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4. 역린과 편린
연모하였다. 해시트는 가만히 그 말을 곱씹었다. 어느덧 그녀도 여러 감정을 배우고 삼켜 본지라, 그 말을 영원히 사랑한다는 고백쯤으로 오해하는 실수를 저지르진 않았다. 연모하였다. 그건 과거형이었으니까.
연모하였다. 그래서 절절한 고백보다는 차라리, 앞으로 두 번 다시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다짐에 가까울 것이다. 연모하였다. 그렇지만 역시 태어나서 처음 듣는 말이라서. 연모하였다. 결국 또 하나의 처음을 그에게 내주고 만 셈이다.
다행히 이 순간은 곧 과거가 될 터였다. 아니, 이미 과거가 되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지나간 일이 되었다고 해서 있었던 일이 없어지지는 않았다.
“연모하였다.”
그러니 그 찰나를 액자의 한 귀퉁이에 담아 아무도 모르는 곳에 걸어 두어도 괜찮았다. 그녀가 입 밖으로 내지만 않으면, 평생 잊어버리지 못한다고 한들 주제넘게 참견할 이는 없을 테니까.
이레이는 떠났다.
해시트는 침대에 걸터앉아 한참이나 그가 떠난 창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갑자기 저 먼 하늘로 이유 모를 구름이 몰려드는가 싶더니 언뜻 거대한 날개 모양의 그림자가 비쳤다. 저것이 날개라는 사실을 미리 짐작하지 못한 이들에겐 그저 먹구름의 그림자로 보였을 터다.
밤보다 검은 그림자가 날갯짓을 하며 멀리 날아간다. 얼마 못 가 영영 보이지 않는다.
갔구나.
남자가 영원히 떠나 버렸음을 두 눈으로 확인한 뒤에야 그녀는 비로소 입술을 깨물었다. 천천히 어깨를 옹송그린다. 둥그렇게 말린 등허리가 맥없이 들썩였다.
해시트가 힘껏 주먹을 움켜쥐어 입술을 틀어막았다. 그녀는 어느새 울고 있었다. 입술을 거칠게 깨물고도 자꾸만 울음소리가 새어 나가서 주먹으로 한 번 더 막은 채다.
손에 쥔 붉은 덩어리를 내려놓는다면 차라리 편할 텐데, 뚝뚝 흐르는 피비린내에 숨이 턱턱 막히는데도 도무지 그것만은 손에서 떼어 내지 못했다. 어떻게 울어야 하는지 우는 방법을 잊어버린 사람처럼 울었다.
그럴 만하다. 지금껏 해시트가 소리 내어 운 것은 남자의 품 안에서가 전부였으므로. 오직 그의 차가운 체온에 갇혀 있을 때만 안심하고 눈물을 흘렸다. 그래서 지금은 입술을 꾹 가로 닫고 연신 눈물을 훔쳐 냈다. 움켜쥔 주먹 안으로 더운 물기가 스며들었다.
툭. 남자가 두고 간 역린에 소금기 어린 물방울이 맺힌다. 그리고 밤새도록 쉬지 않고 반복됐다.
*
하루가 지났다.
라피난은 퉁퉁 부은 해시트의 눈을 보고도 전혀 놀란 기색이 없었다. 심지어 미리 준비해 온 얼음주머니를 꺼내더니 해시트의 양쪽 눈에 하나씩 얹어 주며 말했다.
“평소라면 이런 것까지는 신경 안 쓰겠지만, 공교롭게도 혼례식 날이군요.”
뜨겁게 짓무른 눈가에 서늘한 냉기가 닿자 저절로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해시트는 아직 떨리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네가 그런 걸 공교로워할 줄은 몰랐구나.”
“폐하께서는 벌써 네 번째 겪으시겠지만 전 처음이라서요.”
“무슨 말이냐. 이 몸도 식장까지 걸어 들어가는 건 처음이야.”
“예. 그럼 공평하다 여기지요.”
여상하게 건네는 농담에 결국 그녀도 피식 웃고 말았다. 입술 끝을 끌어 올린 채 잠시 버틴 그녀가 이윽고 질문했다.
“이레이가 떠난 걸 어떻게 알았나?”
아마 지난밤 마른하늘에 몰아치던 천둥과 번개를 보고 알았겠지만, 이번에 묻고 다시는 묻지 않을 결심으로 한번 꺼내 보았다. 라피난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즉답했다.
“짐 정리는 잘해 놓고 갔더군요. 숙소가 깨끗해서 알았습니다.”
“그렇군.”
거짓말.
그녀를 완전히 바보 취급 하는 핑계를 듣고도 해시트는 그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야 가장 아끼는 신하가 굳이 사실을 말하고 싶지 않다고 하니까. 거짓말쟁이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그녀에게 진실을 숨겨 주고 싶다고 하니까. 그렇게 해시트가 걱정된다고 하니까.
그래서 해시트는 다시는 라피난에게 너 사실은 인간이고, 진짜 드래곤은 떠난 그 남자가 맞지 않느냐 묻지 않기로 했다.
*
일 년이 지났다.
올해 알테 공국과의 화친 행사에는 라피난을 차출하기로 했다. 알테 공국에선 대공의 자식 중 하나를 보낸다는데 미케나의 황제와 그의 남편 슬하에는 후사는커녕 조카도 마땅치 않았기 때문이다.
겸사겸사 무역 협상을 새로 할 시기였으니 카일 재상만 한 적임자는 없었다. 일 년 전, 알테 공국에 가뭄이 들었을 당시 넉넉히 원조해 준 대가를 이제는 돌려받을 때였다.
라피난은 알테 공국에 개인적으로 부탁할 업무가 있다며 작은 상자를 하나 챙기기도 했다. 해시트는 그 안에 뭐가 들었는지 굳이 묻지 않았으나, 시종들이 쑥덕거리는 말을 들어 보면 ‘재상님이 황제 폐하를 위해 이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목걸이를 준비 중이다.’라며 설레발이 아주 요란했다.
라피난에게 그따위 낭만이 존재할 리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해시트는 그저 떨떠름하게 입맛을 다실 따름이었다. 그래 놓고 막상 화친단 행렬이 출발하는 당일엔 모처럼 빵긋 웃는 낯으로 그를 배웅했다.
“오가는 여정이 왕복 서른 날에 숙박이 육십 일이니 최소 석 달 동안은 네 잔소리가 그립겠구나. 짐은 밥 잘 먹고, 잠 잘 자고, 차는 적게 마시며 운동도 가끔 하고, 아무쪼록 평안하게 지낼 테니 부디 몸 건강히 잘 다녀오려무나. 한데 옆에서 닦달하는 사람이 없으니 과연 어떻게 될지는 나도 장담하지 못하겠구나.”
말인즉슨 간만에 농땡이 피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렷다. 해시트가 대놓고 근무 태만을 예고하는데도 라피난은 당황하지 않고, 도리어 그녀가 이렇게 나올 줄 알았다는 듯이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쥰에게 폐하의 하루 일과표를 전달해 두었습니다. 삼십 분 단위로 석 달분입니다. 매일 다른 내용이 적혀 있고, 일과대로 흘러갔는지 쥰의 의견을 적도록 명령해 두었으니 석 달 뒤에 돌아와서 확인해 보면 되겠군요.”
해시트의 얼굴이 단숨에 이지러졌다.
“뭐? 네가 뭔데 이 몸의 근위대장에게 그런 일을 시키지?”
“뭐냐고 물으신다면……, 제가 폐하의 남편이라는 걸 잠시 잊으셨나 봅니다.”
“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쥰이 그 말에 따를 것 같아?”
“따를 겁니다. 거짓으로 기록하면 자결하기로 저와 약속했거든요.”
“자결……? 그건 약속한 게 아니고 약속당한 거 같은데……?”
“아무튼 쥰의 양심에 맡기고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잠깐, 라피난!”
궁지에 몰린 해시트가 황급히 쥰의 팔뚝을 잡아끌었다.
“쥰. 짐이 생각해 보니 아끼는 남편을 먼 타국으로 보내는데 역시 황제 근위대장 정도는 경호원으로 붙여 줘야…….”
“예! 다녀오겠습니다, 폐하!”
쥰은 차라리 화친단에 포함되어 버리면 지옥의 하루 일과표 작성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듯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꾸벅 허리를 숙이더니 바로 행렬을 뒤따라간 것을 보면 말이다.
전속력으로 달려가는 쥰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해시트가 문득 혀를 찼다. 허.
“저걸 칭찬해 줘야 해, 잘라 버려야 해?”
어쨌든 쥰이 줄행랑친 덕분에 때아닌 휴가를 맞이했다. 그러나 말이 휴가일 뿐, 그녀는 화친단 행렬을 배웅하자마자 곧장 집무실로 직행했다. 잔소리하는 사람이 없다고 마냥 멀뚱거리기엔 책상에 쌓인 서류의 높이가 곧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던 것이다.
세 시간쯤 엉덩이도 못 떼고 정무를 본 끝에야 그녀는 잠깐 종이와 펜을 내려놓고 기지개를 켰다.
“좀 심심하군.”
라피난은 물론이거니와 평소 그림자처럼 해시트의 곁을 지키던 쥰까지 자리를 비웠으니 적적한 마음은 별수 없었다. 쥰은 괜히 보내 버렸나. 이대로라면 어차피 농땡이의 농 자도 못 보게 생겼는데…….
해시트의 눈이 멍하니 흐려졌다. 별안간 반짝, 눈동자에 금빛 이채를 되돌린 그녀가 예고 없이 몸을 일으킨다.
“폐하. 볕이 따가우니 차양을 준비시키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됐다. 아무도 따라오지 말아라.”
시종들이 서둘러 따라나선들 황제가 단칼에 물려 버리니 버틸 재간이 없었다.
홀로 걸음을 옮기는 뒷모습은 으레 그렇듯 산책에 나서는 듯했다. 하지만 평소와는 다르게 황제궁 후원이 아닌 구석진 골목으로 빠졌다. 짐짓 단정하던 그녀의 걸음걸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성급해졌다.
마침내 해시트가 도착한 곳에는 이름 모를 들꽃들이 소담히 피어 있었다.
정돈되지 않은 아름다운 공간, 정원이라고 이름 붙이기에도 민망하다. 한때 성벽이 있던 자리를 허문 흔적조차 이제는 세월에 휩쓸려 자세히 보아야 겨우 알아볼 수 있었다.
말없이 무너진 돌담을 어루만지던 해시트가 들릴락 말락 중얼거렸다.
“좀 심심해서.”
정말로 무료했던 탓이다. 평소처럼 잔소리하는 누군가가 옆에 있었다면 이런 곳에 와 볼 생각은 꿈에도 안 했을 거다. 별수 없이 라피난의 눈치가 보였다는 고백을 삼키면서 그녀는 씁쓸한 미소를 흘려보냈다.
아무렇게나 걸터앉아 문득 올려다본 하늘이 쾌청했다.
이 짙푸른 빛깔이 어디까지 이어질는지, 기왕이면 대륙을 한 바퀴 다 돌고 또 해협 너머 야만족의 국가를 거쳐서, 이 세상의 끝 어딘가에 존재할 붉은 가시덩굴 섬까지 맑다면 좋겠다. 그 날의 날씨로 누군가의 기분을 점치는 습관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돌아가야겠군.”
꾸욱, 해시트가 무릎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겨우 오 분도 채 앉아 있기 전이었지만 추억을 곱씹기엔 충분했다. 과히 넘쳤다. 더 미적거리는 건 핑계다.
“그땐 그냥……, 그땐 내가 조금 쓸쓸했어.”
“지금은 내가 있어서 쓸쓸하지 않은 거겠지.”
무엇보다 굳이 쓸쓸함에 대해 추억할 필요는 없었다.
누가 쓸쓸하다고? 오늘 해시트는 아주 잠깐 심심했을 뿐이다. 하필 라피난과 쥰을 멀리 출장 보내 버렸더니. 이윽고 도망치듯 자리에서 벗어난 그녀가 우연히 마주친 시종에게 다짜고짜 고했다.
“옛 성벽이 있던 자리에 잡초가 보기 흉하더구나. 돌담 하나 남기지 말고 깨끗하게 치우라 전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