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시트와 가여운 짐승들-54화 (53/104)

54화.

한바탕 떠들어 댄 끝은 어설픈 화해 신청이었다.

흘긋, 해시트가 재빠른 시선으로 라피난의 뺨을 훑었다. 붓기는 거의 가라앉았지만 슬슬 멍이 들려는지 푸른빛이 비치고 있었다. 라피난은 신경 쓰지 말라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차라리 잘됐습니다. 덕분에 이레이가 폐하와 저의 혼인을 의심하지 못할 것 같으니까요.”

“……그래도 놈한텐 새로 말 한 마리 사 줘. 팔 년이나 함께한 말이라던데, 그 자식도 사람이니 정들었을 거 아냐.”

“세금으로 사야 합니까?”

“싫으면 네 돈 쓰든지.”

“이레이의 백인 소대 예산을 훑어보겠습니다.”

돈이라면 발에 차일 정도로 많은 놈이―카일 가문은 대대로 황실 다음가는 부자다―곧 죽어도 제 돈으로 이레이에게 말을 선물하긴 싫었나 보다. 마뜩잖은 라피난의 반응에 해시트는 어이가 없어졌다. 가만 보면 둘이 유치하기가 서로를 꼭 닮아서, 가끔은 친구가 아니라 형제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혼례식 준비는 어떻게 되어 가고 있나?”

해시트가 물었다. 묻기 전에 창문을 한 번 내다본 건 본능이었다. 창문으로 드나들길 좋아하는 누군가가 들으면 곤란해질 대화다. 라피난도 그 점을 의식했는지 슬쩍 언성을 낮췄다.

“문제없이 진행 중입니다. 축하연은 열흘 후부터 열흘간, 혼례식은 그중 마지막 날입니다. 이런 절차야 이제 말씀 안 드려도 잘 아시겠지만요.”

“너무 잘 알아서 지겨울 정도지.”

이번엔 부디 마지막 절차까지 밟을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해시트는 라피난에게 모가지와 눈알 간수를 잘하라고 당부하려다 관뒀다. 아무리 생각해도 농담 삼아 건네기엔 질이 나빴기 때문이다. 그게 결코 농담이 아니라는 지점에서 라피난의 기분을 더 상하게 할 가능성이 농후했다.

“나가 봐.”

결국 그녀는 서류에 박아 넣은 시선을 떼어 내지 않고 그만 나가 보라 일렀다. 짐짓 성의 없는 태도였지만, 이 정도로 업무에 열중하지 않으면 그녀가 늦은 밤까지 결코 퇴근할 수 없다는 사실은 라피난도 잘 알고 있을 터였다. 그러니 서운한 마음은 가당치도 않다.

“점심은 드시고 일하시지요, 폐하.”

문득 그의 잇새로 엷은 한숨이 끓었다. 가당치도 않은.

“혼자 드시기 적적하시다면 이레이 린 대장을 찾아다 앉혀 두겠습니다.”

“…….”

“필요합니까?”

“…….”

탁. 해시트가 다 읽은 보고서를 덮었다. 관성적으로 도장을 들어 꾹 찍었다. 그리고 새 보고서를 집으려 손을 뻗다가, 산더미처럼 쌓인 종이 더미 사이에서 무엇을 골라야 할지 몰라 우뚝 멈춘다.

잠시 후 라피난이 가장 윗줄에 있는 보고서 중에 하나를 골라서 그녀 앞에 대신 내려 주었다.

“농담입니다. 이제 해독제 드시라고 닦달하지 않을 테니 식사라도 제때 하십시오.”

농담은 무슨, 심술이겠지.

굳이 그 입으로 먼저 해독제 이야기를 꺼낸 저의가 뻔했다. 그래, 망할 놈의 불면증.

해시트가 밤마다 숙면에 드느니 차라리 불면증에 시달리는 게 낫다고 드디어 라피난도 인정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화가 나는지 모르겠다. 매사 무던하게 굴던 녀석이 갑자기 치사하게 굴어서?

해시트는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안 먹어. 나가.”

“간단한 요깃거리를 들이라고 말해 두죠.”

“안 먹는다니까!”

“제가 잘못했습니다.”

“……나가.”

“……마음이 바뀌시면 언제든 말씀하십시오.”

라피난의 태도 때문에 화가 났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고개 숙이는 그를 보고도 전혀 개운해지지 않았다. 이 기분은 대체 뭘까. 혼란스러운 척했지만 사실 해시트는 알고 있었다. 이것은 익히 아는 기분이다.

미안한 마음.

정말 미안한데 돌이킬 수 없으니까 일부러 화를 내는, 못난 마음.

이레이와 함께 말고삐를 쥐고 달리는 내내 그녀는 라피난에게 미안했다.

아마도 형식이란 그런 것인가 보다. 지금도 충분히 깊은 그들의 관계에 겨우 ‘결혼’이라는 두 글자를 더했을 뿐인데, 신기하게도 라피난을 남편으로 삼고자 결심한 이후로 이레이를 향한 그녀의 마음이 라피난에게 죄가 되었다. 그 마음을 라피난이 모두 안다고 생각하면 죄책감은 곱절로 늘어났다.

쫓아내듯 라피난을 보낸 뒤에도 해시트는 좀처럼 일에 집중하지 못했다. 끝내 스스로에게 분통을 터뜨리며 이마를 짚었다. 연신 입술을 깨물던 그녀가 이윽고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백지를 꺼내 책상에 올렸다.

펜촉에 잉크를 적신다.

“…….”

첫 글자를 적기까지 망설임이 길었다.

종이에 펜촉을 대고 얼마나 흘렀는지, 글자도 아닌 까만 얼룩이 동그랗게 번져 가며 점점 크기를 키웠다. 해시트는 그 얼룩이 원래 쓰려던 글자만큼 커다래진 뒤에야 겨우 펜대를 놀렸다.

[친애하는 이레이 경]

편지였다.

*

라피난과 길목에서 마주쳤을 때, 이레이는 어딘가 득의양양한 표정이었다.

“나도 걔한테 뺨 맞은 적은 없는데.”

역시나 놀려 먹으러 찾아왔단다. 라피난은 놀라움 없이 받아쳤다.

“나도 감옥에 갇혔던 적은 없다만.”

“뭐, 내가 진짜 갇혀 있었던 건 아니니까.”

“누가 들으면 탈옥이 자랑인 줄 알겠군.”

상종할 가치가 없다고 해서 무작정 무시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었다. 제때 대처하지 않으면 기고만장해져서 더욱 귀찮게 굴 상대임을 모르지 않았다. 물론 상대해 준다고 해서 적당한 때 물러설 상대도 아니었으나.

“솔직히 놀랐어. 설마 그 애가 네게 손찌검할 줄은 몰랐거든.”

“이제는 얻어맞은 것까지 부러워하나?”

“내가 그런 변태로 보여?”

“그렇게 안 보인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뭐라는 거야. 나는 그냥 질투심이 좀…… 많을 뿐이야. 너도 알잖아?”

“알다마다. 절대 무소불위의 권력자 곁에 남겨서 안 될 놈이지.”

“그럼 무소불위의 권력자 곁에서 거짓말을 일삼는 놈은?”

“……본론만 말해.”

둘 중에 더 끈기가 없는 쪽을 고른다면 의외로 라피난이었다. 그는 이레이처럼 똑같은 말을 빙빙 둘러 반복하는 재주가 없었다. 특히나 해시트와 관련된 문제에 있어선, 있는 재주라도 기꺼이 없는 셈 치기 일쑤다.

그럴 때면 이레이는 보란 듯이 웃으며 시간을 끌곤 했다. 지금이 아니라면 평소 그에게 쌓은 원한을 언제 해소하겠느냐며. 빙글빙글 웃는 낯으로 라피난의 속이 다 타들어 가도록 시간을 질질 끌다가 툭 내뱉는 식이다.

“내가 준 선물은 잘 간직하고 있나?”

그와 주고받은 선물이라면 하나뿐이다. 라피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왜.”

“잘 챙겨 두라고. 써먹을 데가 있을지도 모르잖아.”

“무슨 뜻이지?”

“으음, 나한테도 시치미 떼는 거야?”

이레이가 길게 침음했다. 곤란해하는 표정이 한 대 치고 싶을 만큼 얄미웠다. 그나마 이번엔 괜한 시간을 끌진 않았기에 라피난도 쓸데없이 인내심과 싸우지 않을 수 있었다.

“걔는 네가 인간이 아닌 줄 알고 있던데.”

“…….”

“그런데, 그게 아니잖아?”

인내심과 싸우는 편이 나았겠다. 라피난은 단숨에 말문이 막혀 버렸다. 그에게 성큼 다가온 이레이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왜 너를 의심하도록 내버려 뒀지? 일부러 의도한 건가?”

푸른 안광이 희번덕거린다. 이레이는 즐거워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를 무시한 채 꼿꼿이 정면을 응시하는 라피난의 행동에도 아무런 지적을 하지 않고 순순히 옆으로 비켜서는 것이다. 라피난을 스쳐 가며 어깨를 두드려 주는 손길에 은근한 악력이 실려 있었다.

“원래 인간은 바라는 대로 세상을 보고 원하는 대로 환상을 좇는다. 장담하는데 네가 수작질을 부리지 않았어도 해스의 환상은 지금과 같았을 거야. 이게 그 애의 본심이거든. 내가 인간이고 네가 인간이 아닐 것.”

“…….”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황제의 눈을 흐리는 역신에게 과연 죄가 없을지 궁금하군.”

새파란 눈동자가 흘깃 일별을 던지고 멀어져 갔다. 분명 눈높이가 비등했는데도 라피난은 이레이가 깔아 본다는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

집으로 돌아온 라피난은 지하실 깊이 숨겨 두었던 금빛 보석을 꺼냈다. 실로 오랜만이었다. 지하실에 새어 들어오는 옅은 빛만으로도 보석은 유난스럽게 빛이 났다.

잠깐만 바라봐도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찬란함이 그의 마음을 불편하게 해서 깊숙이 숨겨 둘 수밖에 없었다. 보석은 필시 장인의 손길이 닿았으리라 짐작할 수밖에 없는 아름다움을 지녔다.

그러나 불에 닿아도 녹지 않았고 무쇠로 내리쳐도 갈라지지 않는 성질을 가졌다. 벌써 몇 자루의 검과 망치가 이 물건을 쪼개려 들었다가 뎅강 부러졌던가.

만약 이 보석을 세공한 이가 있다면, 그건 인간의 영역을 아득히 뛰어넘은 ‘무언가’일 터다.

그리하여 라피난은 결코 망가지지 않는 보석을 손에 쥔 채로 한참이나 상념에 잠겨 있었다. 문득 흠결 없이 완벽한 황제로서 생을 마감하겠다던 해시트가 떠오르자, 멍하니 입술을 달싹였다.

“당신 빼고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

하지만 끝까지 당신의 눈을 멀게 하여 진실을 모르도록 만들겠다. 그는 오늘도 굳게 다짐했다. 진실로 그것만이, 이 거짓말쟁이가 오래전부터 품어 온 유일하고도 삿된 욕심이었기에.

*

황제의 근위대장을 결정하는 무투회에는 의외로 수많은 심사위원이 참석한다. 한데 우습게도 해시트만은 참석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회의에서 웬 대신 하나가 ‘지금껏 여인을 황실 근위대장으로 삼은 역사는 없었습니다. 하물며 애꾸눈이라니요!’라고 의견을 냈다가 냅다 머리꼭지가 돌아 버린 해시트에게 수모를 당했기 때문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