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놀다 가라.”
이레이가 몸을 일으켰다. 놀란 사람은 쥰뿐이었다.
“대장님은요?”
“바빠. 애들 훈련 봐줘야 해.”
“그래도 오늘은…….”
“아 참, 나 이제 네 대장 아니다. 호봉으로는 네가 상사야.”
“…….”
“승진 축하한다.”
여느 때와 같은 무던한 표정과 말투로 축하해 주고는 곧장 연회장을 빠져나간다. 어떻게 보아도 아쉬움 따위는 느껴지지 않는 뒷모습에서 왜인지 쥰은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멍하니 중얼거렸다.
“내가 착각했나.”
그래. 그녀의 착각이었을 수도 있다. 정말로.
아무리 봐도 아닌 것 같지만, 사실은 아닌 게 아니었을 수도 있지…….
*
연회가 이어지는 열흘 내내 이레이는 다시는 연회장에 얼굴을 비치지 않았다.
대신 그는 평소와 다름없이 태만하면서도 꼼꼼한 태도로 소대 훈련을 맡았고, 하루도 빠짐없이 카일 재상의 집무실로 연쇄 살인 사건 보고서를 올렸다. 이따금 혼자 사냥을 나가 늑대니 호랑이를 잡아 오기도 했다.
닷새가 지났을 때, 재상 집무실에서 수사의 종결을 알려 왔다. ‘국가적 경사를 앞두고 슬픈 과거를 묻겠다’는 이유였다. 그때도 이레이는 평소처럼 시큰둥한 표정으로 한쪽 눈썹만 슬쩍 까딱이고 말았다.
“잘 생각했어. 아무렴 앞일이 더 중요하지.”
일부러 시비를 걸 때를 제외하면 매사 크게 기뻐하거나 슬퍼하는 일 없는 그다운 반응이었다. 마침 남은 짐을 챙기러 백인 소대에 들렀던 쥰은 우연히 그 광경을 목격하고 나서야 마음에 희미하게 남아 있던 찜찜함을 씻겨 보냈다. 말끔하게. 그러고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
“역시 내 착각이었구나.”
*
그럴 리가.
달빛에 젖은 해시트의 뺨을 내려다보다가 이레이는 느지막이 입술을 뗐다.
“매일 밤 녀석을 죽이러 그의 집에 찾아갔었지.”
오늘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그의 허리춤에서 검집이 절그럭거렸다. 하지만 피비린내는 나지 않는다. 오늘도.
“그렇게 매일 빈손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가 천천히 침대 한구석에 걸터앉았다. 좁혀진 거리만큼 목소리가 작아진다. 이젠 거의 속삭임이 됐다.
“그 녀석은 내가 자길 죽이지 못할 걸 알았던 거야.”
억울함보다는 허탈함이, 허탈함보다는 슬픔이 허공을 맴돌았다. 이윽고 그가 두 손으로 메마른 얼굴을 쓸어 올리자 손가락 사이사이로 가느다란 한숨이 흘러나왔다.
“안 자는 거 알아, 해스.”
“…….”
“편지는 잘 읽었다.”
해시트는 결국 눈을 떴다.
누운 그녀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빛이 싫어서 바로 일어나 앉았다. 사실은 언제쯤 올까 기다리고 있었다. 하루 만에 달려와 억지 고집을 부릴 줄 알았는데 이틀이 지나고 사흘이 지나도 감감무소식이길래. 시간이 지날수록 초조해진 마음은 그녀의 밤에서 잠을 앗아 갔다. 눈을 감았다 뜨면 혹시 라피난의 목이 머리맡에 놓여 있을까 봐 두려움이 사라지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라피난의 말이 맞았던 셈이다. 그는 끝내 친구를 죽이지 못했다. 그래서 결혼식을 하루 앞둔 오늘에야 겨우 해시트를 찾아왔다고 한다.
“떠날 거냐?”
해시트가 물었다. 불필요한 다른 언사를 앞세우지 않는 것이 이 순간 그녀가 그에게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배려였다. 어떤 다정한 안부도 지금은 그저 못된 욕심일 터다. 해시트의 눈은 그저 함초롬해져 그를 향했다.
그러나 흑단같이 검은 머리카락이 핏기 없이 창백한 안색을 고스란히 들통 냈다. 꾹 다문 입술에 이로 깨문 자국이 남아 있었다. 엉망이었다. 또 며칠을 못 자고 못 먹었다고 시위하는 것처럼, 바짝 야윈 몰골을 이레이가 안쓰러워할 수밖에 없게끔 만드는 자신이 싫었다.
진심이다. 해시트는 자신이 싫었다. 금방 들통나고 말 거짓말로 이레이를 기만해야 할 때면.
그리고 이레이는 그런 그녀를 좋아했다.
저 말로는 생전 감기 한 번 걸린 적 없는 강골이라고, 누누이 강조하는 데는 기실 찔리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해시트는 연약했다. 애초에 그렇게 태어났다. 단단히 붙잡고 조금만 힘을 준다면 누구나 쉽게 부러뜨릴 수 있었다. 그래도 매번 부러지는 쪽을 선택할 그 여자가 이레이는 무척 좋았다.
휘어지느니 댕강 꺾어지고, 남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열심히 꺾인 자리를 이어 붙이는 사람.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면 도통 답답한 짓이 아니다. 도대체 왜 저러고 사나 싶었지. 그걸 왜 계속 지켜보게 되는지 스스로 의아할 때도 많았다. 그래서 이 마음에 아직 이름을 붙이지 못한 건 이레이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지금은 알 것 같다.
결코 원하는 대답을 듣지 못하리란 걸 알면서도, 또다시 묻게 되는 이유를. 이 미련의 이름은.
“내가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나?”
그러자 핏기 없는 해시트의 입술이 더 단단히 다물렸다. 소리 없이 달싹이는 틈도 내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고민하고 있지 않았다. 단지 단어를 고를 뿐이었다.
그런데도 이레이는 멋대로 부푸는 기대를 꺼뜨리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다. 어느 것도 쉽지 않았다. 이제야 슬며시 벌어지는 입술에 당장 입술을 부딪치고 싶다.
“원래 추억엔 형체가 없잖아.”
“…….”
“그러니 반드시 손에 잡히지 않아도 괜찮다.”
쉽지 않았다, 정말이지.
이레이가 억지웃음을 뒤틀었다.
“후회할 거면서.”
“아닐 수도 있지.”
“무슨 수로?”
결국 그녀에게 달려든 그가 거칠게 손목을 잡아챘다. 실낱같은 희망도 못 찾고 낙담한 주제에 어째서 초연한 척을 하느냐고, 억지로 턱을 들게 해 눈을 맞추니 뜻밖에 떨리지 않는 눈동자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금색 유리체가 달빛을 받아 고요하게 반짝인다. 물기에 젖은 일렁임은 없었다. 내뱉는 숨소리조차 고요했다.
“어떻게든.”
“…….”
반듯하게 일자를 그리고 있는 입매도, 규칙적으로 오르내리는 흉곽의 형태도 차분했다. 그가 움켜쥔 손목에서 밋밋한 맥박이 넘어온다. 무엇도 수선스럽지 않았다. 불과 열흘 전 그에게 애끓는 연서를 보낸 당사자라고는 도무지 믿기 어려웠다. 차라리 둘 중 하나가 환상이라면 믿길 것이다.
환상.
불현듯 그는 제 입으로 뱉었던 말을 떠올렸다.
“원래 인간은 바라는 대로 세상을 보고 원하는 대로 환상을 좇는다.”
어쩌면 그도 환상을 좇아 여기까지 왔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시울이 점점 무거웠다.
“하지만 지금은 나를 원하잖아.”
“그래서?”
구차한 그의 질문에 해시트는 찰나의 망설임조차 없이 대꾸했다. 여전히 긍정도 부정도 아닌 묘한 말투였다. 곧장 그녀를 다그치는 이레이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빨랐다.
“가뭄에 내리는 단비처럼 나를 갈망하고, 하루에도 수십 번씩 나를 만나기 전으로 돌아가길 소망하지만 사실은 돌아가고 싶지 않잖아.”
“그래서.”
“너는 이 순간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라고 있어. 이 순간만 버티면 다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나를 대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내가 그렇게 해 줄까 봐!”
“그래.”
“…….”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맥 빠지도록 허무한 수긍 뒤에 냉정한 반문이 잇따랐다. 그까짓 게 뭐 중요하겠냐고, 짐은 황제인데. 물끄러미 그를 올려다보는 눈이 질문을 대신한다. 해시트의 손목을 쥔 이레이의 손에 조금씩 힘이 빠져나갔다. 그가 이를 악물었다.
“말해. 네가 누리고 있는 권력을 전부 팽개치고 나와 멀리 떠나고 싶다고.”
“…….”
“짊어진 책무 같은 거 다 찢어 버리고, 단지 나와 함께하고 싶다고.”
“…….”
“어서…….”
떨리는 그의 목소리를 듣고도 해시트는 대답하는 시늉도 안 해 줬다. 별안간 그녀의 손목에 닿은 이레이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작게 중얼거렸을 뿐이다.
“이레이. 네 손도 뜨거워질 때가 있구나.”
겨우 그게 뭐라고, 이레이는 화들짝 놀라 자신의 손을 떼어 냈다. 왜 그랬는지 알 수 없었다. 멀찍이 떨어져 나오고 나서야 열이 풀풀 나는 제 손이 창피해서 그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해시트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새 자유로워진 두 손을 가지런히 무릎으로 모은 자세가 우아했다.
“그래. 맞아. 너를 특별하게 여긴다. 나는 남녀 간의 애정이 무엇인지 배운 적 없지만, 아마도 이게 그런 것이겠지.”
고작 한마디로써 모든 것을 정의해 버린다.
해시트의 욕심과 이레이의 미련을, 이레이가 그녀에게 억지를 부리는 이유와 해시트가 번번이 그를 기만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그 감정에 알맞은 이름을 붙여 주고자 간절히 찾아 헤매던 나날이 문득 허무해진다. 기쁘지 않았다. 해시트도 그래 보였다. 그녀는 더럭 언성을 높여 그에게 화를 냈다.
“하지만 그게 세상을 바꿔 주기라도 하나? 짐의 백성들에게 홍복을 가져다주기라도 해?”
드디어 이레이도 지독한 분노에 찼다. 그가 목소리를 짓씹었다.
“그렇게 세상을 바꾸고 싶었나? 그럼 내가 바꿔 줄게. 대신 나를 선택해.”
“쉽게 말하지 마라.”
“허풍 떠는 거 아니야. 약속하지. 네가 살아 있는 동안 하늘과 땅이 뒤바뀐 세상을 만날 수 있게 해 주겠다. 하지만 그 세상을 굳이 네가 통치할 필요는 없잖아? 넌 그저 평범한 인간인데.”
“그 입 닥치지 못해?”
해시트의 눈빛이 한결 표독스러워졌다. 그에 저절로 이죽거리게 되는 자신을 느끼며, 이레이는 차라리 이것이 그들 사이에 놓인 감정의 본질이 아닐까 의심했다. 나를 위해 너를 버려 달라고 서로에게 악을 쓰는 행태다. 그가 비아냥거렸다.
“왜. 뭐가 문제야. 네가 평생 쫓아가도 못 이룰 꿈을 내가 이뤄 주겠다는데 도대체 뭐가 불만인데!”
“내 나라니까!”
버럭, 해시트가 소리쳤다. 어느덧 완연한 호통이었다.
“…….”
순간 말문이 막혀 버린 이레이가 멍하니 그녀를 쳐다보기만 하는데, 해시트는 험악하게 이지러뜨린 표정을 풀지도 않고 그대로 덧붙였다.
“그건 짐이 해야 할 일이다. 네가 참견할 자격은 없어.”
“……참견하지 말라?”
갈라진 입술 틈으로 알아듣지 못할 만큼 작은 웅얼거림이 번졌다. 그것을 기점으로 방 안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말없이 시선으로만 서로를 훑는다.
그러나 증오심에 차 노려보거나 서러워 원망하는 눈빛은 아니었다. 절반쯤은 방관하듯이 서로의 행동을 기다리는 중이다. 먼저 백기를 든 쪽은 또다시 이레이였다.
별수 없었다. 애당초 상대에게 들을 대답이 있는 쪽이 질 수밖에 없는 승부였으니까.
“해스, 그래서 너는 단 한 번이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