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시트와 가여운 짐승들-53화 (52/104)

53화.

“해스. 만지지 마.”

이레이가 무표정하게 그녀를 내려다봤다. 순식간에 마주 본 자세에 갑자기 눈 둘 곳이 없어진다. 해시트는 빳빳이 턱을 치켜들고 허공으로 시선을 배회했다. 붙잡힌 손목을 어설프게 빼내자 이레이가 씩 웃으며 고개를 바짝 들이밀었다.

“나 계속 벗고 있을까?”

“입어, 빨리.”

놀리는 거다. 작정하고 놀리는 건데 안 걸려들 수가 없었다. 해시트가 신속히 반복했다.

“빨리 입어……. 얼른.”

“아쉽군.”

흠, 침음하며 물러나는 얼굴이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게 심드렁했다. 그런가 하면 가방에서 새 셔츠를 찾아 얼굴을 끼워 넣는 행동은 아주 재빨랐다.

덥지도 않은지 이 늦여름에 목이 올라오는 까만 상의를 골라 입는다. 꼭 해시트가 그의 몸을 훔쳐볼까 봐 걱정하는 사람처럼. 이게 감히 누굴 변태 취급 해. 민망해진 해시트가 입술을 모아 꼼지락댔다. 솔직히 남의 등짝을 너무 더듬긴 했지…….

하마터면 성으로 돌아갈 때까지 어색할 뻔했는데, 말 안장에 오른 직후 이레이가 건넨 말에 해시트는 픽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렇게 입고 있으니 그냥 예쁜 마을 여자애 같은데.”

“단순히 예쁜 수준은 아닐 텐데.”

생김새에 대한 칭송이라면 사는 내내 귀에 인이 박이도록 들어왔다. 보통은 ‘예쁘다’가 아닌 ‘아름답다’는 표현이었지만 이레이는 꿋꿋하게 후자보다 전자를 고집했다. 그것이 해시트를 더 낯간지럽게 만든다는 것을 안다는 듯이. 그인즉슨 마침내 해시트도 그의 수작에 뻔뻔하게 받아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레이는 기습당한 사람처럼 잠시 날숨을 흩트렸다. 그리고 고삐를 잡아당기며 웬일로 순순히 인정했다.

“하긴.”

미아가 힘차게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비가 그친 숲을 달리니 싱그러운 향기 나는 여름 공기가 촉촉하게 폐부를 감쌌다.

“너무 아름다워서, 저기 깊은 산골 마을에 숨어 산대도 다 들키고 말겠군.”

“…….”

해시트는 못 들은 척 침묵할 따름이었다. 그러나 고삐를 쥔 그의 손 위에 가만히 제 손을 얹으며.

신념이 없었다면 갈등했을까.

목표가 없었다면 무너졌을까.

역시 그런 가정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이미 해시트는 쥰과 함께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 변화해 가고 있는 세상을 보았다. 한낱 신념은 이제 사명이 되었고 허황한 목표가 아닌 미래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런데도 한 점 흔들리지 않았다면 거짓이었으므로, 그녀는 오랫동안 침묵하며 말을 아꼈다. 오직 이레이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기 위해.

*

라피난은 하나의 말에 탄 두 사람을 발견하자마자 곧장 램프를 껐다.

“생각보다 일찍 오셨군요.”

아직 동이 트기 전의 새벽이었다.

아무래도 라피난은 해시트가 돌아올 때까지 매일 성벽 쪽문에서 밤을 지새울 심산이었나 보다. 하루라도 빨리 돌아와서 다행이다. 해시트는 안도감과 멋쩍음이 섞인 표정으로 냉큼 안장에서 뛰어내렸다.

“별일 없었나?”

“예.”

라피난이 그녀를 따라 말에서 내리는 이레이를 한 번 곁눈질하고 덧붙였다.

“대외적으로는 민가에 잠행을 나가셨다고 밝혀 두었습니다.”

“잘했군.”

쪽문 옆에는 미리 대기하고 있던 보초 두 명이 열심히 도르래를 밟고 있었다.

드르륵……. 묵직한 소음과 함께 사람이 겨우 드나들 만한 크기의 쪽문이 열리자 해시트는 더 지체할 것 없이 몸을 옹송그려 그 안으로 들어갔다. 당연히 성벽 너머 땅을 밟자마자 뒤를 돌아보며 두 남자를 채근했다.

“뭘 멀뚱히들 서 있나? 얼른 오지 않고!”

“난 아침까지 기다렸다가 다른 문을 이용해야겠는데. 말이 드나들기엔 이 쪽문은 너무 작아.”

문 바깥에 선 이레이가 으쓱 어깨를 들썩였다. 상대적으로 체구가 작은 해시트도 허리를 굽히고 출입할 만큼 자그마한 쪽문이었으니 괜한 억지는 아니었다. 해시트가 떨떠름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럼 미아만 맡겨 두고 일단 들어와. 또 노숙할 작정이냐?”

“저 말의 이름이 미아인가 보군요.”

잠자코 듣고 있던 라피난이 불쑥 대화에 끼어들었다. 어째서 제국의 황제가 가신 나부랭이가 기르는 말의 이름까지 외우고 다니느냐 캐묻는 투는 아니었다, 다행히도.

다행이라고, 해시트가 그 판단을 재고할 틈조차 없이 짧은 시간이었다. 라피난이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어 흑마의 목을 내리친 것은.

번쩍, 겨우 스쳤을까 싶은 잔상이 빛났다.

그것만으로도 검은 짐승의 육신은 놀랍도록 맥없이 널브러졌다. 쿠우웅! 시종 두 명이 도르래를 밟던 소리와는 비교도 안 되는 육중한 소음이 성벽 바깥을 울렸다. 말이 쓰러지며 이레이의 손에 들려 있던 고삐도 허무하게 빠져나갔다.

“……이게 뭐 하는 짓이지?”

딱딱하게 가라앉은 그의 목소리를 분명 들었을 터다. 라피난은 태연하게 검에 묻은 피를 허공에 털어 낼 뿐이었다.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하니까.”

“…….”

“네 목을 칠 수 있었다면 그렇게 했을 거다, 이레이 린.”

만만찮게 살벌한 목소리로 으름장을 놓고는 그가 휙 뒤를 돌았다. 몸을 굽혀 쪽문을 넘어오는 라피난의 어깨를 이레이가 화난 얼굴로 붙잡으려 하는데, 일련의 광경을 지켜보는 해시트는 신기할 정도로 머리가 차게 식었다. 순간 그녀가 손을 휘두른 건 결코 충동이 아니었다.

살과 살이 쓸리는 소리가 났다.

손바닥에 불이 날 듯 화끈거린다. 한발 늦게야 입 밖으로 내뱉은 분노는 싸늘했다.

“제정신이냐? 감히 이 몸이 보는 앞에서 내 허락도 없이 형을 집행해?”

그러자 라피난이 벌겋게 달아오른 뺨을 천천히 감싸 쥐며 대답했다.

“아니요.”

웃음기 없는 곧은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

“원하시는 대로 처벌하시지요.”

죽을죄를 지었다고 사죄해도 모자랄 판에 뻔뻔하게 해시트의 처분을 요구한다. 그에 당장 역정을 내도 부족했으나, 해시트도 언성을 높이긴커녕 할 말을 잃고 입을 다물어 버렸다.

라피난이 해시트의 앞에서 이토록 경망하게 군 것도 처음이었고 해시트가 남들 보는 앞에서 그에게 손을 댄 것도 당연히 처음이었다. 어쩌면 균열의 시작이 될지도 모르는 줄기가 소리 없이 갈라지고 있었다. 고요함을 깬 이는 이레이였다.

“보는 눈들이 많다. 난 상관없지만.”

그 말에 해시트와 라피난이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시선을 어그러뜨렸다. 도르래를 밟고 있는 두 명의 보초가 식은땀을 뻘뻘 흘려 대고 있었다. 이레이가 까딱 턱짓으로 그들을 가리켰다.

“쟤네가 귀머거리에 벙어리라면 계속해. 그게 아니라면 내가 이따가 쟤들 다 죽여 버릴게.”

아끼던 말을 잃은 화풀이를 애먼 데 하게 둘까 보냐. 해시트는 목울대를 움직여 답답한 마음을 아래로 밀어냈다. 꿀꺽, 억지로 삼켜 버린 뒤엔 휙 뒤를 돌아섰다.

“들어가지.”

“예. 폐하.”

라피난이 토 달지 않고 그녀를 따랐다.

새벽의 일은 그렇게 일단락되는 듯했다. 어쩐지 해시트는 오늘 라피난이 말을 죽인 일이 한때 이레이가 선황의 말을 사냥한 일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그때 이레이는 아흔아홉 대의 매질을 당했고, 오늘 라피난은 해시트와 함께 세운 둑에 하나의 긴 실금을 남겼다.

과연 무엇이 더 엄중한 형벌일까.

*

고작 만 하루 자리를 비웠다고 할 일이 엄두도 못 내게 쌓여 있었다.

아침부터 서류 더미에 둘러싸여 원 없이 글자를 읽어 댔더니 나중엔 눈이 침침하다 못해 어느 관료가 가장 악필로 보고서를 올리는지까지 순위를 매기게 되었다. 이 새끼들 다 글씨 쓰는 법을 처음부터 다시 배우게 해야 해, 해시트가 진심으로 투덜거렸다.

이러다 젊은 나이에 노안이 올까 두렵다. 물론 개중에 최악은 단연코 이레이가 발로 써 내는 보고서였다. 그리고 점심도 거른 채 집무실에 콕 틀어박혀 있는 그녀를 찾아온 이는 역시나 라피난이었다.

“며칠 전 말씀하신 물 장사치들을 조사해 봤습니다. 농지로 물길이 흐르는 땅을 사 두었다가 가뭄이 들면 도랑을 막아서 농민들과 흥정하는 수법을 쓰더군요. 당연히 물을 사고파는 행위는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지만, 교묘하게 도랑을 막은 흙을 판매하는 데다가 가격도 폭리 수준은 아니라서요. 게다가 식수가 아닌 농사지을 물만 골라서 행동에 옮기기 때문에 그쪽 관리자도 처벌에 골머리를 썩고 있었다네요.”

마실 물을 독점하거나 판매하는 건 살인에 준하는 죄이지만 농지에는 일부 예외를 두기도 했다. 더군다나 물이 아니라 흙을 팔았다고 우긴다면 융통성 없는 지역 관료들이 당황할 만도 하지……. 펜대를 돌리며 경청하던 해시트가 돌연 펜을 내려놓고 물었다.

“수법이 체계적인 걸 보니 그놈 하나 잡아들여 봤자 또 비슷한 놈이 활개 치겠군. 혹시 그 장사치가 물길 전체를 사들인 거냐?”

“아뇨. 그건 불법이지만, 교묘하게 농지와 맞닿는 대부분을 샀습니다. 새로 물길을 빼려고 해도 결국 그자의 땅을 거칠 수밖에 없게요.”

“음……, 그럼 그놈 땅 바로 뒤에 조그맣게 신전, 아니, 신전까지는 세금이 좀 아깝군. 그냥 돌탑 하나 세워라. 위치 선정 잘해.”

“예?”

바로 반문이 돌아왔다. 해시트는 다시 펜을 집어 들고 다음 보고서를 펼쳤다.

“수로를 새로 내려면 땅 주인의 허락이 필요하지만 우연히 밟는 건 죄가 아니잖아. 놈이 막아 놓은 도랑 바로 뒤에 터를 잡아 버려. 당분간 신전 기도실을 폐쇄하고 신도들이 그 돌탑 앞에서 절하도록 해라. 하루에도 수십 명이 족히 오갈 텐데 그때마다 보를 밟아 터뜨리면 제까짓 게 뭘 어쩔 거야? 기도를 방해하는 건 그야말로 대역죄인데.”

“괜찮은 방법이군요. 농민들도 직접 원한을 갚을 수 있으니 좋아할 테고요.”

라피난이 천천히 눈을 껌뻑였다. 돌탑 앞에 모여 절을 하다가 어이쿠, 발길질하는 농민들의 모습을 상상해 본 듯하다. 해시트는 다 읽은 보고서에 도장을 찍으며 덧붙였다.

“그러다 적당한 때 돌탑이 훼손되었다는 핑계로 그놈을 용의자로 잡아 처넣고 농번기 내내 가둬 놔. 그럼 알아서 땅을 팔겠다고 나설 거다. 놈이 땅을 내놓으면 헐값에 사들여서 관리하도록. 그리고 새벽엔 네가 잘못해서 때린 거니까 난 유감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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