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닷새 안에 돌아오마.]
아침, 해시트가 지시한 대로 직접 그녀를 깨우러 들어온 라피난은 침대 위에 놓인 종이 쪼가리를 확인하자마자 거칠게 손안으로 구겨 넣었다. 정말이지…….
“죽일 수만 있으면 죽이고 싶군.”
밋밋한 표정과 달리 읊조린 내용은 다소 극단적이었다. 그나마 그의 분노가 썩 알맞은 방향으로 향해 있어서 다행이었다.
“친구라고 딱 하나 있는 게 어지간히 개새끼여야지.”
라피난이 해시트의 필체를 모를 리 없었다. 함께한 세월이 세월이니만큼 당연하다. 하물며 최근 두어 달간 하루도 빠짐없이 이레이의 수사 보고서를 받아 보는 중이었으니, 쪽지를 남긴 진짜 주인공이 누구인지 정도는 단박에 알 수 있었다.
그가 자리에 서서 무거운 한숨을 내뱉었다. 잠시 후엔 언제 그랬냐는 듯 차가운 얼굴로 해시트의 침상을 정리했다.
흐트러진 시트 자국을 펼치고 베개를 가운데로 옮겨 둔다. 활짝 열린 창문을 굳게 잠그고 커튼을 자연스레 늘어뜨렸다. 가장 짧은 동선으로 가능한 한 많은 곳을 손본 그가 이윽고 손을 탈탈 털며 뒤돌아섰다. 무심한 중얼거림과 함께.
“뭐, 상관없나. 지금은 딱히 불륜도 아니고.”
일부러 소리 내 읊어 놓고, 못내 신경이 쓰이는지 창문을 한번 흘긋거리고 만다.
햇빛을 받아 한결 투명해진 초록 눈동자는 어떤 상상에 빠져 있다. 잠든 여자를 소중하게 안아 들고 창문을 여는 빨간 머리 남자의 몸짓이 어렵지 않게 머릿속에 그려진다.
그거 엄밀히 말하면 범죄고 대충 표현해도 납치라고 단단히 일러 주리라 되뇌는 중이었다. 나아가 납치당한 대상자가 평범한 인간이 아닌 제국 황제라는 사실은 대관절 얼마나 더 소상히 일러 주어야 기억을 좀 할지 요원했다.
결국 그는 손바닥을 슬쩍 움츠리며 감상했다.
“그래도 기분은 별로군.”
기분까지는 그도 정말 어쩔 수가 없었다. 아무리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고는 해도. 그래 봐야 곧 해시트의 침실 밖으로 나와서 시종들을 물릴 땐 아주 태연했다.
“폐하께서는 새벽 일찍 잠행에 나가셨다. 다들 가서 일 보도록.”
원래 그런 남자였다.
매사 무뚝뚝하며,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고, 그래서 감정적으로 손해 보는 짓을 잘했다.
*
“괜찮다니까. 라피난이 어련히 잘 수습하고 있겠지.”
한바탕 소동 끝에 날이 밝아 올 때까지 이레이는 시종일관 속 편한 소리를 해 대며 해시트의 속을 뒤집어 놓았다. 구구절절 따지는 것도 어느 정도 대화가 통해야 가능한 일이다.
끝내 해시트는 새벽 어스름부터 입을 꾹 다물어 시위에 돌입했고, 그게 정오까지 이어지자 이레이도 그녀를 달래 볼 심산으로 조심스레 말을 바꿨다.
“사실 편지 남겨 두고 왔어.”
뒷일 따위 생각 안 했다면서 뻔뻔하게 굴더니 늦게나마 최후의 보루를 직고한다. 해시트는 당장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의 옷자락을 잡아챘다.
“뭐라고 써 뒀는데?”
“오, 이제야 나랑 대화할 기분이 드셨나?”
“뭐라고 썼냐고! 말해!”
“한 달 지나기 전엔 돌아가겠다고.”
“…….”
“지금 뭐 해?”
말에겐 미안했지만 넘어뜨려 다리를 부러뜨리면 더 이상 달릴 수 없을 터였다. 해시트가 세차게 이레이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윽, 야!”
속셈을 눈치챈 이레이가 그녀를 떼어 내려 했지만 이미 바짝 밀착해 있는 상황에서, 그것도 온 힘을 다해 버티는 해시트를 다치지 않게 떼어 내기란 아무리 그여도 어려웠다.
해시트는 요란하게 흔들리는 말 위에서 꿋꿋이 이레이의 몸을 더듬었다. 그의 허리춤에서 단검을 뽑아내는 데 성공하자마자 지체 없이 말의 옆구리로 휘둘렀다.
“젠장!”
이레이가 짧은 욕설을 토해 냈다.
팅! 꽂히지 못한 단검이 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 히이잉! 이레이의 손이 해시트의 뒤통수를 감싼 것과 동시에 거대한 흑마가 앞발을 쳐들며 콧김을 뿜어냈다. 두 사람이 부둥켜안은 채로 흙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말은 그들을 돌아보지 않고 계속 달려갔다.
해시트는 진작 이레이의 허리에 두른 팔을 떼어 낸 뒤였지만 여전히 그의 품 안에 갇혀 있었다. 그녀를 결박하듯 끌어안은 이레이는 도통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한참이나 그녀의 머리카락에 입술을 묻은 채 버티다가 한순간 억눌린 한숨을 흘려보냈다.
“내가 아끼는 말이었다.”
“비켜.”
“이름도 지어 줬었지. 미아라고.”
“좀 떨어지라고.”
“나와 팔 년이나 함께했는데 매정하게도 가 버리는군.”
“거짓말하지 마.”
냉담하게 핀잔한 해시트가 힐끔 눈동자를 굴려 흑마가 사라진 숲길 너머를 곁눈질했다. 다리가 부러지기는커녕 펄펄 날뛰며 앞을 향해 달려가던 까만 말. 칼날이 빗나가 다행이다.
짧은 감상을 마친 그녀는 다시 이레이를 밀어 내려 열중했다. 낑낑 힘을 쏟고 있자니 머리맡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재차 울려 퍼졌다.
“한 달이 아니라 닷새.”
“또 무슨…….”
“닷새 안에 돌아가겠다고 적어 뒀다. 그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아서.”
그 말이 꼭, 방금 전엔 그녀의 반응을 시험해 봤다는 괘씸한 고백으로 들린다. 울컥 짜증이 치민다. 이레이의 가슴팍을 밀치는 해시트의 손이 더욱 거칠어졌다. 점입가경으로 뾰족해지는 말투는 덤이었다.
“닷새라고? 이제 보니 바다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바보였군.”
“뭐, 바다 정도야 네가 자는 동안 데려다 두고 우기면 그만이니까.”
이레이는 뜻 모를 중얼거림으로 받아쳤다. 그와 동시에 직전까지 꿈쩍 않던 압박감이 스르륵 사라지는 바람에 해시트는 그게 웬 허무맹랑한 소리냐며 말꼬리를 잡아 볼 생각도 못 했다. 곧장 몸을 벌떡 일으켜 몸에 묻은 흙을 탈탈 털어 냈다. 그런 뒤에야 후다닥 물러선 그녀가 다시 입에서 나오는 대로 주절거렸다.
“닷새든 사흘이든 안 괜찮아. 괜찮을 리가 없잖아.”
“황제는 휴가도 안 가나?”
“안 가. 아니, 가더라도 절차를 밟아야지! 병가라면 모를까 휴가를 이렇게 말도 없이 가 버리면 남겨진 사람들은 어떡해?”
“그럼 병가라고 발표하면 되겠네.”
“그것도 안 돼. 통치자가 병들면 백성들이 얼마나 불안해하겠어?”
“백성 생각은 항상 끔찍하시군.”
“당연하지! 네놈은 제발 생각이란 걸 좀 하고 말해!”
심하다 싶을 만큼 야멸차게 외쳤다.
못되게 군 게 미안해서 더 못되게 굴다니 성격 한번 이상하다고 한껏 비난을 들어도 할 말이 없었다. 정작 이레이 린은 해시트가 각오했을 땐 절대로 그녀를 비난하지 않는다. 그저 어깨를 으쓱 들었다 내리고는 흙바닥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을 뿐이다. 거기서 심드렁한 눈빛으로 그녀를 올려다보며 혼잣말처럼 투정했다.
“그 백성에 나도 좀 포함해 주지?”
“뭐라고?”
“그냥 그렇다고.”
“…….”
“신경 쓰지 마.”
슬쩍 비껴가는 눈빛에 이상하게도 말문이 막혀 버린다. 몇 번이나 입술을 떼어 내려 애를 쓰던 그녀가 별안간 고개를 휙 쳐들었다. 후드득! 예고 없는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어쩐지 빗방울이 굵직하더라니 금세 장대비가 되어 빠르게 땅을 적셔 갔다. 듬성듬성 짙은 색으로 얼룩지던 흙바닥이 머잖아 몽땅 같은 색이 된다. 당황한 해시트가 손등으로 이마를 가리려고 했을 때, 이레이가 더럭 그 손목을 낚아채 가까운 나무 아래로 이끌었다.
“닦아.”
그의 어깨에 메여 있던 행낭에서 깨끗한 셔츠 한 장이 나왔다. 해시트가 말없이 바라보기만 하자 금세 겸연쩍은 기색으로 덧붙인다.
“수건 들어 있는 가방은 말이 달고 갔어. 네 탓이니까 이번엔 참지.”
“…….”
“얼른. 이따가 마을 도착하면 새로 옷 사 줄 테니까.”
그러다 감기 걸린 뒤에 후회하지 말고. 그렇게 말하는 그의 턱 끝으로는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셔츠 대신 수건을 달라는 요구가 아니었는데. 그보다는 이걸 나한테 주면 너는 어쩔 셈이냔 걱정에 가까웠다.
망설이던 해시트는 끝내 해명 없이 손을 뻗었다. 셔츠로 꾹꾹 물기를 닦아 내면서도 신경은 줄곧 그에게 쏠린 채였다. 길게 이어지는 침묵이 어색해서 먼저 용기를 냈다.
“비가 너무 뜬금없네. 분명 쾌청했는데…….”
“그러게. 지금쯤 라피난도 나만큼 기분이 안 좋으려나 싶군.”
아무튼 화해하자고 판 깔아 주면 초 치는 데 뭐 있다. 갑자기 라피난을 들먹이는 시비에 해시트가 얼굴을 구겼다. 삼키듯이 한숨을 내쉬고 대화를 원점으로 되돌린다.
“알면 돌아갈 궁리나 해.”
“나쁘겠지. 네가 없어졌으니까.”
이레이 역시 저 할 말만 했다. 계속 라피난을 들먹거리면서, 내리는 빗줄기를 바라보는 눈빛이 어쩐지 멍했다.
“그것도 하필이면 나와 함께 사라졌으니.”
“…….”
“초조할 거야. 짜증도 날 테고. 아마 볼썽사나운 질투심에 휩싸여 있을 거다. 혹시 모르지, 내가 네게 몹쓸 짓이라도 할까 봐 전전긍긍하면서 찾아다니고 있을지도.”
“……무슨 얘기가 하고 싶은데.”
결국 해시트가 그의 의도대로 따라 주었다. 설마 진짜로 해시트의 새 신랑감이 라피난임을 그가 알아차린 게 아닐까 의심스러워서, 또 걱정스러워서 별수 없이 내린 결정이었다. 이레이는 언뜻 쓰리게 웃으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정말 모르겠나?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건가?”
“…….”
섣불리 대답할 수 없었다. 해시트는 입을 다물고 버텼다.
물끄러미, 그녀의 눈에 시선을 고정한 채 그가 한 손을 뻗어 온다. 느릿하지만 정확하게 가까워진 손끝이 해시트의 귓불 아래를 건드렸다. 잠시 머물렀다가 스쳐 가는 감각에 불가항력처럼 어깨가 떨렸다. 볼 안쪽을 깨물었다. 간지럽다. 아니, 이게 정말 간지러운 건가?
미처 닦아 내지 못한 물방울 하나가 그녀의 귓불에서 그의 손가락 위로 옮겨 가며 기묘한 감각을 퍼뜨렸다. 기실 이레이가 덜어간 물방울의 무게보다 그 행동 때문에 해시트의 혀 아래로 고인 긴장감이 수배는 더 무거웠다. 그것을 삼키거나 곱씹을 시간은 턱없이 부족했다.
“너도 읽었을 거 아니야. 그 책.”
카이렌.
불타 사라진 책의 제목이 습기 찬 허공에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