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시트와 가여운 짐승들-66화 (65/104)

66화.

“예, 폐하. 시종장에게 바로 전달하겠습니다.”

하지만 시종이 공손히 고개를 조아렸을 때, 해시트는 단 몇 초조차 되지 않는 짧은 사이에 갑자기 마음이 바뀌어서 방금 했던 말을 번복해야 했다.

“아니. 아니다. 그냥 두어라.”

“예?”

“그냥 두란 말이다.”

해시트가 질끈 눈을 감았다.

“아무것도 건드리지 말고 가만히 내버려 둬. 알겠느냐?”

“아, 알겠습니다……. 폐하.”

당황한 시종이 말끝을 흐렸다. 황제가 이런 식으로 아랫사람에게 변덕을 부리는 일은 흔치 않았다. 해시트는 못 본 척하고 앞으로 나아갈 뿐이었다. 그러나 몇 발자국 걷다 말고 자리에 멈춰 서 주먹을 움켜쥐었다가, 그마저도 누가 볼까 느슨하게 힘을 빼고 말았다.

하기야 누군가 본들, 장장 석 달 동안 이별하게 된 남편을 그리워하는가 보다고 여기겠지만.

지금 해시트의 머릿속을 차지한 누군가가 누구인지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할 터였다. 그것이 어느 날 갑자기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 버린 어느 빨간 머리 용병이라는 사실은 더더욱.

물론 해시트의 머릿속 사정이야 어찌 됐든 당장 할 일이 차고 넘쳤다. 화친단 행렬을 공국으로 보냈으니 공국에서 보낸 화친단 또한 도착할 테고, 황제에겐 그들을 융숭히 대접할 의무가 있다. 해시트가 석 달 동안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낸 것은 지극히 당연했다.

*

석 달 뒤, 드디어 공국으로 출발했던 화친단이 돌아오는 날이었다.

해시트는 그간 꼬박꼬박 작성해 두었던 총 구십 일짜리 하루 일과표를 당당하게 라피난 앞으로 내밀었다.

“옛다. 귀국 선물이다.”

왜인지 라피난은 잠시 제자리에 굳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성은이 망극하다 엎드려도 모자랄 판에 한참이나 머뭇거리더니, 느지막이 뗀 첫마디가 기가 막혔다.

“전 선물 안 사 왔는데요.”

“……내가 너한테 진짜 선물 받겠다고 이런 귀찮은 짓을 했겠나?”

“그럼 왜…….”

흠칫, 눈살을 찌푸린 그가 바로 태도를 바꿨다.

“혹시 저 없는 사이에 제 서고라도 태우셨습니까.”

“됐다. 말을 말자.”

지은 죄가 없다면 그녀가 알아서 잘할 리 없다는 소리였다. 해시트의 표정이 확 찌그러졌다. 실제로 찔리는 게 있어서는 맞지만, 그걸 지적당하니 더 짜증 난다. 그러나 꼬투리를 잡았다간 도리어 역공격을 당할 게 뻔해서 그녀는 괜한 핀잔으로 화제를 돌렸다.

“정말 선물 없나? 시종들 말로는 네가 내 선물 준비한답시고 뭘 잔뜩 챙겨 갔다던데.”

알테 공국에서 들려 보낸 막대한 공물을 각 부서에 분배하고 라피난과 함께 황제궁으로 걸어가는 중이었다. 뒤따르는 수행원들을 곁눈질하며 해시트가 건넨 질문에 라피난은 대수롭지 않게 받아쳤다.

“그렇게까지 잔뜩은 아니었습니다만.”

“뭐야, 가져가긴 했다는 거네?”

“예, 가지고 오지는 못했고요. 시간이 더 필요하다더군요. 공국에도 그만한 실력자는 찾기 어렵다고 하길래 느긋이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흠……, 그래. 알겠다.”

그녀는 더 캐묻지 않고 수긍했다. 이번엔 라피난이 그녀에게 새삼스러운 시선을 보냈다.

“무슨 선물인지 안 물어보십니까?”

“응. 딱히?”

“그럼 왜 물어보셨습니까.”

“어차피 이 몸의 선물이라며. 때가 되면 알겠지.”

“…….”

잠시 그녀에게 고정되어 있던 라피난의 시선이 곧 무감해져 다시 앞을 향했다.

두 사람은 말이 없어졌다. 석 달이나 떨어져 있었으니 할 말이 웬만큼 쌓였을진대, 비록 그것이 사랑의 밀어는 아닐지라도 말이다, 라피난도 해시트도 묵묵히 앞을 바라보며 더딘 걸음만 옮겼다.

해시트는 상념에 잠기느라 걸음이 느려졌고, 라피난은 자연스레 그녀의 보폭에 맞춰 준 바이다.

해시트는 생각한다. 바보가 아닌 이상 라피난이 그녀에게 선물하려는 물건이 무엇인지 모를 리 없다고. 그러다 흘긋 그의 눈치를 보는 것이다. 대체 ‘그것’으로 무엇을 만들어 주려는지 도통 짐작이 안 갔다. 그것이 무엇으로 둔갑한들 해시트가 기뻐할 리 없다는 걸 라피난이 모를 리도 없으니 말이다.

그때도 라피난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결국 해시트가 먼저 침묵을 깼다.

“라피난.”

“예.”

하지만 하려던 질문이 떨어지지 않는다. 해시트는 또다시 외면해 버리기로 했다. 쫓아오는 두려움 없이도 도망칠 핑계가 너무 많다.

“너 혹시 알테 공국에서 쥰을 구박한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요. 매일 훈련장 백 바퀴씩만 돌렸습니다.”

라피난은 찔리는 기색 하나 없이 당당했다. 아연함에 질리는 쪽은 늘 그렇듯 해시트뿐이었다.

“돌았군. 남의 나라 훈련장까지 빌려서 애를 기합 줬다고?”

“폐하의 호위를 뒤로하고 사절단에 따라나선 자를 그럼 제가 예뻐해 주었을 거라 생각하셨습니까?”

“보낸 건 나고 쥰은 내 명령을 따랐을 뿐인데 뭐가 문제지?”

“제가 문제인가 보죠.”

“너 요새 좀 비뚤어진 것 같다?”

“어디 한 번 바르게 고쳐 보시든지요.”

그리고 앞서가는 두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는 꿈에도 모른 채, 뒤따라가는 수행원들은 그저 흐뭇한 미소만 만면에 띨 따름이었다.

“저렇게 사이가 좋으시니 곧 후사 소식이 있겠지요.”

“아무렴요.”

제국력 563년, 여름. 금술 좋기로 소문이 자자한 황제와 그녀의 남편 슬하에는 그러나 아직도 자식이 없었다.

*

삼 년이 지났다.

해시트는 집무실에 앉아 라피난이 가져온 상소를 훑어보고 있었다.

“허. ‘가을만 되면 가로수에서 떨어진 열매의 썩는 냄새가 고약하니 부디 공원의 가로수를 수놈으로 바꿔 심어 주십시오.’ 라피난, 나무에도 암수가 있나?”

“있지만 열매가 맺히기 전까진 수놈인지 암놈인지 알 수 없죠.”

“짐더러 초능력을 발휘해 달라 이거군. 이런 문제야말로 신전 놈들한테 가져가서 어디 한번 해내 보라고 던져 줘야 하는데 말이야.”

해시트가 헛웃음 쳤다. 요즘 같은 태평성대엔 상소라고 해 봤자 대부분이 이런 식이다.

물론 황제의 후사를 염려하는 이들도 많았다. 그 문제 또한 예전 같았으면 황비가 헬렌밀 신전으로 찾아가 축복을 받아 와야 한다느니, 또 매일매일 성수로 몸을 씻고 백 일 동안 기도를 올려야 한다느니, 과학적 근거라고는 쥐뿔도 없는 미신이 줄글로 판쳤겠으나 애석하게도 최근 미케나 신전은 황명으로 선포한 ‘부패 신관 척결 조사’로 완전히 혼돈 상태다. 감히 숟가락을 얹을 용기는커녕 정신머리가 있을 리 만무했다.

무엇보다 이번 대에 후계를 잉태할 이는 황비가 아닌 황제, 해시트였으므로 다들 허튼소리를 했다가 목이 날아갈까 몸을 사리는 중이었다. 덕분에 재상실로 전해지는 민원의 대부분은 황실 후사보다 훨씬 더 그럴싸한 내용이 주를 이뤘다.

라피난이 말했다.

“다음은…… 국방과 관련된 안건인데요.”

“뭔데 그렇게 눈치를 보지?”

“벌써 삼 년이 넘게 전쟁다운 전쟁이 벌어지지 않아 일부 군인들이 고충을 토로한다고요. 좀이 쑤신다네요. 있지도 않은 부패 신관 조사는 접어 두고 다시 이교도 척결에 힘쓰자는 의견입니다.”

마침 책상 위에 빈 종이가 차고 넘쳤다. 빙그레 웃은 해시트가 즉석에서 만든 서류에 서명을 휘갈겨 라피난에게 내밀었다.

“결재했으니까 너 알아서 진행해라.”

“뭐라고 적으셨습니까?”

“거기 나온 ‘일부 군인’들 색출해서 농가로 자원봉사 보내라고. 추수 끝날 때까지 못 돌아오게 하고, 가기 싫다고 징징대는 놈 있으면 불명예 제대시켜.”

불명예 제대면 연금도 자동 박탈이다. 라피난은 눈썹을 으쓱 들었다 놓으며 서류를 받아 들었다. 적잖은 국고를 아낄 수 있을 때 그는 절대 만류하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부패 신관 명부는 다 만들어 가나? 시킨 지 꽤 된 것 같은데.”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합니다. 요즘 항간에 이상한 소문이 돌아서 그것부터 확인해 보려 합니다.”

“소문?”

“최근 야만국의 왕이 바뀌었다고 하네요.”

이거야말로 국가 방위에 한결 어울리는 안건이었다. 해시트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라피난은 거침없이 설명을 이어 갔다.

“새 국왕의 성미가 매우 공격적이라는 증언이 있는 데다가 해적질의 규모 또한 종전과 비교할 수 없게 커졌다는군요. 대부분 저잣거리 이야기이긴 합니다만……. 그래도 유비무환이니까요. 조사 결과가 사실로 밝혀진다면 새 왕의 출신 국가를 알아보겠습니다.”

“하긴. 베누스는 왕조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니.”

해시트가 납득했다는 듯 곰곰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베누스는 악행을 저지른 죄인들이 몰려 살며 그들 중 가장 강한 자를 왕으로 추대하는 야만국이었다. 세상에서 버려졌거나 스스로 세상을 등진 이들이 흘러 들어가는 감옥이자 도피처다. 대부분 그 안에서 서로를 물어뜯으면서 해적질과 어업에 종사했다.

당연히 제국의 관심을 끌 만한 규모는 결코 못 되었으나, 정말로 베누스의 왕이 바뀌었다면 라피난의 말마따나 한 번은 확인하고 넘어갈 문제였다.

“다른 나라에서 침략해 놓고 위장했을 수도 있습니다.”

“충분히 가능성 있지.”

그 기원이 이러니저러니 해도 어쨌든 광활한 바다로 둘러싸인 해상국가였다. 사막이 전체의 절반을 차지하는 대륙 특성상 바다 자원에 대한 욕망은 늘 존재해 왔다.

자본과 인력이 있다면 바다로 수로를 내는 것도 가능했으므로, 일찍이 미케나에서도 수백여 년에 걸쳐 ‘제리 해변’을 포함한 해안가 영토를 확보해 둔 바 있었다.

“자세히 알아보고 보고서 올리도록.”

“예.”

라피난이 허리를 숙였다. 물론 그라면 해시트의 당부가 없었어도 어련히 자세하다 못해 집요하게 야만국의 새 왕을 조사해 올 터다.

그리하여 베누스의 새로운 국왕에 대한 보고서가 해시트의 책상 위로 올라온 것은 그로부터 약 삼 주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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