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이 지경이 되어서도 그는 구차한 궁금증 하나를 버리지 못했다.
마른 줄 알았던 눈물이 결국 아롱져 흔들린다. 달빛이 들어오는 방향으로 요란하게 일렁였다. 평소 눈물이 많은 쪽은 단연 이레이가 아닌 해시트였는데, 이상하게도 오늘은 상황이 정반대였다.
“단 한 번이라도, 나는 너의 백성이었나?”
해시트는 눈을 감았다. 또다시 얼마간의 침묵을 흘려보낸 뒤 힘겹게 눈을 뜬다. 외면한 채 읊어서는 안 되는 대답이 있었다.
“백성으로 품고 싶었다.”
“…….”
그녀는 이레이의 눈물을 보고 싶지 않았지만, 이레이도 그녀가 이런 것을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지만, 말소리가 끊긴 침실은 너무나 고요해서 겨우 눈물 한 방울 떨어지는 소리도 가려 주지 못했다.
툭. 손등 위로 부딪쳤나 보다.
해시트는 저도 모르게 이레이의 손등으로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그녀는 멍하니 입술을 벌렸다.
“어, 어떻게…….”
그녀의 하얀 얼굴에 못 보던 회색 그림자가 드리워진 채였다. 찰나 고개를 숙였다가 들어 올린 짧은 사이에 벌어진 일이다. 이레이의 등에서 뻗어 나온 검붉은 날개가 그녀의 시야를 넘어서 방 안 가득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날개라고는 했지만, 흔히 신전의 벽화에서 볼 수 있는 천사의 것과는 사뭇 다른 형태였다. 보드라운 깃털 대신 어둠 속에서도 확연히 드러나는 광택감이 단단한 질감을 짐작하게 했다.
그렇다고 악마를 닮은 것은 더욱 아니다. 대체 어느 악마의 날개가 저토록 찬란하단 말인가? 창을 타고 넘어오는 달빛만으로도 한없이 반짝이는 검붉은 날개는 밝은 태양 아래에서 조우한다면 눈이 멀어 버릴지도 모른다는 의심마저 들게 했다.
황홀하고 아름답다. 그리고 가여웠다. 해시트는 다른 말로 그를 설명할 수 없었다. 이레이가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하게 된 이 순간에도 여전히, 이해하긴 어렵지만 그가 가엽다.
“이제 알겠군. 그 녀석이 왜 네 눈을 가려 가면서까지 내 정체를 숨겨 주었는지.”
그때 이레이는 뺨을 가로지른 눈물 자국을 닦아 내지 않은 채 그녀를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파란 눈동자가 시리게 파고든다. 그는 마침내 너머의 무언가를 꿰뚫어 본 사람처럼 엷은 미소를 퍼뜨렸다.
“내가 아니라 너를 위해서였어.”
“…….”
“너는 내가 평범한 인간이길 바랐으니까.”
그는 마치 다른 공간에 서서 읊는 듯하다. 지독한 회피가 단절을 불러일으켰다. 이제 해시트는 이레이의 말을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너에게라면 들켜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거기서부터가 나의 잘못이었던 거야. 맞아, 그게 내 실수였다. 네가 진실을 알아도 달라질 게 없다고 믿었던 것이.”
“…….”
“너는 충분히 진실을 알 수 있었어. 내가 주는 실마리를 네가 모조리 외면해 버리지만 않았어도.”
“……아니야. 나는, 라피난이…….”
“그 녀석이 네 눈을 가린 건 사실이지만 마음만 먹으면 벗어날 수 있었잖아?”
뒤늦게 부정해 보려 했지만 이레이는 손쉽게 그녀의 말허리를 잘라 냈다.
“벗어나기 싫었겠지.”
조소 어린 말투와 달리 뺨에는 여전히 눈물이 흐르는 채였다. 그게 분했는지, 그가 문득 고개를 쳐들어 허공을 노려보았다. 순식간에 눈꼬리로 고인 눈물이 후드득 귓불을 스쳤다.
“인간이 아닌 존재를 갈망했다가, 영원히 인간으로 돌아갈 수 없을까 봐.”
“…….”
물기 없이 메마른 해시트의 눈은 순간 철렁 내려앉는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 속수무책으로 정곡을 찔린 사람의 표정이었다. 그녀를 지켜보는 이레이의 턱이 잘게 떨렸다.
정확하다. 피를 나눈 아비를 제 손으로 죽이고도 감히 인간으로서 천수를 누리기를 몰래 소망하던 해시트. 그녀의 모순적인 욕망을 정확히 꿰뚫어 본 남자가 서글퍼하고 있다. 그토록 허황한 욕망 때문에 저를 기만한 해시트를 영영 용서하지 않을 성싶었다.
“대의를 위한다는 말은 결국 핑계였을 뿐이지. 너는 네 영혼이 안식을 얻지 못할까 봐 무서워서, 네 눈앞에 실재하는 나를 부정한 거야.”
단호한 목소리가 그녀의 속내를 발가벗겼다. 지금껏 해시트가 뒤집어쓰고 있던 가면이 기실 위악이 아닌 위선이었음을.
비록 기저에 깔려 있던, 맹세코 그녀조차 눈치채지 못한 무의식이었다 할지라도 다른 누군가가 깔아 둔 것이 아니다. 스스로 숨겨 두지 않았다면 애초에 존재할 수도 없었던 것. 사람들은 그것을 진심이라 불렀다.
“하지만 알고 있나? 해스.”
모르겠지, 절대로. 문득 중얼거린 이레이가 창밖을 내다보았다.
“너는 알고 싶지 않았겠지만…….”
달빛을 정면으로 받은 푸른 눈에 이채가 형형했다. 손을 대면 온몸이 꽁꽁 얼어붙을 듯 싸늘한 눈빛이었다. 그런데 저리 서럽게 울고 있다니? 해시트는 이제 와서 그가 꿈인지 현실인지 아득해졌다.
가만히 이불을 움켜쥐었다. 땀이 밴 손이 축축했다. 이레이의 이야기를 듣기도 전에 그녀는 이미 부정하고 싶었다.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인간이 아닌 나조차도, 피를 나눈 어머니를 죽이는 데는 실패했다.”
거짓말!
기저에 깔려 있던 무지의 진심이 또다시 바닥째 뒤집혔다. 꽈악, 이불을 움켜쥔 손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할 수만 있다면 거짓말 말라며 그의 뺨이라도 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모두 진실이었기 때문이다. 듣는 순간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녀를 자괴감으로 몰아넣고자 아무렇게나 떠들어 대는 거짓말 따위가 아니었다.
“예전에 드래곤 슬레이어나 되어 볼까 하고 그 섬에 찾아갔었지. ‘카렌’에.”
돌이켜 보면 이레이는 매 순간 그녀에게 진실만을 말했다. 해시트가 그의 정체를 알아차리길 기다리는 사람처럼.
“가긴 갔는데, 웅크려 잠들어 있는 노쇠한 흰 드래곤을 봤더니 죄다 귀찮아져서 죽이지 않고 돌아왔을 뿐이야.”
그 노쇠한 드래곤이 그의 어머니였다는 사실만을 비밀에 부쳤을 뿐이다.
해시트의 어깨가 바들거렸다. 그녀는 애써 고개를 내저었다.
“말도 안 돼. 드래곤은 원래…….”
바스러질 것 같은 그녀의 의문에도 분명 근거는 존재했다. 서책, 그 서책에선 다르게 말했다. 드래곤이라는 생명체는 너무나 냉정하여 사랑을 모른다고. 부모 자식 사이에도 결코 예외는 없다고. 그들은 오직 살육과 간계로써 끝나지 않는 생의 무료함을 달랠 뿐이라고.
“한데 어떻게?”
쿵!
그때 하늘이 흔들렸다. 곧이어 번쩍하는 번개가 매섭게 연달았다.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린 해시트가 공포에 질려 창가를 바라보았다. 비는 한 방울도 내리고 있지 않았다. 이 공간에 그녀의 두 눈으로 볼 수 있는 물줄기는 이레이의 눈물밖에 없었다.
“나도 납득하기 힘들었다. 어째서 그 여자를 죽이지 못하는지.”
이레이가 말했다. 허망한 목소리였다. 곧 맥없이 주절거렸다.
“한낱 흥밋거리로 인간 사내를 탐하고, 갓 태어난 나를 인간들 틈에 버리고 떠났는데. 덧없는 목숨이 피고 지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게 만든 그 여자를 어째서 죽일 수 없나……. 내 핏줄에 절반은 인간의 피가 흐르고 있기 때문일까. 그게 아니라면…… 혹시…….”
그는 오래전에 죽어 사라진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것 같기도 했고, 자신을 버리고 떠난 어머니를 지독하게 원망하는 것 같기도 했다. 확실한 것은 생애 유일하게 동질감을 느낀 대상에게 이해받지 못해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해시트는 홀린 듯 침대 밖으로 걸어 나갔다. 자격이 없음을 알면서도 애타는 손짓으로 이레이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도저히 그를 내칠 수가 없었다. 내쳐지지가 않았다.
“이레이.”
다정해진 부름에, 날것으로 서슬 퍼렇던 그의 눈동자로 찰나 차분한 장막이 드리워졌다.
창밖은 여전히 천둥이 쾅쾅 내리치는 중이다. 하얀 번개가 쉬지 않고 번쩍였다. 해시트는 겁에 질린 낯으로 이레이를 올려다보았다. 금방이라도 그녀를 으스러뜨릴 듯 위협적인 검붉은 날개에 시선을 뺏기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잘못되지 않았어. 내가 여자로 태어난 게 잘못이 아니듯이, 너도.”
그러자 모든 것이 멈췄다.
천둥도, 번개도, 이레이의 눈물까지 모두 다. 해시트의 뺨에 다시 달빛을 드리우며 이레이의 날개가 서서히 작아졌다. 그러나 그녀를 내려다보는 이레이의 얼굴이 아직 서러움에 잠겨 있어서 해시트는 금세 초조해졌다. 횡설수설했다.
“네가 인간이 아닌 게 뭐가 어쨌다고. 네가 네 어머니를 죽이려고 찾아갔던 것이 네 종족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야? 그렇게 따지면 내 아바마마께선 나를 세상에서 없애려고 셀 수도 없는 전쟁을 일으켰는데! 그 비겁함 때문에 얼마나 많은 목숨이 무고하게 스러졌는데?”
머리를 쥐어짜고 또 쥐어짰다. 한순간이라도 말을 멈추면 눈앞의 남자가 다시 눈물을 쏟아 낼 것 같았다. 그게 두려웠느냐면, 그래, 솔직히 두려웠다. 천둥이나 번개 따위보다 훨씬 더.
“차라리 아바마마께서 직접 나를 찾아와 검을 휘두르셨다면 기꺼이 맞아 드렸을 거야. 그분께 제 손을 더럽힐 각오가 있었다면 나도 마음 편히 인간으로 살다가 죽었을 거라고……. 하지만, 하지만 너는……. 맞아, 네 말대로 넌 나보다 더 인간답군. 너는 그저 사슴과 말도 구분 못 하는 바보 천치고, 창문으로 남의 방에 드나드는 무뢰한이고……, 제 주제도 몰라서 아무한테나 시비 거는 멍청이에다가…… 또…….”
해시트가 질끈 눈을 감았다 떴다.
“몰라, 네가 잘못한 게 많을지는 몰라도 잘못되진 않았단 말이다. 잘못된 건 네가 아니라……!”
잘못된 건 네가 아니라, 그다음이 턱 목에 걸렸다. 그 자리에 뭘 두어야 할지 갑자기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덜컥 굳어 버린 그녀에게 불현듯 이레이가 손을 뻗었다.
“해스.”
그새 말투가 무르녹아 있었다. 표정과 눈빛도 한결 유순해졌다. 바라던 대로 이루어졌는데도 해시트는 전혀 기뻐하지 않았다. 계속 침묵한 채 입술만을 바르르 떨 따름이다. 이레이의 옷깃을 부여잡은 손에는 삽시간에 힘이 빠져나갔다.
네가 잘못되진 않았다, 그 말은 해시트의 진심이었다. 다만.
잘못된 건 네가 아니라, 그다음에 놓아야 하는 말이 결국엔 하나뿐임을 깨닫고 말았다.
“미안해.”
심하게 비틀거리며 해시트가 뒤로 물러섰다. 그녀의 뺨에 닿으려던 이레이의 손이 허무하게 거리를 벌렸다. 그녀가 말했다.
“잘못된 건 나야.”
그리고 이미 딛고 있는 땅이 무너져 내린 남자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남은 진심을 모조리 쥐어짜 냈다.
“나는 네가 인간이었어도 너를 버렸을 거다. 버려야만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