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제아무리 찢어진 살갗을 말끔하게 꿰매 놓고 부러진 뼛조각을 거짓말처럼 맞춰 놓으면 무얼 하느냔 말이다. 뱃속의 병환을 덩어리째 꺼내 없애 주고 썩어 가는 비장까지 도려내 준들 그가 무슨 의미를 찾을 수 있겠느냔 말이다. 하찮은 인간 따위가 천수를 누려 봤자 끽해야 수십 년인 것을.
이레이는 그의 아버지가 영면에 들던 열일곱 살에 성장이 멈춘 채 백오십 년을 더 살았다. 그나마 옆에 붙어서 교화해 주는 어른이 없어지니 원래도 못됐던 성질이 하루가 다르게 삐뚤어진 건 뻔한 이치였다.
그는 무의미한 의사 노릇을 때려치우고 ‘카렌’을 찾아가 보기로 했다. 인간의 마지막 땅을 떠나 다시 남쪽으로 칠십 일을 항해해야 하는 여정에 몸을 싣기로 한 것이다.
그곳에 가면 그를 버린 어머니도 있고, 그처럼 늙지도 죽지도 않는 껍데기만 젊은 늙은이들이 수두룩할 테지. 생물학적 어머니를 만나자마자 반드시 죽여 버리고 말리라 굳게 다짐한 것치고, 여행길에 오른 이레이의 발걸음은 상당히 가벼웠다. 그때까지 그가 간과한 사실이 하나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인간의 ‘마지막 땅’이 어디인지부터 알아내야 한다는 것.
하필 제일 중요한 정보가 책에 나와 있지 않았다. 아무래도 부친이 단순 취미 삼아 집필한 책이라 고증에 만전을 기하지 않은 듯했다. 아니면 아들이 엄마를 죽이러 가겠다고 날뛸 것을 일찍이 예상하고 일부러 생략해 두었거나. ……왠지 후자 같다.
이레이는 이를 박박 갈며 언젠가 이 책을 세상에 널리 퍼뜨려 부친의 소싯적 취미 생활을 모두에게 까발리리라 결심했다.
여행은 이레이의 예상보다 훨씬 길어졌다. 그리하여 약 백 년하고도 팔십 년이 넘는 시간이 ‘마지막 땅’을 찾는 데 쓰였다.
“아. 인간들 다 멸종됐으면 좋겠다.”
그중에 겨우 오십 년이 지나갈 즈음에 이미 그는 손댈 수 없게 염세적인 성격으로 전락했다.
평생을 작은 산골짜기 마을에 파묻혀 살았던 이레이에게 대륙 여기저기에서 벌어지는 사건 사고들은 귀찮은 수준을 넘어서 환멸감을 느끼게 하기 충분했다.
어찌 된 영문인지 그가 가는 곳마다 온갖 군상들이 달려들곤 했다. 이거 해 달라 저거 해 달라, 용사가 되어 달라 마왕을 무찔러 달라, 왕의 병환을 치료해 달라, 아니다 왕을 죽여 달라! 아, 차라리 하늘의 별을 따다 달란 부탁이 덜 황당하겠구나 싶을 만큼 어처구니없는 사연이 연달았다.
한번은 부탁받은 대로 하탄국의 왕을 죽여 줬더니 다음 날 보답이라며 웬 연회에 초대받았더랬다. 마침 심심하던 차, 연회에 참석한 그를 반겨 준 이는 반투명한 천으로 얼굴의 반을 가린 무희였다.
사람들은 무희를 ‘아름다운 카타리나’라고 불렀다. 과연 사뿐한 몸짓으로 아름다운 검무를 추던 카타리나는 이레이가 독주 한 병을 비운 순간 돌연 그에게 달려들어 칼침을 날렸다.
당연히 카타리나를 포함해 그 자리에 있던 모두를 단칼에 베어 버렸지만, 그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아 시체로 가득한 연회장에서 홀로 씩씩거려야 했다.
그때 죽은 왕의 아들이라는 자가 나타났다.
그는 아바마마의 복수를 해 주어 고맙다며 무엇이든 소원을 들어주겠노라 말했다. 이놈들의 사주를 받고 그의 아바마마를 죽여 준 이가 바로 이레이일 거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이것들이 돌아가면서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그러잖아도 열받아 있던 이레이는 아예 이 나라 왕족의 씨를 말려 버릴까 하다가 불현듯 부친의 책으로 생각이 미쳤다.
“혹시 이 책을 스무 권쯤 만들어서 세상 곳곳에 퍼뜨려 줄 수 있나?”
“물론! 때마침 미케나의 무역 상인이 우리 하탄국에 와 있다. 카일 씨에게 부탁하면 이쯤이야 거뜬하고말고.”
“음……. 그래. 그럼 부탁하지.”
어차피 지난 오십 년 동안 달달 외우고도 남은 책이었다. 당장 품에 없다고 아쉬울 게 없었다. 다만 이레이는 책의 제목에서 ‘카렌’을 ‘카이렌’으로 바꾸어 달라 당부하고 떠났다.
앞으로도 그는 드래곤의 섬으로 갈 방법을 찾아다녀야 했으니, 중복된 정보에 괜한 시간 낭비를 하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대비책이었다. 그 섬을 ‘카이렌’이라고 부르는 정보꾼의 정보는 결국 아버지가 쓴 책으로부터 나왔을 테니까.
몇 년 후 지나가는 길에 보니, 하탄이라는 나라는 그새 지도에서 사라지고 그 땅은 미케나 제국령으로 둔갑해 있었다.
아마 이레이에게 국왕을 죽여 달라 사주한 이도, 선왕의 복수를 하자며 왕자의 눈을 흐린 이도, 모두 미케나에서 왔다는 무역 상인이었을 테지. 아니나 다를까 관청에 꽂힌 기념비에는 왕자가 말한 상인의 이름이 똑똑히 새겨져 있었다.
[라카르시나파 카일]
처음부터 상인 따위가 아니었으리라. 하나뿐인 왕자의 숨통은 용감한 카일 장군이 끊었다고 기념비에 적혀 있었으니까.
이레이는 왕자의 노고를 생각해 카일 장군을 죽여야 할까 조금 고민했지만, 어차피 아버지의 책은 무사히 세상에 나온 뒤였으므로 정상을 참작해 주기로 했다. 먼 훗날에 그 카일 장군의 증증증손자뻘 되는 남자와 친구의 맹세를 지게 될 줄 알았다면, 어떤 결정을 했을까?
글쎄, 거기까지는 역시 생각해 보지 않았다.
다만 이레이는 손가락을 튕겨 카일 장군의 기념비를 무너뜨리고 떠났다. 아무리 정상을 참작해 주었대도, 어린 딸에게 암살자 역할을 쥐여 주는 노인네에게 명예란 가당치도 않았다.
그날 이레이에게 검을 날린 아름다운 무희의 이름은 카타리나 카일이었다. 라카르시나파 카일 장군의 가장 어린 딸.
*
이레이는 끊임없이 인간사에 휘말리며 인간의 마지막 땅을 수소문했다.
참 신기한 게, 인간들은 뭐든 염치없이 부탁하기를 좋아하는 와중에 ‘저 새끼 좀 죽여 주세요’라는 소원을 압도적으로 많이 빌었다.
누구를 살려 달라는 말보다 죽여 달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종족이 이렇게 개체 수가 많을 게 뭐란 말인가? 그냥 많은 것도 아니고 바글거린다는 표현이 적합했다. 아무렴 신께서 일정한 주기를 두고 전염병을 내리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었다.
나이가 삼백 살이 넘어가던 무렵부터―솔직히 그 뒤로는 안 셌다―이레이는 초월적 존재의 현신을 감지할 수 있게 되었다. 보아하니 성격이 꽤 고약한 양반이시던데, 과연 그래서 내 팔자가 이 모양 이 꼴이로구나 낙담하기에 좋았다.
전지전능한 존재의 유무를 아는 것과 믿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이레이는 그분을 알기 때문에, 굳이 눈물을 흘리며 신실한 종으로 살지는 않았다.
드래곤이란 원래 그렇게 오만한 존재였다. 대부분 ‘나보다 대단한 건 알겠는데 굳이 존경까지 해야 하나…….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분명 얼굴은 내가 더 잘났을 거야…….’ 그런 마음가짐으로 사는 게 일반적이었으며, 사실 그분의 성품이란 실제로 존경할 만한 것이 아니기도 했다.
신의 성품에 대해 제대로 밝히자면 석 달 열흘을 꼬박 잡아도 모자라니 최대한 간단히 짚고 넘어가겠다.
일단, 그분은 세상의 모든 언어를 기억해 두었다가 각 국가 및 부족의 현인들 앞에 현신하여 그분의 말씀이 담긴 성서를 선물하길 좋아했다. 문제는 각각의 성서가 딱 손톱만큼만 다른 논지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얼핏 보면 똑같은 내용이지만 중간에 아주 사소하고도 결정적인 단어 하나가 다르다 보니 서로들 이게 맞네, 저게 맞네, 입씨름할 수밖에 없었다. 논쟁은 금세 전쟁으로 번졌고 비명과 곡소리가 난무하는 전쟁터에서 사람들은 또다시 그분에게 기도를 드렸다.
이레이도 이따금 그런 전쟁에 참여했다. 보통은 질 것 같은 편에 숨어들어서 심심풀이로 전세를 역전시키곤 했다. 그러다 운이 나쁘면 영웅으로 추앙받는 거고, 더 운이 나쁘면 천사 취급을 당하고 만다.
“오오, 저길 봐라! 하늘이 우리에게 보내 주신 투천사이시다!”
“환장하겠네. 차라리 저승사자라고 불러 주면 안 되겠냐?”
투천사라니.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는 모순적인 호칭을 열댓 번쯤 들은 뒤로는 절대 활약을 들키지 않으려고 노력에 노력을 기울였다. 그런 귀찮음을 감수하면서도 참전을 그만두지 않은 것은 순전히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특정 인물을 죽여 달라는 암살 의뢰보다야 불특정 다수를 마음껏 학살할 수 있는 전쟁터가 그의 종족적 본능 해소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어차피 드래곤이란 살육과 간계를 일삼지 않고서는 살 수 없는 종족이다. 의미 없는 살생이야말로 앞으로 남은 기나긴 인생에 가장 중요한 유희가 되리라, 그는 생각했다. 하지만 머잖아 그 생각을 재고하게 된다.
*
그날도 웬 인간 한 놈이 이레이의 앞에 돈 몇 푼을 던지며 외쳤다.
“부탁이오! 사람 하나만 죽여 주시오!”
살려 주시오가 아니고 죽여 달라고. 흔해 빠진 청부였다. 잠시 후 대상의 실체가 드러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제발, 내 아버지를 죽여 준다면 평생 은인으로 삼겠소.”
그에게 암살을 의뢰한 인간은 셀 수 없이 많았지만 친부모를 입에 올린 이는 처음이었다.
흥미가 돋지 않을 수 없었다. 인간 주제에 퍽 자신과 비슷한 목표를 가지고 있지 않은가. 그즈음의 이레이는 가끔 전쟁터에 마실을 나갈 뿐 더 이상 타인의 부탁을 받고 사람을 죽이지 않지만, 그 인간만큼은 외면하기 싫었다. 오히려 그냥 지나친다면 후회할 것만 같았다.
그는 슬그머니 피어오르는 미소를 숨기지 못하고 사정을 캐물었다. 그러자 인간이 왈칵 눈물을 쏟으며 바른대로 고했다.
“노름에 빠져 나 갓난쟁이 때 집을 나갔다는 양반이 재작년에 갑자기 찾아와서 늙고 병든 몸을 의탁하겠다는 거요. 살살 눈치를 보며 주저앉더니 그 뒤 매일같이 술만 퍼 잡수시다가 며칠 전엔 내 학비까지 도박으로 탕진하였소. 의사 말로는 어차피 술병이 깊어 오래 못 살 거라고는 하나, 이러다간 아버지가 병사하기 전에 내가 굶어 죽을 판이오!”
합리적인 이유였다. 그 인간의 아비는 죽어 마땅하게 들렸다.
이레이는 만면에 싱글벙글한 미소를 띤 채 곧장 인간이 가져온 것의 수십에 달하는 황금을 꺼내 왔다. 철퍽, 그것을 인간의 앞에 던져 주고는 말했다.
“네게 주마.”
“정말입니까?”
“원한다면 더 주겠다. 대신 내가 보는 앞에서 네가 직접 네 아비의 숨통을 끊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