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내가 치료해 줄까? 나도 의사 면허증 있는데.”
피 냄새 풀풀 풍기며 작전 회의하는 꼴이 영 찜찜해서 그랬다. 그냥 내버려 두면 보나 마나 감염으로 급사하거나 피부가 괴사해서 천천히 죽음에 이를 텐데, 만나자마자 이별하기엔 아직 그녀에게 건 기대감 중 백만 분의 일도 충족하기 전이었다.
“내가 말 안 했었나? 직업은 용병이지만 가업은 의사라고. 우리 아버지 닦달이 워낙 심하셔서 일찍이 가업을 이어받았었지.”
비록 오래된 과거이긴 했으나 거짓말은 아니었다. 해시트는 이레이의 고백에 놀란 듯 보였다.
“저 망나니에게 가족이 있었다니. 믿을 수 없어.”
“……놀라는 요지가 그쪽이라면, 그래. 심지어 꽤 화목했단다. 우리 가족.”
이것도 거짓말은 아니었다. 살아생전 아버지와는 꽤 사이가 좋은 편이었고, 어머니와는 가족으로 살아 본 경험이 없으니까.
그건 그렇고 쪼끄만 게 못 하는 소리가 없었다. 울컥해서 가정교육을 운운하기엔 해시트의 성장 환경이 무척이나 콩가루였으므로 그는 의연히 넘어가 주기로 했다.
하지만 잠시 후, 라피난을 내보낸 해시트가 상의를 끌어 올렸을 때 이레이는 더 이상 의연하게 넘어가 주지 못했다. 의사의 눈으로 보았을 때 도무지 이해 불가능한 흉터들이 쇄골부터 배꼽 아래까지 득실거렸기 때문이다.
“온몸에 흉터가 아주 장관이네. 저기 옆구리에 칼빵은 누가 놓은 거지?”
시치미를 떼고 물었다. 당연히 암살자에게, 혹은 전쟁터에서 얻은 부상임을 잘 알면서도. 문제는 그것들 대부분이 응당 즉사해 마땅한 치명상이었다는 점이다.
일거일동마다 전설의 명의를 곁에 끼고 다녔다면 모를까, 지금처럼 치료는 뒷전에 두고 성별을 숨기는 데만 급급해서는 결코 살아남는 게 불가능한 몸 상태였다. 솔직히 진작 장례를 치르지 않은 게 놀랍다.
아, 별안간 이레이는 깨달았다.
이것이 바로 신이 이 여자를 괴롭히는 방법이로구나!
그는 뒤늦게 알아차렸다. 신은 해시트를 요절시키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분께선 그녀를 살게 하고자 하셨다. 그러나 단지 목숨만을 부지하도록.
껍데기뿐인 권력을 양손에 쥐여 주고, 허상 같은 이상의 씨앗을 머릿속에 심어 주고, 그 때문에 굴욕적으로 생을 구걸하게 만들며, 번번이 찾아오는 죽음의 위기에 결국 절망에 더 익숙해지도록, 그런데도 실낱같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그것을 희망이란 이름으로 부르짖도록.
차라리 죽고 싶은 고통을 꾸역꾸역 견뎌 내도록. 그리하여 영원한 죽음의 공포 아래 목숨만을 부지케 하는 것이었다.
추측건대 그녀는 바라는 그 어떤 꿈도 이룰 수 없을 터였다.
번번이 고지를 눈앞에 두고 단 한 발자국이 모자라 고꾸라지고 말리라. 이레이는 확신했다. 황태자 해시트는, 절대로 황제가 될 수 없다…….
아무리 신의 결정이라지만 순순히 따르기엔 너무 쩨쩨했다. 끽해야 이십 년도 안 산 여자애가 제 목숨을 부지하려 아버지 좀 죽이겠다고 결심했기로서니 말이다. 그 순간 이레이는 분명 해시트를 연민하였지만, 그런 심오한 마음을 학습하기 전이었다. 그래서인지 위로 대신 조소가 튀어 나갔다.
“아마도 신께서는 신성제국 미케나의 황태자를 몹시 사랑하는 모양이다.”
“뭐라?”
“네가 요절하기 전에 나를 만나게 해 준 걸 보면, 너는 신의 은총을 받는 게 분명해.”
한편으론 부정할 수 없는 진심이기도 했다.
그분 취미 한번 참 고상하시다. 역린이 있는 드래곤 앞에 당신의 미움을 산 인간을 내려 주시다니. 어디 자신이 있다면 열심히 뒤치다꺼리를 해 보라며 부추기는 듯했다.
시쳇말에 사랑과 증오는 겨우 한 끗 차이라고 했다. 신의 은총과 핍박도 같은 맥락일까 싶었다. 이레이는 최소한 그녀가 절망으로 미쳐 버리기 전에 목숨을 끊어 줄 용의가 충분했다.
그러나.
“멍청한 새끼.”
신랄한 욕설이 귓전을 때린 동시에. 이레이는 두 번째 착각을 인정했다.
“세상에 신이 있다면 나를 여자로 태어나게 했을 리 없어.”
둘째, 고작 패륜을 저지르겠다는 포부만으론 신의 미움을 사기에 부족하다.
“…….”
순간 침묵한 이레이가 물끄러미 해시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금빛으로 반짝이는 눈동자에 흔들림은 없었다. 놀랍게도 이레이의 도발에 넘어와 즉흥적으로 꺼낸 망언이 아니란 것이다. 그인즉슨 그녀는 아주 오래전부터 신의 존재 자체를 뼛속 깊이 부정해 왔단다.
허. 그는 하마터면 헛숨을 토해 낼 뻔했다. 의문했다. 어떻게 이런 인간이 세상에 태어났단 말인가?
저 자신부터가 신의 피조물인 주제에.
하찮은 인간, 그중에서도 하필이면 가장 연약한 여자아이면서, 감히 불가능한 사고를 가지고 지각했다.
뭇 나라끼리 성서의 단어 한두 개를 가지고 갑론을박하다가 전쟁을 일으키는 수준과도 확연히 동떨어져 있었다. 이 건방진 인간은 괘씸하게도 제 삶의 우여곡절을 그분의 존재에 앞세워 신앙을 부정하는 중이다. 실제로도 그렇게 말했다.
“명심해. 내가 제위에 오르려는 이유는 신의 뜻 같은 게 아니다. 이 몸 스스로의 의지이며 제국의 미래가 될 것이야.”
스스로의 의지.
신을 논하며 입에 올리기에 가장 적당하지 않은 단어다. 그러나 가만히 곱씹다가, 이레이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맞아…….”
그날 처음으로 어루만져 본 해시트의 뺨은 깃털처럼 부드럽고 솜이불 밑처럼 따뜻했다.
패륜을 저지르겠다는 포부가 단순히 설계의 불량이라면, 조금 전 그녀가 지껄인 말들은 지엄하신 그분에 대한 도전이었다. 국가로 따지자면 반역이요, 다시 말해 역심이다.
역심.
이레이는 그것이 제 뒷덜미에 거꾸로 나 있는 손톱만 한 비늘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역심과 역린, 혀를 가볍게 차고 내려가는 감각이 제법 비슷했다.
“네 말대로……, 신이 있다면, 우리가 이러고 있을 리 없지.”
묘한 승부욕이 고개를 쳐들었다.
다시금 이레이는 해시트를 황제로 만들겠노라 결심했다. 반드시.
불과 몇 분 전에 그녀의 운명을 재고했으면서 변덕이 죽 끓듯 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지만, 늘 그렇듯 드래곤이란 원래 그런 생명체였다. 이왕지사 그 겸사겸사 해시트가 황제의 목숨을 끊는 것까지 구경한다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어느새 해시트의 곁에 머무르는 이유가 전복되었음을 그는 인지하지 못했다.
그것을 인지하고, 또 의미를 두기 시작한 순간은 이번에도 금세 찾아왔다.
“끔찍한 고통 속에서 사지가 부러져 죽는 게 싫다면 그걸로 자결하든지, 아니면 탈옥하든지. 웬만하면 탈옥해라. 알겠나?”
또다시 그의 역린이 반응하던 순간 말이다.
*
이쯤에서 짚고 넘어가자. 이레이는 아버지의 죽음 이후 인간 세상에 제대로 뿌리내린 적이 없었다는 것을.
언제나 혼자였고 어디서나 떠돌이였다. 집을 가져 본 적도, 한 직장에 꾸준히 출근해 본 적도, 심지어 타인과 통성명도 안 하고 살았다.
유일한 사유재산으로 사들였던 거대한 배 한 척조차 아차 하는 사이에 녹슬어 버려 기억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당연히 권세니 권력이니, 비단 아버지의 유언이 아니었더라도 애초에 그런 가치는 그의 관심사 밖이었다.
그래서 아주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당시 그의 관심사라는 건 오직 해시트 하나뿐이었다.
애당초 그녀에 대한 호기심으로 시작된 관계였으니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생김새도 하는 짓도 보고 있으면 지루하지 않아서 자꾸만 찾게 되는 이유도 있었다.
이레이는 흥미로운 소설책이라도 발견한 사람처럼 열심히 해시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상했다. 정말 재미있었다. 그러나 제아무리 질리지 않는 소설일지라도, 직접 책 안으로 들어가 주인공을 만나는 건 조금 다른 문제였다.
애석하게도 해시트는 이레이와는 정반대로 성실함의 화신이었다. 그 조그마한 머리통 속에는 자나 깨나 일할 생각뿐인가 보다. 함께 출정했던 첫 전쟁이 끝난 후, 그녀는 좀체 성 안에 붙어 있지 않고 신전과 민가를 오가며 전사자들의 장례를 신경 썼다. 가끔 성에 머물 때에도 줄곧 회의실에 처박혀 대신들과 논의에 열중했다.
머지않아 이레이는 성 안에서 해시트와 노닥이는 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만다. 그렇다고 전쟁터에 나가 노닥거리자니 또 해시트가 아무렇게나 칼에 얻어맞고 몸뚱이에 비가역적인 상흔을 남겨 올 게 뻔해 탐탁지 않았다.
“음, 아무래도 방법을 바꿔야겠다.”
그는 또 변덕을 부렸다. 이번엔 달랑 사흘 만의 번복이었다.
그리고 절반은 충동적인 결정이었다. 실수로 코끼리 마취제를 오도독 씹어 먹고 혼수상태에 빠진 해시트를 대신해서 이레이더러 황제가 주최하는 사냥대회에 참석하라길래. 이참에 대역죄를 저지르고 사형당하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 생각했다.
해시트의 삶을 구경하거나 돌봐 주는 것은 죽음으로 위장한 상태에서도 거뜬했다. 아니, 오히려 그쪽이 백배는 더 편하다. 다만 그는 보험을 들어 두었다.
“그런데 살아 돌아오면 뭘 해 줄 건데?”
“아량을 베풀어 죽이지는 않으마.”
이 정도면 뭐. 행여 나중에 모습을 드러내야 하는 긴박한 상황이 오더라도 근거로 삼기 충분하리라. 살아 돌아왔잖아, 화내지 마. 이레이는 죽었다 살아 돌아온 남자를 보고 얼빠진 그녀에게 그렇게 말해 줄 날이 내심 기대되었다. 그 얼굴이 빨리 보고 싶었다.
맹세코 이런 얼굴이 보고 싶었던 것은 아니다.
“뭣들 하느냐! 저놈을 당장 감옥에 가둬라!”
황제의 말을 사슴이랍시고 훔친 죄인에게 즉결처형이 떨어질라, 기를 쓰고 감옥에 처넣으려는 노력이 가상했다. 제발 저 남자를 죽이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는 눈빛. 기실 이레이는 그날 해시트의 눈에 스친 찰나의 절박함을 발견한 순간부터 이상해진 셈이다.
정말로 맹세코 이런 얼굴이 보고 싶었던 것은 아닌데.
하지만 나쁘지 않았다. 아니? 좋았다. 좋은 것 같았다. 그래, 좋았다. 좋다는 표현에 확신을 가지기까지 생경한 감각이 그의 손끝부터 전신을 휩쓸었다. 처음 느끼는 짜릿함이었다. 그게 좋았다. 혀를 대어 좀 더 맛보고 싶었다. 가능한 한 오랫동안. 인간의 기준으로는 영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