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친애하는 이레이 경에게.
여름이오. 이 계절의 낮은 너무 길고 반대로 밤은 짧아 꿈꿀 시간이 조금 모자란 것 같아.
그래서일까 내 시간은 아직 낮에 머물러 있군. 이 편지를 읽고 있는 그대의 시간이 낮일지 밤일지 나로서는 알 수 없지만, 그대가 간밤에 꾼 꿈만은 다정했다면 좋겠소.
친애하는 이레이 경. 미리 밝혀 두지만 나는 오랫동안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아 왔고, 그 결과 문자로 욕설을 쓴다거나 품위에 어긋나는 글귀를 적는 건 처음부터 불가능한 사람이오.
살면서 보내 본 편지라고는 아바마마와 어마마마께 안부를 여쭙거나, 동맹국으로 친서를 보내거나, 적장에게 으름장을 놓을 때가 전부였거든. 그러니 대충 이해하게. 내 딴엔 적국을 향한 경고문의 논조만큼은 되도록 사용하지 않으려고 해.
그대는 이 편지를 비웃을 수도 있고, 어쩌면 내 평소 말투와 다르다며 의아해할 수도 있겠지. 혹시 내가 아직도 사내 흉내를 낸다고 생각한다면…… 그래도 별 도리는 없군. 원래 글로 익힌 습관이 아주 무서운 법이라서 말이야. 억지로 거스르는 것이 오히려 내 망설임을 늘게 할 테니 그냥 이대로 펜을 놀리겠네.
그러니까, 내 기억엔 그대가 나에게 질문을 했던 것 같은데. 이 몸에게 그대의 의미가 무엇이냐고……. 맞나?
여전히 그 답이 궁금하다면 대답을 해 주고 싶어.
그 전에 친애하는 이레이 경. 솔직히 나는 그런 것을 굳이 헤아려야 하는지, 이름 붙여야 하는지, 남들에게 설명해야 하는지, 나아가 스스로 깨달아야 하는지를 잘 모르겠어.
나는 단지 한겨울에 뽀얀 입김조차 흐르지 않는 당신의 차가운 숨결이 조금 신기할 뿐이고, 기척 없이 지척으로 다가와서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약간은 간지러울 뿐이고, 그대의 눈을 바라본 채 세 번 숨을 쉬면 꼭 바다에서 헤엄치는 기분이 들어서, 또 생각해 보면 이 하늘 아래 내 이름을 불러 주는 사람은 당신뿐이기도 하고.
그래, 결국엔 그런 것들이지.
그런데도 굳이 의미와 이름을 붙여야 한다면 글쎄, 이게 바로 그대가 그토록 바라던 ‘추억’이 아닐까 생각해 보곤 한다.
내 남은 생에 누군가 나에게 가장 즐거웠던 날을 묻는다면 나는 분명 그대와 함께 들판에 드러누워 올려다보았던 밤하늘을 떠올릴 것이고, 가장 아쉬웠던 날을 묻는다면 그대와 한 말을 타고 달렸던 오솔길을 기억할 것이고, 가장 나 자신을 주체하지 못했던 날을 묻는다면 그대에게 탈옥을 권하던 순간을 민망해할 것이며, 가장 기쁨에 찬 날을 묻는다면 그대가 아흔아홉 대의 매질을 당하고도 죽지 않아서 내 곁에 남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날의 경망스런 주책을 혼자서 곱씹을 것이오.
알고 있나? 나는 생각보다 많은 처음을 그대와 함께했어.
보나 마나 그대는 깊이 여기지 않았을 것들, 나는 이상하게도 그런 것들을 번번이 기억하게 되더군. 전부 다 처음이어서…….
아마 내가 그대와 함께 바다까지 달려 끝내 일출을 구경하고 돌아왔더라면, 그것은 내 인생의 가장 첫 번째 일출이 되었겠지. 아쉽지만 후회하지는 않아. 진심이야.
그래서, 친애하는 이레이 경.
나는 앞으로도 나의 첫 번째 일출만큼은 만들지 않을 생각이라오. 영원히.
그대에게 내 선택을 이해해 달라거나 존중해 달라거나, 가능하다면 이기적으로 울며 떼를 쓰고 싶지만 그러지 않겠어. 어차피 이건 나의 선택이고 후회도 오롯이 나의 몫이어야만 하니까.
미안하지만 미안하다는 말도 하지 않으리다. 그대에게 내 사과의 짐을 얹어 주고 싶지 않아.
그래도 구차하게 한마디를 얹자면 언젠가, 다시 쓸쓸한 사람이 된 내가 최선을 다해 바꿔 놓을 세상을 단 한 번이라도 돌아봐 준다면 좋겠어.
머리가 붉고 눈이 새파란 남자를 떠돌이라고 부르지 않는 세상. 그런 세상이 오면 당신도 조금은 더 행복해질까? 단지 그러기를 바랄 뿐.
그럼 이만 줄이겠어. 긴 편지 읽어 주어 고마웠소.
안녕, 친애하는 이레이 경.
부디 그대의 진실한 평화를 바라며.
당신의 추억, 해시트가.
#2. 두 번째 천둥
“황제 폐하 납십니다!”
해시트는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한 흰옷을 좋아했다. 그마저도 숨통이 죄는 건 지긋지긋해 대부분 헐렁하게 떨어져 내리는 실크 드레스를 즐겼다. 아름다운 것을 더 아름답게 갈고닦길 좋아하는 몇몇 시종들에겐 가히 통탄의 눈물을 흘릴 만한 비극이었다.
“폐하. 혼인을 축하드립니다.”
“공국에서 왔나?”
“예. 대공 전하의 축서를 가지고 먼저 도착했습니다.”
“여러 번 발걸음하느라 그대가 고생이 많구나. 대공은 건강하신가?”
“예. 본국에서 기우제를 치르고 곧바로 출발하실 겁니다. 혼례식 전에는 도착하실 테니 너그러이 이해해 주십시오.”
음악이 흐르는 연회장에서 흰 드레스를 입은 사람은 당연히 해시트뿐이었다. 형형색색의 화려한 복장으로 둘러싸인 곳에서 자칫 빛을 잃을라, 섬세하게 세공된 청금석으로 온몸을 휘감고 있었지만 기실 번쩍이는 푸른 보석이 아닌 들꽃으로 엮은 화관을 뒤집어썼대도 이 자리에 있는 누구보다 빛났을 것이다.
해시트는 공국 사절이 내민 축서와 선물 상자를 수행원에게 손짓으로 넘기고 말했다.
“공국에 가뭄이 심하다던데 어느 정도냐.”
“말씀드리기 송구하오나……, 심한 지역은 마실 물은커녕 초원의 들풀조차 전부 말라비틀어졌습니다. 연약한 아이들이 가장 먼저 쓰러지고 있으니 나랏일 하는 사람으로서 고개를 들 수가 없군요.”
“짐의 마음도 안 좋군. 재상, 우리 제국에서 도울 방법은 없겠나?”
해시트의 옆을 지키고 있던 라피난이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마침 남부 지방에 풍년이 들어 남은 농작물이 처치 곤란입니다. 여름철이라 장시간 이동이 쉽지 않겠지만, 일부 과일 종류와 밀 정도는 썩기 전에 공국으로 이송이 가능할 겁니다. 기왕 사절단을 보내는 김에 우리 측 수로 전문가를 파견 보내는 건 어떠십니까? 가뭄은 매해 찾아오는 것이니, 이번 기회에 원인을 파악하고 수로를 재정비한다면 도움이 될지 모릅니다.”
“그렇게 하지. 물론 대공께서 허락하신다면 말이야.”
해시트가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공국에서 온 사절은 진작 바닥에 엎드려 큰절을 연달아 하고 있었다.
“폐하! 이 은혜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오냐. 이 몸은 지나갈 거니까 적당히 하고 일어나라.”
곧 이마라도 쿵쿵 찧을 기세다. 해시트는 도무지 적응되지 않는 감동의 현장에서 벗어나기 위해 라피난의 팔꿈치를 잡아당겼다. 라피난은 그녀에게 순순히 끌려가 주면서도 넌지시 잔소리를 둘렀다.
“이런 건 좀 즐기시지 않고요.”
“싫어. 닭살 돋는단 말이야.”
“어쨌든 앞으로 공국과의 무역 상황이 나아지겠군요.”
“흠, 그런데 저 나라에 비단 말고 우리가 또 필요한 게 있나?”
“보석 세공 분야에서도 따라올 나라가 없으니까요. 지금 폐하께서 온몸에 두르고 계신 라피스 라줄리도 모두 공국 출신 기술자가 세공한 것입니다.”
“아, 라피스 라줄리는 너무 무거워서 별론데…….”
“그런 취향은 결혼반지에 박을 보석을 라피스 라줄리로 결정하기 전에 말씀해 주셨다면 좋았을 텐데요.”
라피난이 제 손가락에 끼운 푸른 반지를 내보이며 농담했다. 그의 웃음기라곤 없는 딱딱한 말투를 용케 농담으로 알아듣고 실소하는 이는 오직 해시트뿐이었다.
기껏 공국 사절을 피해 자리를 뜬 보람이 없었다. 두 사람이 지나가는 곳마다 사람들의 칭송이 길게 이어졌다.
“과연 성군이십니다.”
“희대의 현군이시고말고요.”
“현명한 두 분께서 만나셨으니 제국의 태평성대는 이미 찾아온 것이나 다름없군요.”
“이 세상에 두 분보다 더 잘 어울리는 한 쌍은 없을 겁니다.”
아름다운 황제의 곁을 지켜 온 충신 중의 충신, 카일 가문의 장자, 그의 이름이 해시트의 새로운 남편감으로 공표된 순간부터 모두가 같은 감탄을 반복하는 중이었다. 아아, 내 이럴 줄 알았지. 두 분께서 너무 오래 한 몸처럼 붙어 지내시다 보니 미처 사랑인 줄 모르셨던 거야…….
그럴듯했다. 라피난은 해시트가 황태자였던 시절부터 그녀의 성별을 알고도 충심으로 보필해 온 신하였으니까. 문무 모두에 출중하며 위세 높은 카일 가문의 장자이기도 했다.
혹자는 그처럼 완벽한 결혼 상대를 코앞에 두고도 여태 다른 남편감을 찾느라 네 명의 목숨을 스러지게 했다며 우스갯소리를 지껄였다.
물론 해시트의 성별을 알고도 곁에 머물렀던 이가 비단 라피난 혼자만은 아니었으나, 어디서 굴러먹다 왔을지 모를 떠돌이 용병 출신 빨간 머리를 이런 경사스러운 화두에 올리는 멍청이는 없었다. 비록 모두가 그 떠돌이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고는 해도.
이레이 린.
지난 삼 년간 전장에서 가장 많은 공을 세운 동시에 가장 많은 목숨을 앗아 간 영웅이자 악귀의 이름이다. 저잣거리 젊은이들에겐 영웅으로 추앙받았고 적국과 권세가들에겐 악귀 취급을 받았으며 때로 존경의 대상이 되기도, 출신을 들먹여 멸시당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그자는 모두가 즐겁게 먹고 마셔 대는 연회장에서도 홀로 말없이 술만 들이켰다. 출입문이 활짝 열리고 해시트와 라피난이 등장하기 전까지.
두 사람의 등장을 알리는 문지기의 외침이 울려 퍼진 순간에야 처음으로 출입문으로 고개를 돌렸더랬다. 그의 눈에 비친 광경이 환상이 아님을 확인하기라도 하듯이, 눈꺼풀을 깜빡이지도 않고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레이 대장님.”
불현듯 머리 아래에서 울려 퍼지는 부름에 비스듬히 시선을 내리쬔다. 언제 왔는지 쥰이 어색한 무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레이는 평소보다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뭐야.
“너는 황제 근위대장이라는 놈이 왜 여기 있어.”
“재상님이 옆에 계신 동안은 필요 없다고 하셔서요.”
“하긴 그건 그렇겠군.”
피식 웃는다. 뭔가를 곱씹는 눈빛이더니 금세 시선은 두 사람, 아니, 해시트를 좇고 있었다.
어쩌면 그들은 눈이 마주쳤을지도 모른다. 엷은 미소를 지은 해시트가 걸음을 옮기다 말고 멈칫 어깨를 굳힌 순간에. 그리고 언제 그랬냐는 양 또다시 앞으로 나아갔을 때, 그때는 이레이도 더 미적거리지 않고 술잔을 내려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