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시트와 가여운 짐승들-61화 (60/104)

61화.

“예?”

“싫은가?”

“그, 그럴 리가요!”

인간은 이레이의 눈이 아닌 황금을 빤히 바라보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랬으니, 함께 인간의 집으로 향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이레이는 분명 좋은 예행연습이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인간은 자신의 아비를 죽이지 못했다.

손발을 묶고 눈까지 가려서 던져 주었거늘 가슴에 칼 꽂는 일, 달랑 그거 하나를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몇 번이나 망설이더니 결국엔 엉엉 곡소리를 내며 제자리에 무너져 내리더라. 그리고 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늙은 술주정뱅이에게 사죄했다.

“아버지, 아버지! 제가 잠깐 악마에게 홀렸었나 봐요……! 용서해 주세요!”

그 말이 사실이라면 이레이가 바로 악마렷다. 바닥에 얼싸안은 인간 두 놈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이레이는 딱히 부정하지 않고 돌아섰다. 악마의 본분을 지켜 집에 불을 지를까 고민하기도 했지만, 멍청한 꼬락서니를 보아하니 곧 사이좋게 몰락할 성싶어 그냥 내버려 두었다. 분명 그편이 더 고통스러운 죽음이 될 테니까.

*

정확히 일주일 후, 인간은 아비와 함께 나란히 강물에 빠져 죽었다. 듣자 하니 노름빚을 독촉하러 온 빚쟁이들을 피해 도망치려다가 다리에서 떨어졌다나. 이레이는 짧게 혀를 찰 뿐이었다.

“한심하군.”

그 뒤로도 몇 번인가 비슷한 부탁을 받았지만, 결말도 늘 비슷했다.

자식을 죽여 달라던 부모, 부모를 죽여 달라던 자식, 너 나 할 것 없이 마지막엔 울부짖으며 자신의 선택을 돌이켰다. 너덜거리는 감정은 인간의 그릇을 넘치게 채웠고 그 편린을 이레이에게까지 쏘아 보냈다. 그럴 때면 이레이는 깊은 불쾌함 속에서 며칠을 허우적댔다. 속이 텁텁했다.

그는 결코 납득할 수 없는 인간들의 선택을 지켜보며 실망을 반복했다. 거듭된 실망이 분노로 번져 가기 직전에, 다행히 인간의 ‘마지막 땅’이 이레이의 앞에 찾아왔다.

마침내 대륙 방방곡곡을 돌아다니고도 정처 없이 같은 자리를 맴돈 끝에 고지를 눈앞에 남겨 두었음이다. 목적지에 도착한 이레이는 어째서 아버지가 이곳을 ‘인간의 마지막 땅’이라고 책에 적었는지 알게 되었다.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중요한 것이 ‘마지막’이 아닌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그곳은 바로 야만국 베누스였다.

죄를 지은 인간들이 모여 사는 해협 끝 작은 섬나라.

그 시초는 각국에서 추방형을 선고받은 흉악범을 풀이 자라지 않는 외딴 절벽 위에 내다 버리는 것이었다. 본디 아주 까마득한 절벽 위, 먹을 것이라곤 그 위를 날아가던 맹금이 놓치고 만 작은 털 짐승이 전부였다던데.

그래서 그곳에 죄인 수백 명이 갇혀 서로를 물어뜯으며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는데, 어느 날 높은 파도가 절벽을 덮치는 바람에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섬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기 시작한 죄인들은 더 이상 배를 곯지 않게 되었다.

절벽에서 섬이 된 감옥의 소문이 퍼지자, 믿을 수 없게도 제 발로 그곳에 걸어 들어가는 죄인들이 생겨났다. 급기야 그들은 스스로 나라의 이름을 ‘베누스’라 짓고 왕을 추대하기에 이르렀다. 인간 세계에서 쫓겨난 죄인들이 왕을 추대하는 방법은 다소 원시적이었다.

가장 강한 자를 왕으로 삼는다.

야만국답다. 그래서 베누스는 야만국이라는 별칭으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인간 세계의 테두리에서 버티지 못하고 쫓겨나거나 튕겨 나간 사람들이 사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결국 ‘인간의 마지막 땅’이란 문장 자체가 베누스를 가리키는 가장 적나라한 표현이었다.

“우리 아버지께서는 의사가 아니라 시인이 되셨어야 했는데…….”

장장 백 년하고도 팔십여 년에 걸친 헛수고 끝에 이레이는 부친을 향한 원망을 잇새로 삼켰다. 과정이야 어찌 됐든 결과적으로 그는 원하던 출발점에 선 바였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그간 살인 청부업을 하며 모은 돈으로 무척이나 비싼 배도 한 척 샀다.

돛을 밀어 줄 바람을 기다리며 해변에 걸터앉아 있을 때였다. 이레이의 뒤를 지나가던 누군가가 문득 멈춰 서서 물었다.

“어머. 배가 참 멋지네요. 젊은이는 어디로 가시나요?”

이레이는 말없이 남쪽을 가리켰다. 행인이 곧장 고개를 주억거렸다.

“제리 해변이요?”

아니, 그보다 훨씬 멀리 있는 외딴섬으로 간다. 이레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행인도 기대하지 않았다는 듯 저 할 말만 계속했다.

“그런데 저렇게 큰 배를 타고 지나가면 인간들이 놀라지 않을까요?”

“……당신이 알 게 뭐야.”

앞으로 칠십 일이나 항해해야 하는데, 맛있는 식량까지 챙겨 가진 못하더라도 최소한 잠자리만은 넓어야 할 터였다. 어차피 나다니는 다른 배들이 보이지 않게 되면 적당한 곳에 닻을 내려놓고 직접 날아갈 속셈이지만 당장의 잠자리만큼 중요하진 않았다. 그게 정확히 언제가 되리라는 보장도 없었다.

시큰둥한 그의 반응에 행인은 민망했는지 볼을 긁적이며 말했다.

“그럼……, 일출 잘 보고 오세요.”

일출?

아무래도 그는 이레이의 항해 목적을 오해한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남쪽에 있는 제리 해변에서 보는 일출이 대단히 아름답다던가.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그야 이레이가 관광에 관심이 있을 리가 없었다. 상념을 떨쳐 낸 이레이가 냉큼 배에 올라탔다. 때맞춰 기다리던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

뱃머리를 몰기 시작하고 서른 날이 지나자 더 이상 인간의 배가 보이지 않는 망망대해가 펼쳐졌다.

항해는 어려울 게 없었으나 건조된 과일이 지겨웠고 낚시는 더 귀찮았다. 다행히 식수는 내킬 때마다 비를 내리면 됐다. 그러나 역시 귀찮았다. 극지방으로 갈수록 비 대신 눈이 내리는 일도 허다했다. 결국 이레이는 적당한 빙하를 만나자마자 배를 묶어 두고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얼음 위에 사는 짐승들은 이레이의 본모습을 보자마자 저들끼리 한데 뭉쳐 끽끽거리는 비명을 질러 냈다. 거의 까무러친다. 감히 덤비거나 견제할 엄두는 내세에도 못 낼 성싶었다. 이레이는 거대한 혀를 날름거렸다.

― 너희들에겐 관심 없다. 내 배나 잘 지키고 있어.

그가 집채만 한 파란 눈동자로 그들을 한 번 내려다보고는 천천히 날갯짓을 시작했다.

거대한 몸집이 허공을 가르자 얼음의 대지에 시커먼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어찌나 거대한 면적으로 뒤덮이는지, 아마 모르는 펭귄이 보았다면 평소보다 빨리 밤이 왔다고밖에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

닷새 뒤, 황홀하게 반짝이는 해변 너머 새빨간 독초로 뒤덮인 섬을 발견한 순간까지만 해도 이레이는 자신이 있었다.

반드시 어머니를 찾아 그녀의 목을 베고 태곳적에 진 빚을 청산하리라. 절대 어리석은 인간들처럼, 겪어 보지도 않은 정에 이끌려서 목적을 저버리지는 않으리라…….

하지만 그의 핏줄 절반에 결국 인간의 피가 흐르기 때문일까?

“너는 ‘린 한’의 아들이로구나.”

나이 들어 온몸의 비늘이 새하얗게 변한 드래곤을 보았을 때, 이레이는 결코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꼬리 끝에 겨우 남아 있는 옅은 노란빛만이 과거 그녀가 흰색이 아닌 짙은 황금색으로 찬란히 빛났으리라 귀띔해 주었다.

그토록 나이 든 여자는 거대한 눈꺼풀을 껌뻑이는 데에도 긴 시간을 할애했다. 읊는 목소리는 더욱 느렸다.

“그래……. 그가 죽었나 보군. 하기야 시간이 꽤 지났으니…….”

피로하고 무심한 눈빛이다. 이레이가 빙판 위의 가여운 짐승들을 바라보던 것과 흡사했다. 아무런 관심도 흥미도 없이, 단지 현실 그대로를 시야에 담을 뿐이다.

이내 여자는 꼬리를 철썩 뒤집으며 몸을 반대편으로 돌려 누웠다. 금방이라도 잠에 들 듯 스르륵 눈을 감더니 말했다.

“왜 여기까지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뭐 알아서 하려무나. 나는 이제 늙어서 신의 계시를 들을 때 말고는 잘 깨지 않는단다. 존재를 잊을 만큼 잠에 취하거나 자다가 실제로 영면에 들게 되거나 그게 그거겠지.”

그렇게 이름도 알려 주지 않은 채, 심지어 이레이의 이름을 묻지도 않았다. 순식간에 잠에 빠져든 여자를 야멸치다 비난하기엔 이레이도 이상할 정도로 화가 나지 않았다. 무기력했다. 갑자기 모든 것이 귀찮아졌다.

누누이 말하지만 드래곤들이란 원래 그런 생명체다. 저 잘난 맛에 살며, 사랑은커녕 부모 자식 간의 인연도 구애받지 않는다. 태곳적 악연으로 엮인 줄 알았던 여자와 이레이는 결국 완벽한 타인이었다.

“한데 나는 무엇이 이토록 허망하고 애가 탄단 말인가…….”

고백한다. 이레이는 깊이 잠든 여자의 목에 발톱을 겨눈 채로 몇 날 며칠을 망설였다. 끝내 그녀의 숨통을 끊어 내진 못하고 겨우 비늘 몇 개를 부러뜨린 게 전부였다.

빈손으로 돌아가자니 그건 또 그것대로 자존심이 상해서, 돈이라면 이미 어느 황제도 부럽지 않게 많은 주제에 굳이 늙은 드래곤의 비늘을 헐값에 내다 팔겠다고. 소싯적 의사였던 지식을 살려 섬에 널린 독초도 몇 뿌리 캤다.

그날 밤, 붉은 섬을 떠나려는 그에게 때마침 섬에 들어오던 누군가가 말했다.

“어머. 역시 젊은이에겐 ‘역린’이 있었군요. 소문으로만 들었지 실제로는 처음 봐요.”

“…….”

이레이는 말없이 날개를 펼쳤다. 언제 봤다고 아는 척을 하느냐 묻기엔 그는 너무 쌩쌩한 기억력을 가진 젊은 드래곤이었다. ‘역린’이 무엇인지도…… 이미 아버지의 책에서 읽어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날아가는 그의 등에 대고 행인이 남긴 말이 오랫동안 이레이를 괴롭혔다.

“부럽네요. 당신의 삶은 다른 드래곤보다 훨씬 더 다채롭겠어요.”

나중에 전해 듣기로 그는 기나긴 삶이 무료해진 나머지 태양을 떨어뜨리러 하늘 꼭대기까지 비행하다가 불에 타 죽었다고 했다. 지랄맞은 객기도 그 정도면 기념비적이었다. 누가 인간이나 드래곤이나, 개중에 한심한 놈들 하나둘씩 꼭 끼어 있다고 안 할까 봐.

*

그는 다시 닷새를 날아 빙하에 묶어 두었던 배에 올라탔고, 또 서른 날을 항해해 항구까지 갔다.

돌아가자.

섬을 떠날 때 이레이는 그렇게 다짐했었다. 돌아가서 어영부영 인간들 틈에 부대끼며 살자. 그러다 뱃머리를 붙잡은 순간 깨달았다. 돌아간다니? 돌아갈 곳이 어디에 있다고.

무려 이백 년에 가까운 시간을 떠돌이로 살았다. 잠시나마 정착했던 고향이 존재할 리 만무했다. 옛날 옛적 아버지와 살았던 산골짜기 시골 마을은 어느 해 밀려온 해일에 잠겨 호수가 되어 버린 지 오래다. 만일 그러지 않았다고 해도, 결코 그가 알던 고향은 아니리라.

어디로 뱃머리를 돌려야 할까. 한참을 고민하던 이레이는 우연히 선홍빛 일출과 조우했다.

아, 제리 해변.

이곳이 그곳이구나. 그는 돛을 잡은 손을 멈추고 우두커니 서서 일출을 지켜보았다. 고요한 동시에 요란한 태양의 등장을 보고 있자니 저도 모르게 혼잣말이 흘러나왔다.

“그런데 내 이름이 뭐였더라.”

전혀 생각나지 않아서 한참이나 기억을 더듬어야 했다. 어느 순간 이레이는 그 여자가 자신의 이름을 알려 주지 않은 이유를 알아차렸다. 그녀도 잊어버린 것이다. 어차피 이레이의 이름도 잊어버릴 게 뻔해서 처음부터 묻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아버지의 이름은…….”

갑자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너는 린 한의 아들이로구나.’ 그렇게 중얼거리던 목소리를 몇 번쯤 곱씹다가, 그가 느지막이 바다로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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