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시트와 가여운 짐승들-64화 (63/104)

64화.

이레이를 살리기 위한 해시트의 노력은 실로 눈물겨웠다. 그 꼿꼿하신 황태자가 부패한 신관을 찾아가 가짜 예언을 부탁하기까지 했다. 감옥에 갇힌 뒤로도 야금야금 바깥 구경을 하고 다니던 이레이는 제 눈으로 해시트의 행보를 직접 확인하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였다. 처형 전날 밤, 파리한 낯으로 면회 온 그녀의 속을 일부러 박박 긁어 본 것은.

“너는 참 이상해. 항상 말과 행동이 다르단 말이지.”

“닥쳐. 그 입, 한 번만 더 나불거리면 지금 당장 죽여 버릴 거야.”

“그러니까, 그렇게 틈만 나면 죽이네 마네, 목을 자르겠다느니 사지를 찢겠다느니, 사람 목숨을 개미보다 못하게 취급하면서. 막상 내가 죽게 생겼다니까 절망하고 있어.”

“…….”

“아니면 그러는 척하는 건가?”

그야 그러는 척이 맞겠지. 해시트는 위악을 떠는 인간이었다. 인간의 속내를 꿰뚫어 보는 일 정도는 이레이에겐 돌판에 새긴 글자를 읽는 것보다 더 쉬웠다. 그런데도 그녀의 입으로 인정하는 모습이 보고 싶어서 굳이 추궁할 따름이었다. 그리고 이유를 알고 싶었다.

“정적을 제거하는 일에 혹시 무고한 전쟁포로가 휘말릴까 봐 전전긍긍하고, 출신도 불분명한 천것이 고귀하신 황제 폐하에게 죽임을 당하게 생겼기로서니 가만히 내버려 두지를 못하잖아. 심지어 네 신념마저 꺾어 가면서 신관에게 뇌물까지 주었군. 왜지? 해스. 그냥 받아들일 수도 있잖아. 나는 네 백성도 아닌데.”

말해. 왜 나를 살리고 싶은지. 그의 질문은 유치한 궁금증에 닿아 있었다.

해시트는 대답하는 시늉도 안 했다. 단지 비좁은 창살 틈으로 날카로운 단검 한 자루를 내던졌다

“끔찍한 고통 속에서 사지가 부러져 죽는 게 싫다면 그걸로 자결하든지, 아니면 탈옥하든지. 웬만하면 탈옥해라. 알겠나?”

그 말에 잠시 머릿속이 새하얘졌다가 천천히 암전했다. 도대체 그 기분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아버지가 살아 있었다면 이건 뭐냐고 따져 묻기라도 해 봤을 텐데, 죽은 지 몇백 년이나 된 양반의 무덤을 이제 와 파헤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진짜로 죽었다 깨 보면 알까 싶어서 꾹 숨을 참고 있었다. 탑층 감옥을 벗어나는 해시트의 발소리가 까마득히 멀어진 다음에야 푹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모르겠다. 확실한 건 탈옥하긴 글러 먹었다는 사실뿐.

대수로울 것 없다. 또 한 번의 변덕이 지나갈 뿐이었다. 이번엔 자의가 아닌 타의로써…….

후회하지 않았느냐면, 솔직히 말해 자루 속에서 흠씬 두들겨 맞던 몇 시간 동안은 조금 후회한 게 사실이다. 그러나 뒤따른 보상이 훌륭해서 금방 잊어버렸다.

“이레……!”

“그래. 뒤돌아라.”

형 집행이 끝나기 무섭게 쌩하니 달려온 해시트의 얼굴은 표정 관리가 하나도 안 되어서 평소보다 배로 재미있었다. 조금 놀려 주자 여지없이 씩씩거리며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다.

“내가 유신론자였다면 네가 지옥에 떨어지길 매일 기도했을 거야. 이 망할 자식아.”

“그래? 참고로 그 망할 자식 이제 옷 다 갈아입어서 얼굴 구경해도 되는데.”

이레이는 더 이상 해시트의 위악에 개의치 않았다. 모르는 체 빙긋 웃어 주면, 못내 눈치를 보다가 다가오는 그녀를 알게 된 이후로.

*

언제부터인가 라피난은 이레이의 정체를 의심하는 듯했다. 이레이는 그러든 말든 내버려 두는 쪽을 택했다.

설령 그가 인간이 아님을 안다고 해도 밝힐 수는 없을 테지. 애당초 라피난부터가 해시트에게 말 못 할 비밀을 품은 채였으니 말이다. 이레이는 해시트와 라피난 사이에 어쩌면 존재했을지도 모르는, 그러나 결국 벌어지지 않은 모호한 가능성을 되뇌며 옅은 실소를 터뜨리곤 했다.

그래도 가끔 심기에 거슬리는 것까진 어쩔 수 없었다.

특히나 이레이가 지켜보는 앞에서 그 둘만 아는 이야기를 마구 떠들 때면, 이레이는 나잇값도 못 하고 돌발 행동을 저지르기 일쑤였다.

가령 홀몸으로 반란군에 쳐들어가 하룻밤 새 제압해 버린다든가. 알테 공국에선 계절에도 안 맞는 비바람과 천둥 번개를 우르릉 쾅 쏟아 내서 해시트를 겁먹게 만들기도 했다. 평소엔 무모할 정도로 겁대가리 없으면서 천둥과 번개만큼은 병적으로 두려워하다니 역시 신께 노여움을 산 인간다웠다.

그 외 자잘한 돌발 행동으로는 자는 사람 멱살 잡고 끌고 나와 밤 산책을 권했다가 선황의 밀회 장면을 보여 주기. 우는 얼굴을 보고 싶다는 둥 괜한 객기를 부렸다가 한 번 뱉은 말을 주워 담기 등이 있었다. 바보 같은 짓이었다.

물론 성인식에서 쓸 성물을 받으려 헬렌밀 신전으로 향했을 때와 비교하면 앞엣것들은 귀여운 수준에 그쳤다. 화살이 비처럼 쏟아지는 한복판에서 억지를 부려 해시트와 단둘이 딴 길로 빠져 놓고도 자꾸만 못된 말이 나왔었다. 오죽했으면 해시트가 먼저 물어보았을까.

“왜 일부러 못되게 굴지?”

그거야 그녀가 다리가 부러진 걸 숨겼기 때문이다. 눈물이 찔끔 나도록 아플 텐데, 그러고도 이 자리엔 있지도 않은 라피난의 눈치를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게 야속하다 느꼈던가?

그러고 보면 이레이는 해시트와 라피난이 같은 인간임에 시기했는지도 모른다. 둘 다 고작 화살 따위에 목숨의 위협을 느끼는 연약한 몸뚱이를 가졌음에. 그런 약해 빠진 몸뚱이로도 대의를 쫓겠다며 쉽게 목숨을 거는 꼬라지가 영 아니꼬워서.

그래서.

이러다 어느 날 정말로 죽어 버릴까 봐 걱정이 됐나…….

“이봐, 해스.”

설마 이 약해 빠진 여자애 하나를 못 지킬까 봐, 두려워졌나.

“너는 나와 제위,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무엇을 선택하겠나?”

그날, 함초롬하던 해시트의 눈동자로 쏟아진 밤하늘의 별빛은 마치 유성우처럼 요란하게 빛났다. 소원이라도 빌어야 할 것 같은 기분에 휩싸여 천천히 눈을 껌뻑였을 때 해시트가 대답했다.

“백성.”

그래, 좋다. 이레이는 흔쾌히 인정하려 했다. 어차피 내가 이 나라의 백성이 되면 그만이 아니냐. 하지만 그의 태생이 어디에도 뿌리내릴 수 없는 종족이었기에 그는 끝내 섧게 웃고 말았다.

“결국 나는 너에게 백성도 아니로군.”

그래도 죽게 두진 말아야지. 계속 계속 살게 해야지. 가능한 한 오랫동안.

어느덧 이레이는 해시트가 살아서 원하는 바를 이루길 간절히 염원하고 있었다. 어쩌면 단지 목숨만을 부지한대도 괜찮을 것 같았다. 죽지 않고 살아만 준다면. 부디 당신과는 죽음으로 영영 이별하는 일 없기를 바랐다. 해시트의 눈에 비친 별빛에나 대고 빌 수 있는 허황한 소원이었다.

*

몇 번이나 더 죽을 고비를 넘긴 끝에 해시트는 그녀의 아버지를 죽이는 데 성공했다. 본디 섬약한 심성으로 태어난 업을 극복하고, 마침내 원하던 바를 이뤘다.

소복이 쌓인 눈밭에 피 묻은 손을 씻을 적에 그녀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그러나 어떤 미소보다 아름다운 허망(虛妄)이었다. 새빨간 핏물이 흰 눈에 녹아드는 광경을 지켜보며 하마터면 실언을 할 뻔했다.

‘평생 잊을 수 없으리라.’

말도 안 됐다. 이레이의 남은 삶은 여전히 헤아릴 수조차 없이 까마득하다. 그 긴 세월 내내 정말로 이 여자를 잊을 수 없다면…… 그건 너무나 잔인한 처사다.

인간의 삶은 턱없이 짧았다. 그러니 찰나 떠오른 말일수록 빨리 전하는 것이 좋았다. 잊어버리기 전에. 아니. 계절이 바뀌고 눈이 녹기 전에. 들어줄 이가 사라지기 전에.

선황이 죽던 밤, 이레이는 남모르게 해시트의 막사로 숨어 들어가 그녀가 데워 둔 침상에 그의 차가운 몸을 누였다.

“괜찮아. 천둥이 치고 있어.”

해시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이레이는 아무것도 다그치지 않았다. 어차피 그녀의 심장 소리가 모든 대답을 대신했다.

두근두근 울려 대던 것이 쾅쾅 요동치기까지.

“해스. 그러니까 나는 아마 너를…….”

가슴을 퍽퍽 내리치던 손길이 무너져 안겨 오기까지.

“너를…….”

그런 시간이 흐르는 동안 과연 변한 이는 당신인지 나인지, 둘 다 변하였거나 사실은 아무도 변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변한 것은 그저 꽃과 녹음과 낙엽과 눈발일 수도 있었다. 태초부터 나고 지는 모든 존재에는 이름이 있었다. 그런데 이레이는 지금 말하고자 하는 것의 이름을 몰랐다. 그래서 말끝을 흐리고 또 흐렸다.

“해스, 나는.”

이 감정에 대해 배우지 않았다.

누구도 가르쳐 주지 않았고, 먼저 나서서 배울 생각은 당연히 안 해 봤다. 단지 역린이라고만 알고 지낸 것. 그렇게만 알고 있어도 충분할 줄 알았다.

“어머. 역시 젊은이에겐 ‘역린’이 있었군요. 소문으로만 들었지 실제로는 처음 봐요.”

마침내 이레이는 언젠가 만난 행인의 한탄을 이해하게 되었다.

“부럽네요. 젊은이의 삶은 평범한 드래곤보다 훨씬 더 다채롭겠어요.”

행인의 눈에는 봄의 꽃과 여름의 녹음과 가을의 새빨간 단풍까지도, 그리고 겨울에 흩어지는 새하얀 함박눈마저도 모조리 밤바다에 비친 먹구름처럼 회색으로 비쳤을 것이다.

그래서 오로지 불길로써 찬란히 빛나는 태양을 좇다가 고꾸라졌을 것이다. 이레이는 늦게나마 한때 미친놈 취급했던 존재의 명복을 빌어 주기로 했다.

그런 뒤엔 소리 내지 못하고 입 속에서 뇌까려 보았다. 연습이었다. 그러니까 그 단어가 이런 형태였던가. 혓바닥을 이렇게, 입술은 이렇게 모아서 내뱉으면 되나. 막상 혀 위에서 굴려 보니 혼란만이 가중되었을 뿐 확신이 서지 않았다.

아마 맞을 텐데.

이게 맞긴 할 텐데…….

그러니까 그것 말이다, 계절이 바뀌고 꽃이 져도 여전히 싱그럽게 남아 있는 그것.

바로…….

“뭐야. 자잖아?”

비로소 그것의 이름을 확신했을 땐 해시트가 깊이 잠들어 있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다음을 기약했다.

찰나 떠오른 말일수록 빨리 전해야 한다는 사실을 망각한 그의 잘못이었다. 잊어버리기 전에 말했어야 했는데. 적어도 계절이 바뀌고 눈이 녹기 전에. 무엇보다 들어줄 이가 사라지기 전에, 말했어야 했다.

이레이가 기약한 다음은 오랫동안 오지 않았다.

해시트는 그가 애타게 기다리는 다음을 단단히 붙잡아 두고서 그가 모르는 곳으로 가 버렸다. 때문에 이레이는 무엇도 정의 내리지 못한 채 혼돈 속에 머물렀다.

해시트는. 왜.

왜 나를 좋아하면서 다른 남자와 결혼하겠다고 하는 걸까. 마음은 주되 몸은 줄 수 없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생각이 깊어 갈수록 숙제가 늘어 갔고, 숙제가 늘어 갈수록 머릿속으로 문장을 다듬는 일이 힘들어졌다.

문장이 사라진 자리에는 지독한 몰이해만이 남았다. 모순적이게도 그녀를 이해하고 싶다는 욕망과 함께였다.

읽히지 않고 뱉을 수 없는 말이 쌓여 온몸을 굴러다녔다. 그것들이 쉽게 뾰족해져 몸 안에 생채기를 남겼다. 자칫 밖으로 끄집어내 똑같이 휘두르게 될까 봐, 그는 스스로 그것을 삼켜 낼 때까지 말을 아끼기로 했다. 그 선택 또한 곧 후회하게 되었다.

“나는 네가 인간이었어도 너를 버렸을 거다. 버려야만 하니까.”

그는 버림받았다. 생에 두 번째로.

연습 같은 거 하지 않고, 바로 말해 버렸다면 결과가 달라졌을까? 적어도 계절이 바뀌기 전이었다면 괜찮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눈이 녹기 전에 달려갔어야 했나. 낙엽이 쓸려 가기 전에 불러내 볼 걸 그랬나. 그보다는 꽃이 지기 전이 더 좋았을까. 혹시 너는 짙푸른 나무 그늘 아래를 가장 좋아했을까.

이레이는 흘러간 계절 중에 유독 아름다웠던 날을 곱씹었다. 하지만 고를 수 없었다.

꽃이 저 버렸을지언정 녹음은 반드시 우거지고, 녹음이 사라진 자리엔 또다시 낙엽이 흩어지는 법이다. 다시 눈발 날리는 겨울이 오면, 어김없이 흰 눈에 피 묻은 손을 씻는 여자의 얼굴이 떠오르리라.

평생토록.

그렇다면 떠나기 전엔 말할 수 있어 다행이라 해야 할까…….

“연모하였다.”

그도 아니면 차라리 몰랐어야 했다고, 처절하게 후회해야 옳을지 그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고작 단어 하나를 완전히 깨우쳤다고 해서 깊은 무지가 끝날 리 없었다. 이레이는 그냥 역린이 없어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역린은 처음부터 없던 편이 나았다.

또다시 이레이는 깨달았다.

그에게 역린이 있는 한, 이 감정을 평생 잊을 수 없으리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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