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버릴 수밖에 없다. 버려야만 한다.
누구도 반박하지 못할 완벽한 황제가 되기 위해서. 가장 완전한 모습으로 황가를 멸족시키기 위해서. 그리하여 대의를 이루는 날, 그녀 스스로 이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 위하여.
해시트는 이레이에게 무의미한 기대감을 심어 주는 짓을 그만두기로 했다.
“떠나라. 붙잡지 않으마.”
갑자기 머리가 맑아졌다. 빳빳하게 경직되어 있던 온몸에 피가 도는 듯했다. 이제 그녀는 눈앞에 있는 남자가 인간이든 아니든, 창밖에 비바람이 쏟아지고 낙뢰가 몰아쳐도 전혀 두렵지 않았다. 어차피 버릴 사람이다. 그래 봐야 곧 그칠 풍파였다.
끝내 이레이도 현실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그는 해시트의 손끝이 떨어져 나간 제 옷자락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면서 느리게 눈을 껌뻑였다. 이윽고 고개를 들어 그녀와 눈을 맞췄을 때, 그의 얼굴에 드러난 감정은 배신감이나 슬픔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에 무심코 안도감을 느끼고 만 해시트는 이를 악물어 동요를 감춰야 했다. 그리고 이레이는 못내 허무하게 중얼거렸다.
“버림받는 건 내 생에 두 번째군.”
“…….”
“알아. 버림받기 전에 떠나야 했는데,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고는 잠시 머뭇거리다 손을 들어 자신의 뒷덜미를 더듬었다. 귓불보다 약간 더 아래, 어깨로 미끄러지는 목선의 가운데, 그곳에 뾰족하게 튀어나온 손톱만 한 무언가에 손을 댔다. 문득 그의 입술이 씁쓸한 호선을 그려 낸다.
“아마 이것 때문이었겠지.”
지금껏 그의 발을 붙들고 있던 것의 정체를 안다고. 그의 목소리가 꼬리를 물수록 담담해져 갔다.
“그 여자를 죽이지 못한 것도 이 때문이었나…….”
콰득. 손톱이 살갗을 파고들었다. 단단한 손가락과 박동하는 목선을 타고 벌건 핏물이 흘러내렸다. 왈칵 터져 나온 피비린내가 해시트의 코끝을 찔렀다. 이레이는 해시트가 말릴 새도 없이 순식간에 그의 목덜미에서 핏물 가득한 무언가를 뽑아냈다.
의외로 뿌리가 깊었나 보다.
그의 손바닥 위에 올라온 ‘그것’은 거의 손가락 한 마디 크기였다.
겉으로 드러나 있던 부분보다 숨겨져 있던 부분이 몇 배는 더 컸다. 이러니 내내 휘둘렸을밖에……. 이레이는 이제야 이해가 간다며 쓰게 웃었다. 주먹을 살짝 말아 쥐었다가, 이내 미소 띤 얼굴 그대로 해시트의 손에 ‘그것’을 쥐여 주었다.
“이건 네게 두고 가는 게 맞겠군.”
“이게 뭐…….”
황망해진 해시트가 고개를 떨어뜨렸다. 피에 젖은 이레이의 손이 그녀의 손을 꾹 감쌌다가 멀어지고 있었다. 해시트의 손에도 그의 피가 묻었다. 손바닥 한가운데에는 조금 전 이레이가 제 목덜미에서 뜯어낸 살점이 올라온 채였다.
정확히 말해서 살점은 아니다. 벌건 핏물에 둘러싸이고도 더욱더 붉은 빛을 뽐내는 매끄러운 물체, ‘그것’은 언뜻 보석처럼 보였다.
그것은 이레이의 날개를 이루고 있던 비늘과 비슷한 듯하면서도 달랐다. 그보다는 작고, 그러나 마찬가지로 아름답고, 묘하게 거부감을 불러일으켰다. 이 물건이 무엇이든지 간에 받아선 안 된다는 본능이 앞섰다.
그녀가 퍼뜩 이레이를 올려다보았다.
“받을 수 없어.”
“원하지 않는다면 버려라.”
이레이는 단호하게 표정을 굳혔다. 이번만큼은 절대 양보할 마음이 없다는 듯이. 그런 뒤엔 여타의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눈빛으로 가만히 제자리에 서서 오랫동안 해시트를 바라보았다.
“…….”
“…….”
으레 사연 많은 연인이나 이별할 때 서로를 오래 바라본다던데, 다시 만나지 못할 얼굴을 꼼꼼히 기억해 두었다가 그리울 때 꺼내 보려고 말이다. 해시트는 막연히 흘려들었던 뭇사람들의 낭만을 떠올렸지만, 잠시 후 이레이가 꺼낸 감상은 사뭇 달랐다.
“그렇게 잘 울더니, 내가 갈 땐 한 방울도 내어주지 않는군.”
“…….”
해시트는 골몰히 기울이던 시선을 거둘 뿐이었다. 어느새 핏물이 말라붙은 손가락을 단단히 말아 쥘 뿐이었다. 그의 피와 살이 엉겨 붙은 보석이 그녀의 손 안에서 심장처럼 펄떡인다. 그런데도 눈물은 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마지막 인사라도 건네주어야 할까? 하지만 그마저도 갑자기 입술이 딱 달라붙는 바람에 쉽지 않았다.
결국 작별 인사를 건네는 일마저 이레이의 몫이 됐다. 끝끝내 눈물 한 방울 내어주지 않는 그녀가 너무나 야속하다 타박하면서도,
“연모하였다.”
아주 다정하게 속삭이고 갔다.
#3. 곧 이름을 잃어버릴 기억의 이름
“아버지. 저 가출하려고요.”
제국력 310년. 계절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날 이레이는 창고에서 발견한 책 한 권을 보란 듯이 아침 식탁 위로 올렸다. 시건방진 손짓으로 책 표지를 툭툭 건드리며 따졌다.
“다 알고 왔거든요. 여기 나오는 드래곤이 제 어머니 맞죠? 제가 태어나자마자 버리고 갔다던. 와, 진짜 이러시기 있냐고요. 제가 엄마 이름이라도 알려 달라고 그렇게 조를 땐 죽어도 모른다고 박박 우기시더니, 다 거짓말이었던 거죠? 그리고 책 제목이 이게 뭡니까? ‘카렌의 날개 달린 짐승들?’ 참 내.”
그가 지어낸 웃음소리를 흘렸다.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아들이 날개 달린 짐승이라서 참 자랑스러우시겠네요. 저는 또, 제가 날개 도마뱀의 혼혈이라도 되는 줄 알았지 뭐예요.”
있는 대로 짜증을 부렸지만 소용없었다. 그의 아버지, 린 한은 언제나 그렇듯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하여간에 진짜 친아버지가 맞긴 한 걸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야박한 노인네였으나, 눈동자 색만 빼면 서로를 꼭 빼닮은 생김새 때문에 출생의 비밀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물론 엄마가 드래곤인 것보다 더한 출생의 비밀이 어디에 있겠냐마는…….
태어나서 어머니의 존재를 단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이레이에겐 ‘한’이 유일한 가족이었다. 이레이는 아버지를 쏙 빼닮은 자신의 외모가 싫지 않았다. 가끔은 일부러 그의 흉내를 낼 때도 있었다.
반면 린 한은 이레이와 달리 항상 딱딱한 무표정만을 고수했는데, 그인즉슨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이레이 린’은 표정이 제법 풍부한 젊은이였다는 뜻이다.
밥상머리에 앉아 숟가락조차 들지 않고 시위하기를 한참, 기나긴 눈싸움 끝에 이레이는 거칠게 분통을 터뜨렸다.
“아, 싫어요! 지금까지는 아버지께서 소원하시던 대로 얌전히 의사 노릇 하면서 지냈지만 이젠 안 돼요. 양심이 좀 있어 보세요. 그거 열 살 때 손가락 걸고 한 약속이라서 이미 유효기간 다 지났거든요?”
벌떡! 아예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음식물이 담긴 접시를 통째로 쓰레기통에 처넣었다. 식탁 위의 접시가 한 장도 남지 않을 때까지 유리 깨지는 소리가 쨍강쨍강 연달았다.
“너무 걱정하진 마세요.”
문득 울분에 차 중얼거린다.
“그래도 아버지 유언은 지킬 테니까.”
쓰레기통에 접시를 몽땅 처박아 버린 그가 다시 식탁을 바라보았다. 벽에 걸린 초상화 속 린 한이 여전한 무표정으로 이레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백오십 년 전 아버지의 죽음 이후, 그는 매일 초상화와 함께 아침 식사를 해 왔다. 이 짓도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새삼 장례를 다시 치러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참에 다시 장례식을 치른들 이상하게 여길 사람도 없을 것이다. 이미 그들 부자를 아는 사람들은 전부 노환으로 죽었고―당시 인간의 평균 수명은 오십 대였다―이레이의 외모는 열일곱 이후 거의 변하지 않았으니, 혹 누군가 이레이가 장례 치르는 모습을 목격한다면 어린 친구가 부모를 빨리 여윈 모양이라며 안타까워할 터였다.
하지만 그는 두 번째 장례를 치르는 대신 작은 봇짐을 꾸렸다. 앞서 한에게 통보한 대로 가출하기 위해서였다. 다시 장례를 치른다면, 그건 아버지가 아닌 어머니 쪽이 먼저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면의 축복조차 누릴 수 없는 몸으로 이 세상에 저를 끄집어내 놓고, 눈 깜짝할 새 영면에 들어 버리는 인간들 사이에 팽개치고 떠나 버리다니 응당 그 죄를 물어 마땅했다. 낡은 창고에서 린 한이 쓴 책을 발견했을 때 이레이는 진심으로 살의를 느꼈다.
그는 자신이 왜 늙지도 죽지도 않는지 모르는 채 살았다.
드래곤이란 타고나길 잔악하고 흉포하여서 취미는 살육이요, 간계가 적성인 족속이라던데. 아무렴 그 묘사만큼 자신에게 딱 들어맞는 감투가 없던데, 정작 당사자인 이레이만 여태 모른 채로 허송세월했다. 그는 오늘에야 비로소 아버지의 유언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제발 평범하게 살아. 괜히 권력이니 세력이니 헛바람 들지 말고.”
아들이 자칫 출세했다가 사람 목숨으로 사고 치는 재미를 맛볼까 걱정이 컸나 보다. 그래 놓고 가업이랍시고 의술을 가르쳤다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젠장, 책까지 쓸 정도면 아버지도 진작 내 본성을 파악하고 계셨다는 거잖아.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날 의사로 키우신 거지?”
설마 죽어 가는 인간을 위해 베풀 수 있는 자비라고는 빨리 숨통을 끊어 주는 것밖에 없는 종족에게 생명의 숭고함을 알게 하려던 시도였을까?
그렇다면 린 한은 실패했다. 그동안 이레이는 의사의 삶에서 그 어떤 보람도 얻지 못했다. 꾸역꾸역 억지 의사 노릇을 하느라 쌓인 울화는 사흘 밤낮 떠들어 대도 부족하다.
기껏 병을 고쳐 줘 봤자 얼마 못 가 다른 병에 걸려 픽픽 쓰러지는 게 영 성질이 뻗쳐서, 차라리 한꺼번에 모든 병마의 싹을 잘라 버리기로 결심하곤 과잉 진료를 일삼다가 팔자에도 없는 전설의 명의(名醫) 소리를 듣게 되었을 때도 뿌듯함은커녕 하릴없는 허망함만 계속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