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해시트는 ‘그렇게 과거에 살고 싶다면 오냐, 애꾸눈인 채로 시간 여행을 보내 주마’하며 가까이 있던 꽃병을 그의 머리통으로 집어 던졌는데 그 결과는 다소 폭력적인 효과음의 연속이었다.
와장창! 그리고 콸콸. 아이고, 저 피를 어째? 당장 의원을 불러와라! 그런데 벌써 죽은 것 아니오? 곡소리도 만만치 않았다.
결과적으로 면접 일정은 무사히 잡혔으나 공명정대한 심사를 위하여 해시트의 참관이 금지된 바이다. 그녀가 현장에서 눈을 부라리고 있으면 대신들이 벌벌 떠느라 정직한 채점을 할 수 없다나. 참으로 기백 없는 놈들이 아닐 수 없었다.
어차피 여기서부터는 오롯이 쥰이 해내야 할 일이었다. 해시트도 여느 때처럼 자신이 할 일을 하면서 무투회 결과를 기다리기로 했다.
업무에 열중하느라 늦은 점심을 먹고, 소화를 시킬 겸 후원을 산책하는 것도 평범한 일과의 일환이었다. 오늘은 거기에 쥰의 낭랑한 외침이 변주곡으로 더해졌다.
“폐하!”
멀리서부터 양팔을 마구 흔들며 달려오는 앳된 얼굴이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폐하, 폐하, 폐하!
“저 통과했습니다!”
목청이 어쩜 저렇게 우렁차단 말인가. 해시트는 슬쩍 귀를 매만지며 화답해 주었다.
“으응, 잘했다. 잘했는데……. 너 얼굴에 피 흐르는 건 아니?”
“아아, 이거요.”
쥰은 너무 흥분한 나머지 허옇게 질린 해시트의 안색을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이까짓 거 별것 아니라는 듯, 철철 흐르는 핏물을 옷소매로 슥슥 닦아 내더니 마저 대답했다.
“무투회 결승 상대가 호랑이였거든요!”
“뭐?”
“발톱에 머리를 살짝 긁혔지 뭐예요. 이빨이 아니라서 다행이었죠. 하하하!”
“이런 치사한 놈들이 떨어뜨리려고 작당을 해도 꼭…….”
“예?”
“아, 아니다. 그래서 네가 호랑이를 이긴 거냐?”
“네.”
쥰이 반듯하게 외쳤다.
“가죽이 상할까 봐, 목구멍으로 칼을 쑤셔 넣어서 심장을 찔러 죽였어요.”
“…….”
“휴, 검이 조금만 짧았어도 밖에서 찔러야 했을 거예요.”
조만간 호랑이 가죽으로 만든 양탄자가 하나 생길 성싶다.
해시트는 양탄자가 진상되는 즉시 쥰에게 하사하리라 마음먹었다. 호랑이 줄무늬는 그녀의 심미안에 정말이지 들어맞지 않았다. 굳이 쥰의 취향을 확인하는 대신에 그녀는 화제를 바꿔 버렸다.
“출근은 내일부터냐?”
“예. 오늘은 소대에 돌아가서 개인 물품을 챙겨 와야 합니다.”
“그래…….”
정작 벼르던 본론은 이다음이다. 그러나 의미 없이 말끝만 늘이던 해시트가 이윽고 품 안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그럼 이따가 이걸 좀, 너희 대장 처소에 놓고 오려무나.”
“예?”
“다른 사람은 모르게.”
스윽, 녹색 편지 봉투가 품 안에서 빠져나왔다.
봉투를 받아 든 쥰이 머뭇거리며 해시트를 바라보았다.
“이건…….”
궁금증이 여실히 담긴 눈빛이었다. 하지만 해시트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감히 못 한 것이리라.
종이로 만든 봉투는 입구를 밀랍으로 간단히 봉했을 뿐 특별한 장식이라곤 없었다. 은밀하지도 화려하지도 않다. 그저 투박한 모양새에 비해 지나치게 질 좋은 녹색만을 뽐낼 뿐이었다. 황제의 밀지, 혹은 공인된 전언이라기엔 어느 쪽이든 석연찮았다.
끝내 영원히 묻지 않겠다는 듯 조용히 입술을 감쳐무는 쥰의 행동에 해시트는 조용히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너만 알고 있어라. 쥰.”
그냥, 이대로 두면 쥰이 괜한 오해에 빠져 있을 것 같아서.
그저 해시트가 무작정 털어놓고 싶었던 것만은 아니다. 꼭 그런 것만은, 절대…….
“내일 나는 새로운 남편감을 발표할 거란다.”
“아…….”
쥰의 고개가 천천히 아래로 떨어졌다. 푹 고꾸라지고도 한발 늦게야 주억거리는 품새가 어쩐지 시무룩했다. 그래도 해시트가 내민 봉투를 소중히 챙겨서 품으로 챙겨 넣었다. 행여 구겨질라, 아주 조심스럽게.
분명 쥰 데이티니스라면 해시트의 진심을 본래 모습 그대로 이레이 린에게 전달해 줄 것이다.
*
지난 몇 년간 이레이는 본의 아니게 쉴 틈이 없었다.
연이어지는 전쟁 때문에 과장 조금 보태면 군장을 푼 날보다 멘 날이 더 많았다. 백인 소대의 대장이라는 몸에 맞지도 않는 감투를 내내 뒤집어쓰고 있었더니 몸도 마음도 배로 피곤했다.
와중에 전쟁터에 나가서는 반푼이처럼 몸을 사려야 했다. 해시트와 라피난이 그가 필요 이상으로 눈길을 끄는 걸 싫어했기 때문이다. 기껏 전쟁터까지 따라가 놓고 마음껏 날뛰지도 못한 날이 태반이라, 솔직히 이레이의 입장에선 거의 고문이나 다름없는 처사였다.
그나마 해시트의 즉위 이후엔 껍데기뿐이던 전쟁 소식이 멈췄다. 드디어 느긋한 팔자로구나, 내심 좋아했는데 웬걸, 전쟁이 아니어도 군인은 할 일이 몹시 많다는 깨달음에만 이르렀다. 심지어 소대의 대장은 잡일이 이만저만이 아니더라.
가장 큰 고충을 꼽자면 매일 여섯 시간씩 소대원들의 훈련을 감독하는 업무였다. 사실 다 필요 없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최악이었다. 도대체 이 나라는 맨손으로 절벽도 제대로 못 타는 놈들을 훈련해서 얻다 쓰려는 것인가. 그 절벽 아래에 용암이 흐르고 말고는 이레이가 신경 쓸 바 아니었다.
일개 백인 소대의 대장이 이러할진대, 과연 제국의 황제는 들숨과 날숨조차 제 맘처럼 쉽지 않으리라. 이레이는 바쁜 틈틈이 해시트를 생각하곤 했다.
오늘은 쥰의 퇴소 문제로 이러쿵저러쿵 참견할 일이 더 많았던 날이다.
쪼끄만 게 먹다 남은 과자를 챙겨 가려고 하기에 너 그거 들고 황제궁에 들어서는 순간 독살 모의 용의자로 취급받을 거라 일러 주는 등등. 하여간에 쥰 데이티니스 그놈은 똑 떨어지는 단발머리와는 달리 실상 전혀 야무지지 못해서 속 편하게 관망하기가 힘들었다. 저렇게 촐싹대다 꾀꼬닥 비명횡사하면 해시트가 좀 서글퍼하리라.
결국 평소보다 훨씬 늦게 퇴근해 집으로 돌아왔음이다. 이레이가 현관문을 당길 무렵엔 땅거미조차 완전히 가물어진 까만 밤이었다.
툭.
출입문 사이에 끼워져 있던 편지 봉투가 바닥으로 낙하했다.
“…….”
이레이는 문고리를 놓고 허리를 굽혔다. 떨어진 봉투를 주워 들었다. 녹색 봉투에 붉은 밀랍의 대비가 워낙 선명해서 어둠 속에서도 알아볼 수 있었다.
발신인은 적혀 있지 않았으나 누가 보냈는지야 빤했다. 편지를 봉한 밀랍 한가운데에는 언젠가 해시트의 어깨 너머로 보았던 황가의 문양이 찍혀 있었다.
“쥰 녀석이 놓고 간 것 같은데…….”
심부름꾼도 대충 짐작이 간다. 그러나 벌써 황제궁으로 떠난 놈이라 당장 추궁할 방법이 없었다. 물론 정말 방법이 없는 건 아니고 귀찮았을 뿐이지만, 그는 편지 봉투를 이리저리 뒤집어 보면서 집 안으로 들어갔다.
끼이익……, 쿵.
출입문 닫히는 소리가 다시는 열리지 않을 듯 굳건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에겐 늦은 밤이라고 해서 집에 들어오자마자 불을 밝히는 습관 따위는 없었다.
대충 어둠 속에서 옷을 갈아입은 뒤 욕실에 목욕물을 받아 두고 나서야 거실로 돌아와서 느지막이 램프에 기름을 붓곤 했다. 욕조를 채우는 물소리를 들으며 술을 한잔할 때도 있었다. 아예 병째로 기울이다가 욕실까지 들고 들어갈 때도 많았다.
그러나 오늘은 옷을 갈아입으면서도 몇 번이나 책상을 힐끔거렸다.
결국 가운에 팔을 꿰다 말고 책상 램프부터 밝히고 말았다. 치익. 화약 냄새가 짧게 스치고, 램프 속 불빛이 아롱대며 차츰 크기를 키워 갔다. 그것이 어느 정도 방 안을 비출 밝기로 자라자 이레이는 잽싸게 가운의 앞섶을 여미고 편지로 손을 뻗었다.
실내로 들어서자마자 던져두었던 녹색 편지 봉투가 고스란히 그의 손아귀로 돌아갔다.
그는 소파로 갈 생각조차 하지 않고 책상 의자에 걸터앉았다. 다소 초각한 태도에 비해 밀랍을 뜯는 손길은 제법 섬세했다. 이 편지를 보낸 이와 관련된 것이라면 무엇도 함부로 망가뜨릴 수 없는 그의 무의식의 표출이었다. 첫 줄을 읽자마자 설핏 실소를 터뜨린 것 또한.
[친애하는 이레이 경에게]
문득 숨이 떨린다. 그는 꾹 다문 입술 위를 손끝으로 문질렀다.
“나한텐 말도 없이 그랬단 말이지.”
기왕이면 이 순간을 아주 천천히 즐기고 싶었다.
하지만 다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손짓 한 번에 전장의 적군을 모조리 가루로 만들 능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하여 일일이 한 놈씩 베어 죽이던 그가, 편지지 한 면에 빼곡히 담긴 검은 줄글을 한 글자 한 글자 되뇌며 읽어 내리기를 힘들어했다.
결코 짧지 않은 편지였음에도 이레이는 너무 빠르게 읽고 말았다. 거의 순식간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다 읽은 뒤에 곱씹은 시간이 턱없이 길었다.
답장을 써야 할까 고민한 시간은 더욱 길었고, 실제로 펜을 들기까지는 천 년 같은 망설임을 거쳤다. 그러고도 펜촉에 적신 잉크가 바짝 말라 무용지물이 되는 과정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그래도 답장을 쓰긴 했다. 다행히 아침이 밝기 전에 그의 편지도 마침표를 찍었다. 그러나 고작 마침표만 찍었다. 이제 이것을 어떻게 건네줘야 할지 고뇌할 차례였다. 심장이 갓 태어난 것처럼 어설프게 박동했다. 갑자기 그를 둘러싼 모든 공기가 낯설게 다가왔다.
어느새 창문에 새벽 어스름이 걸쳤다.
머잖아 동트는 붉은 빛이 성 구석구석에 내리쬐고, 마침내 새하얀 아침이 밝아 오자 높은 곳에서 나팔수들이 일제히 나팔을 분다. 축제의 시작을 알리는 삼화음이었다.
불현듯,
이레이는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서러움을 느꼈다.
“…….”
그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창문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커튼을 걷어 내기도 전에 알았다. 그의 아름다운 황제께서 새 남편감을 결정했다는 사실을.
오직 그 여자의 결혼을 알리기 위해서, 이토록 이른 아침부터 우렁찬 나팔 소리가 세상 곳곳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