐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오늘따라 저를 부르는 모두가 성가셔서 견딜 수 없었다. 해시트가 팔을 휘저었다.

“괜찮으니까 잠깐 이대로 혼자……. 젠장…….”

“폐하?”

그러나 전혀 괜찮게 들리지 않는 목소리가 흘러나오길래, 그녀는 그저 따라오지 말라는 당부만을 거듭 남기고 홀로 걸음을 옮겼다.

*

다행히 기나긴 복도를 통과하는 동안 혼란하던 마음이 약간은 진정됐다. 개인 서재에 들어설 무렵엔 문지기 앞에서 평소와 비슷한 수준으로 표정 관리를 하는 데 성공했음이다.

서릿발이 풀풀 날리는 차가운 무표정이다. 덕분에 서재를 지키는 문지기 중 누구도 해시트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개인 서재에 들어선 그녀는 문을 단단히 걸어 잠갔다. 그런 뒤엔 언제나 그랬듯이, 책장에서 서책을 뽑아 드는 대신 한쪽 벽면에 붙은 책장을 끝까지 밀었다.

구우웅……! 나무와 나무가 마찰한 끝에 책장 너머의 벽이 열리며 숨겨진 공간이 드러났다. 그곳엔 일인용 책상, 그리고 쇠로 만든 작은 금고가 들어 있었다.

황제의 개인 공간이라기엔 턱없이 단출했다. 그리고 쓸쓸했다.

비밀 공간으로 들어서는 해시트의 발걸음은 제법 익숙했다. 그야 바닥에 깔린 카펫에 눌린 흔적만 보아도 그녀가 얼마나 이곳에 자주 들락거렸는지 명백했다.

이윽고 해시트는 아무도 없는 주변을 마지막으로 둘러보고는 금고의 문을 열었다. 자주 여닫은 금고가 제법 매끄러운 소음을 내며 내용물을 보여 주었다. 남들 눈을 피해 숨겨 둔 밀실에 창문 따위를 달았을 리 없다. 당연히 볕이 제대로 들지 않는 골방에는 계절에 상관없이 냉랭한 기운이 가득했다.

그렇게 빛도 없는 공간에서 작은 무언가가 붉은 빛으로 반짝거린다. 필경 햇빛 아래서 비춘다면 눈이 멀어 버릴 듯 황홀한 빛을 낼 보석이었다. 어두컴컴한 골방에서도 그토록 아름다운 보석을 내려다보는데도 왜인지 해시트의 얼굴은 삽시간에 절망으로 물들었다.

“어째서…….”

일그러진 눈자위로 덜컥 눈물이 차오른다. 별안간 그녀는 양 손바닥에 한껏 힘을 주어 보석을 움켜쥐었다. ‘그것’이 보석 따위가 아니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이건 그러니까, 옛날에 떠난 남자의 목덜미에서 떨어져 나온 작은 편린에 불과하다. 단지 그 남자의 한 조각. 그녀가 가진 유일한 흔적이었다. 그리고 증거였다. 그 남자가 환상이 아니었다는 증거를 보며, 해시트는 스스로 미치지 않았음을 증명했다.

방울진 눈물을 매단 채 그녀는 남자의 조각을 내려다보았다. 투정 같은 혼잣말이 멋대로 흘러나왔다.

“왜 계속 작아지는 거지…….”

툭, 붉은 표면 위로 눈물이 맺힌다. 이제 그것은 이 여자의 눈물을 두 방울도 담지 못할 만큼 조그마했다.

처음엔 손가락만 하던 것이 점점 작아지더니 어느덧 엄지손톱만 한 크기로 줄어들어 버렸다. 이러다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버린대도 이상하지 않으리라. 하루가 다르게 작아지는 아름다운 붉은색을 볼 때면, 해시트는 지나간 밤에 귀 기울였던 그의 목소리가 자꾸 어제 일처럼 떠올랐다.

“이건 네게 두고 가는 게 맞겠군.”

그녀가 이해한 것이 맞다면. 그렇다면.

마침내 그의 한 조각마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날에 어쩌면 이레이는 해시트를 완벽하게 잊을지도 모른다.

*

“한 달 정도 휴가를 다녀와도 되나?”

아침 식사 중이었다. 포크와 접시가 어긋나는 소음 사이로 해시트의 목소리가 힘없이 끼어들었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라피난은 조용히 시종들을 물리고 말했다.

“고작 한 달로는 베누스까지 못 다녀오십니다.”

거두절미 몇 단계를 건너뛴 대답이었다. 그는 해시트가 한숨지을 기회도 주지 않고 바로 덧붙였다.

“더구나 혼자서는 더더욱 못 보내 드립니다. 위험하니까요. 며칠째 식사도 제대로 안 하신 몸으로 퍽이나 석 달 열흘 강행군을 버티시겠습니다. 명심하십시오. 만에 하나 폐하께서 잘못되신다면, 저는 이 나라가 혼란에 빠지는 꼴을 보기 전에 자결할 겁니다.”

“…….”

농담하지 말라고 타박할 기력도 없었다. 라피난은 어느 때보다 진심으로 말하는 중이었다. 해시트도 라피난도 서로의 속을 들여다보는 데 아주 도가 튼 사이인지라, 라피난은 마뜩잖은 그녀의 표정에 개의치 않고 천천히 식사를 재개했다. 그리고 미리 준비해 둔 대안을 술술 늘어놓았다.

“그렇다고 쥰 경을 보내자니 이레이에게 포섭당할까 걱정이고요. 쥰 경이 그를 좋아한 거야 모두가 아는 공공연한 비밀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제가 다녀오겠다고 말씀드리고 싶지만, 그건 폐하께서 극렬하게 싫어하시겠죠. 결국 방법은 하나뿐이로군요.”

아무래도 그는 해시트가 이렇게 나올 줄 알고 일찍이 궁리를 끝마쳐 둔 듯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 정도로 청산유수일 수가 없었다.

“정찰대를 보낼까요.”

“정찰대?”

해시트의 눈이 가늘어졌다. 라피난은 계속 태연했다.

“폐하께서도 아시겠지만, 지금까지 야만국과는 공식적으로 그 어떤 교류도 없었습니다.”

“그건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거야.”

이번엔 해시트가 먼저 단호히 못 박았다. 죄인들의 나라와 친목해 봤자 제국 백성들에게 불안감을 심어 줄 뿐 전혀 이득이 없었다. 기껏해야 바닷물고기 몇 마리나 더 얻게 될까. 그럴 바에야 바닷물고기를 포기하고 민물고기 양식을 발달시키는 게 확실한 이득일 터다.

라피난은 냉정한 해시트의 판단에 안심한 것 같았다. 바로 목소리를 한 꺼풀 누그러뜨려 마저 설명을 계속했다.

“그럼 됐군요. 베누스 국경과 가까운 우리 미케나의 ‘제리 해변’에서 해상 정찰대를 출발시키겠습니다. 파도에 떠밀려 온 베누스의 조각배를 돌려주겠노라 핑곗김에 찾아가면 됩니다. 그리고 돌아오는 척, 몇 명만 몰래 잠입해서 한동안 그곳에 머무르라고 이르지요. 베누스는 작은 도시 크기의 해상국가이니 운이 좋으면 며칠 안에 국왕의 얼굴을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럴싸한 계획이다. 하지만 라피난 카일이 세운 계획이 겨우 그 정도에 그칠 리는 없었다. 그는 해시트가 원하는 것을 정확하게 아는 남자다.

“정찰대원 중에 예인을 포함해 두었습니다. 그의 초상화를 그려 오라 명하겠습니다.”

“…….”

“물론 폐하께서 허락하신다면 말입니다.”

마지막 공만은 해시트에게 돌리는 수법이 어디서 많이 본 듯 익숙했다. 해시트가 쓰는 정치적 화법은 모두 라피난에게 배운 것이니 불가피한 결과였다.

해시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그녀는 라피난이 내민 공을 흔쾌히 받아 들기만 하면 됐다. 그러나 아무래도 석연찮은 부분이 있어서, 못내 찌푸린 얼굴을 펴지 못한 채 지적하고 말았다.

“그건 정찰대가 아니라 밀정이잖아.”

“그런 게 문제가 됩니까?”

라피난은 희미하게 미소 지을 뿐이었다. 즐거움과는 거리가 먼 차가운 조소였다.

그러나 해시트를 비웃기 위한 목적은 아니었다. 저 웃음은 저 자신을 향한 것이다. 해시트를 설득하기 위해서 기어코 이런 짓까지 벌여야 하는 스스로의 처지가 황당하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불쾌함 없이 기꺼운 자신이 가장 어처구니없다는 것이다.

“폐하께서 궁금하신 건 오직 그 나라의 왕이 어떻게 생겼는지, 그뿐일 텐데요.”

저는 굳이 안 봐도 알 것 같지만 말입니다. 그가 작게 사족을 달았다. 해시트는 이번에야말로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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