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인간 세상으로 돌아와서 용병이 되었다.
닥치는 대로 전쟁에 참여해 살생에 몰두했다. 뼈와 살을 베고 썰고, 시체와 핏물로 허망함을 달랬다. 알음알음 퍼진 소문을 듣고 찾아온 이에겐 기분에 따라 암살자 노릇을 해 주기도 했다.
그러나 웬만한 부자는 엄두도 못 낼 비싼 몸값을 불렀다. 감히 천륜을 저버리려는 놈들이 아니라면 찾아오지 못하도록. 언제부터인가 이레이에겐 패륜을 전문 삼는 무식한 개새끼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상관없었다. 어차피 순수한 ‘인간’이란 제 손으로 부모나 자식을 죽일 수 없음을 깨달은 차였다. 애당초 초월적 존재에 의해 그렇게 설계되었으므로. 수식은 이미 정해져 있었고, 어떤 조건을 대입해도 변하지 않았다.
특히 자식은 결코 부모를 죽일 수 없게끔 절대적인 명령어가 입력되어 있었다. 그건 왜일까 생각해 보니, 아마 신께서는 인간들이 자신의 존재를 거스를까 못내 걱정하는 듯했다. 대개 신앙심이란 부모를 공경하는 마음을 기본 삼는 법이니, 혹시 모를 불상사에 대비해 인간의 본능에 암시를 내려 둔 것이다.
그러니 대신 죽여 주는 게 맞지 않겠나.
그들의 딸을, 아버지를, 아들을, 어머니를, 형제를.
조부모를, 손자를, 숙부와 사촌 조카를.
셀 수 없는 목숨을 대신 거두어 줄 때면 이레이는 기묘한 흥분감에 휩싸였다. 평생을 허덕여 온 결핍을 스스로 충족하지 못한 업보였다. 또다시 타인의 업을 대신 쌓아 주면서 그는 억지 위안을 얻었다.
이쯤에서 잠시 딴소리를 하자면, 살인 청부업자들 사이에서도 지켜야 할 최소 윤리가 있던 모양이다. 일명 패륜 전문가가 된 이후 이레이는 가는 길마다 곱지 않은 시선을 받았다. 뒤통수에 대고 욕을 하거나 침을 뱉는 자도 있었다.
뭐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전혀 상관없었지만…… 진짜로, 정말로 상관없긴 했지만, 가끔 기분이 좋지 않은 날에 그런 놈들과 마주치면 이레이는 그들이 먹을 음식에 ‘카렌’에서 따 온 독초를 몰래 탔다. 적정량을 지키면 절묘한 혼수상태에 빠뜨릴 수 있었다. 닷새 정도.
그동안은 숨도 쉬지 않고 맥도 안 잡히기 때문에 죽은 줄로 오해받기 딱 좋다. 다시 깨어난 그들은 산 채로 못질 된 관짝 안에서 악악 비명을 질러 대는 수밖에 없었다. 운이 좋아 지나가던 사람에게 발견되어 봤자, 악령 내지는 악마 취급을 당하기 일쑤였다
몇 번 써 보았더니 효과가 썩 마음에 들기에 이레이는 남은 독초를 모두 건조해서 방부 처리 해 두었다. 못해도 오백 년은 너끈하게 쓸 터였다.
이름은 코끼리 마취제로 지었다. 언젠가 인간이 던진 죽창을 엉덩이에 몇 년째 매달고 다니는 코끼리를 발견하고 수술해 준 적이 있는데, 마땅한 마취제가 없어서 시험 삼아 이 풀을 써 보았더니 아주 잘 통했기 때문이다.
*
시간은 덧없이 흘러갔다. 이레이는 카렌에 다녀온 뒤로 시간의 흐름을 제대로 헤아리지 않았다. 몇 년 혹은 십수 년. 어쩌면 수십 년이 지났을 수도 있다.
그래서 용병 생활을 시작한 지 정확히 얼마만큼의 세월이 지나갔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 해의 연도와 계절만큼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 바로 그날부터 그의 시간이 다시 의미를 갖기 시작했으므로.
제국력 559년.
늦겨울, 봄이 오기 직전이었다.
“황태자를 죽여라.”
들풀로 뒤덮인 옛 성벽의 터에서 받은 지령은 당연히 계획에 없는 일이었다.
“이봐. 사람을 잘못 찾아온 것 같은데? 나는 패륜 전문이야.”
이레이는 진심으로 황당해했다. 천륜을 저버리는 게 아니라면 굳이 남의 입맛에 맞춰서 살인해 줄 이유가 그에겐 없다. 그러나 이레이를 불러낸 상대는 막무가내였다. 무작정 돈 자루를 손에 쥐여 주더니 기분 나쁜 웃음을 지었다.
“하면 제대로 찾아왔고말고.”
“네가 황태자의 배다른 형제라도 된단 말인가?”
“말을 삼가라. 나는 단지 심부름을 나왔을 뿐.”
사람을 죽여 달라는 청마저 심부름꾼을 대신 내보내는 이들은 으레 권력자다. 하물며 이레이를 제대로 찾아왔다면 두말할 것도 없다. 이내 이레이는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거면 진작 말하지.”
제국의 황제가 유일한 적통 후계자를 죽이려 든다는 이야기는 그조차도 처음 겪는 일이었으나 그 속사정까지는 알 바 아니었다. 다들 죽일 만하니까 죽이고, 죽을 만하니까 죽는 거다. 야만의 시대에선 약한 것 또한 중죄였다.
“황태자가 사생아라도 되나.”
은근히 흥미가 돋긴 했다. 미케나의 황태자는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모든 홍복을 타고났다고 소문이 자자한 인물이었다. 눈이 멀도록 아름다운 외모는 물론이거니와 인품이 훌륭하고 지략에도 능해서 전쟁만 나섰다 하면 승승장구 백전백패라고.
하지만 원래 소문이란 쉽게 부풀려지기 마련이 아닌가. 이레이는 큰 기대를 품지 않고 흐린 달밤에 황태자의 침실로 숨어들었다.
그리고 황태자를 보자마자 알게 되었다.
소문은 일부 사실이었으나, 중요한 진실 한 가지가 누락된 상태였다는 것을.
“너 목소리가 아주…….”
황태자는 여자였다. 그러나 이레이의 놀라움은 황태자의 성별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를 가리키는 소문 중에 명백한 오류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요컨대 황태자 해시트는 신에게 무지막지한 미움을 받고 있었다. 그녀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모든 홍복’을 타고났다는 말은 전부 개소리였다는 뜻이다.
어느 정도 나이가 찬 드래곤이라면 신이 특별히 여기는 인간 정도는 알아보는 법이다. 그런 이를 두고 보통 신의 은총을 받았다고 표현하는데, 황태자 해시트의 경우엔 은총이 아닌 핍박이었다.
한데 왜? 어째서.
그 나이를 먹고도 처음 목격하는 순리에 이레이는 거듭 당황했다. 황태자, 해시트는 아름답고 총명한 데다 혀를 내두를 정도의 정신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선천적으로 기세가 약했다.
단순히 건강이 나쁜 것이 아니라 길 가다 날벼락 맞기 적당한 체질이었다. 볕 좋은 날 산책하다가 픽 쓰러져 그대로 요절한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이유가 뭘까. 어린 나이에 보기보다 악행을 많이 저지르기라도 했는지, 태초에 이 제국의 원죄를 타고났거나, 그녀가 천 명의 시체와 뒤바꿔 탄생한다는 악마가 아닌 이상 이럴 수는 없었다.
이레이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이것저것 유도 심문을 해 보았지만 신통한 대답을 얻지는 못했다. 그러다 번뜩 빛나는 황태자의 광기 어린 조소를 보았다.
“황제께서 보내셨겠지. 나의 아버지.”
황태자는 황제를 죽이겠다고 말했다. 그녀의 아버지를.
그제야 납득이 갔다. 과연 그 말이 허풍이 아닌 진심이라면. 그렇다면 신의 노여움을 사기에 충분하지 않은가? 그분의 이름으로써 세운 나라, 신성 제국 미케나의 황제를 다름 아닌 황제의 유일한 적통인 황태자가 살해한다면.
그것이야말로 그분께서 가장 걱정하시는 결말이지 않은가? 황제가 황태자를 해하는 것은 신이 인간을 벌하는 것과 다름없을지 몰라도 그 반대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패륜이다. 그런 사고가 벌어진다면 언젠간 신을 벌하려 드는 돌연변이 인간이 태어날 수도 있었으므로.
이레이는 입가로 퍼져 나가는 미소를 참지 못했다.
지난날 그의 앞에서 이와 같은 맹세를 진 이가 셀 수 없이 많았다지만, 실제로 제 목숨을 지키고자 우발적으로 패륜을 저지르는 인간들도 이따금 존재했다지만, 때를 기다리며 부모를 죽일 기회를 ‘인간’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마침내 그는 신의 깊은 뜻을 이해했다. 설계해 둔 대로 따르지 않겠다는데야 불량품 취급할 수밖에.
이레이는 검을 거두었다. 어차피 곧 부러질 생을 미리 거둘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를 구하러 온 근위대장에게 그가 진심을 담아 탄식했다.
“아쉽군. 네 실력으론 얼마 못 가 죽어 버릴 아이야.”
필요 이상으로 빈정거린 것은 하필 근위대장의 머리카락이 백발에 가까운 금발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죽이지 못한 어머니의 비늘 색깔이 떠올라서, 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가 하탄국을 멸망시킨 카일 장군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미리 알았더라면 무언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하필 아버지의 책을 세상에 퍼뜨려 준 집안의 후계자라니. 결국 라피난에게 정체를 들키는 건 시간문제였던 셈이다.
하지만 그것은 좀 더 나중의 일이었기에, 이때 이레이는 며칠의 고민 끝에 다시 해시트를 찾아갔다.
“내가 널 지켜 주는 건 어때?”
“실성했나?”
“제정신인데.”
그녀가 머잖아 신의 섭리로 요절하고 말리라는 판단에는 변함없었다. 하지만 또 모르지. 이레이가 이 여자의 곁에 죽치고 있는 동안 그녀가 정말 아비를 죽이는 데 성공할지도.
만일 그러지 못하더라도, 겸사겸사 눈에 담기 좋은 어여쁜 얼굴을 잔뜩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손해는 아닐 성싶었다.
인세(人世)에 욕망하지 않는 이레이의 눈에도 해시트는 아름다웠다.
이렇게 생긴 앨 두고 남자라 철석같이 믿고 있다니 이 나라 인간들은 모두 눈깔이 해태인 게 분명했다. 적어도 황태자 해시트의 함초롬한 얼굴과 그에 걸맞지 않은 까칠한 말투에 질리기 전까진 기꺼이 허송세월하리라. 황태자가 그토록 바라마지않는 황제 자리도 얼마든지 내어줄 수 있었다.
자신만만하게 황태자를 따라나서던 날, 이레이는 진심에 차 약속했다.
“도와줄게. 네가 황제가 될 수 있도록.”
돌이켜 보면 그는 여러모로 큰 착각에 빠져 있던 바이다.
첫째, 해시트를 향한 신의 핍박은 이레이의 생각처럼 단순하지 않았다.
둘째, 고작 패륜을 저지르겠다는 포부만으론 신의 미움을 사기에 부족하다.
이 두 가지 진실을 마저 알게 된 것은 시일 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