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해시트의 혀 아래로 고였던 감각은 순식간에 기화해 형태를 바꿨다. 형태만 뒤바뀌었을 뿐 본질은 그대로였다. 두려움에 매혹된다는 것.
“…….”
그녀는 멍하니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미 몇 번이나 반복해 읽은 구절이 저절로 되풀이되었다.
[드래곤은 신의 피조물 중에서 신과 가장 비슷한 존재다.]
느닷없이 몰려온 먹구름이 어느덧 하늘을 빼곡하게 메우고 있었다.
[기분에 따라 눈과 비를 내릴 수 있고, 살육을 저지름에 있어 아무런 죄책감이 없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신을 믿어 본 적 없는 해시트였지만 이 순간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신.
혹은 그와 가장 닮았다는 완벽한 피조물.
해시트가 아는 중에 가장 ‘완벽한 인간’인 라피난 카일은 그러고 보면 날씨와 관련된 이야기를 종종 그녀 앞에서 읊곤 했다.
“제국의 하늘은 미케나 신의 축복을 받아 늘 고요하지요. 놀라실 만합니다.”
그녀가 신을 섬기지 않는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해시트의 입술이 비스듬히 벌어졌다.
“그럼 정말로 라피난이…….”
“뭐?”
그때였다. 나뭇잎에 고여 있던 작은 물방울이 한데 뭉쳐 아래로 낙하한 것은.
뚝!
차갑고 묵직한 것이 해시트의 귓바퀴를 아슬아슬하게 빗겨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기껏 뭉친 보람도 없이, 땅바닥에 부딪히자마자 도로 갈가리 찢기어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해시트의 뺨을 때린 것도 그중에 하나였다. 나뭇잎에 자잘자잘 고여 있다가 쿵 하고 떨어졌다가 다시 볼품없이 흩어진 물방울. 그것이 결과적으로 해시트의 뺨이 아닌 정신을 내리쳤다.
아.
해시트가 퍼뜩 눈을 고쳐 떴다. 흐릿하던 금안에 맑은 이채가 되돌아왔다.
“……만일 그렇더라도 상관없어.”
라피난이 인간이 아니더라도.
상관없다. 상관없어야 한다. 결심은 이미 옛날에 끝냈으니까. 이용해야 할 것은 이용하고, 희생이 필요하다면 기꺼이 따르겠다고. 곁에 두기로 마음먹은 자가 설령 살육과 간계를 일삼은 잔혹한 짐승이더라도 그 결심을 물릴 순 없었다. 어차피 그녀부터가 인간의 삶을 포기한 존재였다.
그녀의 결심을 알 리 없는 이레이는 불시에 헛웃음을 쳤다. 그리고 반문했다.
“방금 상관없다고 했나?”
우뚝 서서 그녀를 내려다보는 얼굴에 그림자가 짙었다. 그러잖아도 비구름에 가려진 태양을 또 한 번 등진 탓이다.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아서, 해시트는 막연하게 그의 눈가를 좇으며 대답했다.
“그래.”
“어떻게 그럴 수 있지? 그 자식이 네게 얼마나 대단한 의미길래?”
급기야 따지고 다그친다. 해시트는 앞서 그가 그랬듯이 실소했다. 또렷해진 정신은 아무 죄책감 없이 이레이와 라피난을 저울에 올리고 쉽게 숫자를 매겼다.
“너 따위는 감히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그럼 나는.”
표정을 알 수 없으니 오직 목소리의 떨림만으로 모든 감정을 어림짐작해야 했다. 해시트는 저를 삼켜 버릴 듯 커다란 그림자를 곰곰이 올려다보다가 시선을 거둬들였다.
“그보다 이레이.”
“…….”
“이 사안에 대해서 앞으로도 계속 입 다물어 줬으면 좋겠는데.”
흔치 않게 다정한 말투로 부탁했다.
이런 상냥함이 이레이가 보기엔 우스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건 체면보다 중요한 문제였다. 그녀의 마음이 제대로 가닿았는지, 잠시 후 이레이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재미있군.”
쏴아아, 빗줄기가 더욱 세차게 빗발쳤다.
이제는 나무 아래서 비를 피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무의미해졌다. 물기를 닦아 낸 지 얼마 안 된 얼굴이 종전과 비교할 수 없도록 흠뻑 젖어 들어갔다. 손에 쥔 하얀 셔츠는 더 이상 수건의 기능조차 하지 못했다.
이레이의 목소리는 쏟아지는 폭우 한가운데에서도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걱정하지 마라, 해스. 난 그 어떤 진실도 먼저 밝히지 않아.”
“고맙군.”
“천만에. 전부 네가 판단하고 내린 결론이잖아?”
고맙다는 인사조차 거절하고는 단호히 못 박아 버린다.
“결국 그게 너의 소망일 테지.”
“…….”
“네가 바라는 가장 이상적인 결말.”
그렇다면 기꺼이.
어느새 그림자 걷힌 아름다운 남자의 얼굴에 미소가 활짝 걸려 있었다.
*
비가 그치자 숲이 물기를 머금어 반짝반짝 윤을 냈다.
비록 흠뻑 젖은 꼴이 되어 숲 한복판에 주저앉게 된 처지였으나, 내린 비에 늦여름의 더위도 한풀 씻겨 나갔으니 그럭저럭 홀가분한 마음으로 다음 계획을 세울 수 있었다. 해시트가 그런 긍정적인 마음가짐을 가지게 된 데는 이레이의 심경 변화가 아주 큰 역할을 했다.
“돌아가자. 일출은 다음에 보지 뭐.”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몰라도 뭐, 순순히 협조하겠다는 데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냉큼 반색한다면 모를까.
해시트는 가까운 마을에 내려가 새 말을 구하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마을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 높은 지대에 올라섰을 때, 대뜸 이레이가 저 아래에서 손을 흔들고 외쳤다.
“거기서 뭐 해? 위험하니까 내려와.”
“마을이 어디 있는지를 알아야 말을…….”
“그럴 필요 없어. 미아가 돌아왔다.”
“응?”
해시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휙 고개를 내려 보니 정말로 이레이의 흑마가 그의 곁에서 풀을 뜯고 있었다. 두 사람과 마찬가지로 비에 쫄딱 젖어 갈기가 축 늘어진 모습으로.
“그래서 이름이 미아라고 했잖아. 얘가 길을 잘 잃어버리는 대신 또 잘 찾아와.”
“……주인 찾아오는 말 이야기는 처음 듣는데.”
“그래?”
이레이는 시큰둥하게 대꾸하고는 미아에게 손짓했다.
“그나저나 얘가 널 태워 줄지 의문이군. 아무리 짐승이어도 원한은 쉽게 잊지 못하는 법이라.”
현 상황에서 가장 현실적인 걱정이었다. 해시트의 낯빛이 침통해졌다. 아니나 다를까 이레이와 팔 년이나 함께했다는 까만 말, ‘미아’는 해시트에게 옆구리를 가격당한 원한을 제대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가 다가가면 불시 콧바람을 뿜으며 이레이의 등 뒤로 숨었다.
저기, 그 인간 남자 등짝이 아무리 넓기로서니 너처럼 커다란 말을 숨겨 주지는 못한단다. 미아에게 지은 죄가 있는 해시트는 차마 빈정거리지 못하고 이마만 긁적였다. 지켜보던 이레이가 조용히 웃으며 미아의 목덜미를 쓰다듬어 달랬다.
“네가 봐줘라. 내가 먼저 저 애를 위협했어.”
웬걸, 해시트를 경계하던 눈빛이 확연히 누그러졌다. 말이 말을 알아듣기라도 하는 걸까?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뜬 해시트에게 이레이는 미아의 안장에 달려 있던 행낭을 떼어 내 쑥 내밀었다.
“안에 깨끗한 옷 들어 있으니까 편한 데서 갈아입고 와. 너무 멀리 가진 말고.”
“내 옷은 언제 챙겼나?”
“정확하게는 네 거 아니고 쥰 거.”
“쥰?”
“등산 갈 때 너한테 빌려줬던 옷을 가보랍시고 숙소에 걸어 뒀길래 뺏어 왔지. 꼭 다시 돌려줘야 한다며 엉엉 울던데.”
“둘이 서로 집까지 드나드는 사이…….”
“응? 뭐라고?”
“……비가 너무 많이 내려서 옷이 멀쩡할지 모르겠다고.”
황급히 얼버무렸다. 데룩 눈알을 굴리던 이레이가 이내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멀쩡할 거다. 아마도.”
경험상 그에게 ‘아마도’는 확신이나 다름없다. 해시트는 슬며시 행낭의 뚜껑을 걷어 내부를 살펴보았다. 습기로 약간 눅눅해졌을 뿐 안에 든 내용물은 대체로 멀쩡했다. 이번에도 이레이의 ‘아마도’가 맞았다.
“뭐 해? 얼른 가서 갈아입지 않고. 그렇게 쫄딱 젖은 꼴로 말 타면 너는 무조건 감기 몸살 직행이야.”
“……기다려.”
해시트는 마뜩잖게 입맛을 다시며 커다란 아름드리나무 뒤로 걸어 들어갔다. 이래서, 이렇게 소 뒷걸음질처럼 잘 때려 맞출 때가 있어서 평소 이레이의 수많은 허세마저 긴가민가하게 되는 것이다.
*
새 옷으로 갈아입고 원래 자리로 돌아와 보니 이레이는 여태 뭘 했는지 이제야 윗옷을 탈의 중이었다.
맨살에 척 들러붙어 있던 젖은 옷감이 피부에서 떨어져 나가며 물기를 흩뿌린다. 단단한 팔의 움직임을 따라 섬세하게 쪼개지는 등 근육이 그림 같았다. 다시 나무 뒤로 뛰어 들어가야 하나? 해시트가 진지한 고민에 빠졌을 때, 이레이가 여전히 그녀에게 등을 보인 채로 말했다.
“가방 이리 줘. 내 옷도 거기 있어.”
그럼 진작 빼놓았어야 할 게 아닌가. 해시트는 꾹 입을 다물고 그에게 다가갔다.
“자.”
의식적으로 그의 몸을 보지 않으려 애쓰며 팔을 뻗었다. 한데 가만 생각해 보니 이미 그의 몸을 본 적 있었다.
“그래, 뒤돌아라.”
걸레짝이 된 등을 보이지 않으려 일부러 무심히 굴던 남자를 곱씹는다. 선명하던 피비린내까지 떠오르자 해시트는 무의식적으로 이레이의 등을 훑었다. 흉터가 많이 남았을까, 마음에 걸려서 저지른 행동이었지만 머잖아 기묘한 위화감에 휩싸이고 만다.
“너 왜 흉터가 하나도 없지?”
덥석, 해시트의 양손이 그의 등허리로 붙었다. 이레이가 눈에 띄게 어깨를 들썩였다. 드물게 당황한 반응이었다.
“이봐, 뭐 하는 거야?”
“잠깐만 가만히 있어 봐.”
해시트는 그의 만류를 무시하고 계속해서 등을 더듬었다. 단단하고 매끄러운 피붓결, 평균보다 차가운 체온이 여실히 느껴졌다.
이레이의 등에는 그간의 거친 생활을 반증하듯 여기저기에 자잘한 흉터들이 산재해 있었다. 그러나 뼈가 으스러지거나 살이 찢겼다가 아문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선황의 말을 사냥한 죄로 그가 아흔아홉 대의 매질을 당했을 때, 분명 사지가 부러지고 피를 한 움큼 토했다고 들었다. 그래도 겨우 목숨만은 건졌음에 안도할 만큼 처참한 몰골이었는데……. 지금 이레이의 몸은 애당초 그런 형벌을 받은 적 없다는 듯 멀쩡하다 못해 조각상처럼 아름다웠으니, 해시트가 의문하는 것도 당연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지?”
“원래 체질이 그래. 채찍질을 당한 것도 아닌데 꼭 흉터가 남아야 해?”
이레이가 나무라는 말투로 해시트를 밀어 냈다.
한쪽 팔을 들어 그녀의 손길을 차단하더니 슬쩍 몸을 돌려 버린다. 그 결에 그의 뒷덜미가 시야로 들어오자 해시트는 더럭 그 위로 손을 뻗었다.
“이레이. 하지만 여기엔 흉터가 깊게…….”
그의 어깨와 맞닿는 목덜미 한쪽에 엄지손톱만 한 자국이 보였다.
흉터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손을 대 보니 촉감이 이질적이었다. 딱딱하고, 미끌미끌하다. 물기 때문인지 반짝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조금 더 자세히 보기 위해 해시트가 눈을 가늘게 좁혀 뜬 순간 홱, 손목이 붙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