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속이 시꺼먼 무뢰한, 그가 오늘따라 심드렁한 얼굴로 다가와 쥰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나도 끼워 줘.”
그런데 왜 남의 어깨에 팔을 두르지? 쥰이 걸어 다니는 팔걸이도 아닌데 말이다. 덩치는 거의 집채만 한 놈이 자기 팔 한 짝도 혼자 못 가누는 게 말이 되나 싶다.
더럭 불쾌해진 해시트가 왜 불쾌해졌는지 이유도 모르는 채 인상을 찌푸리거나 말거나, 팔걸이 취급을 당하고 있는 당사자 쥰은 이레이의 행동이 무척 익숙하다는 듯이 그를 대했다.
“대장님도 빨래하러 나오셨습니까?”
“내가 너인 줄 아냐. 세상천지에 너처럼 가위바위보를 못 하는 열아홉 살은 너밖에 없을 거다.”
“그럼 왜 오셨는데요?”
“쟤 찾아왔지.”
까딱, 이레이가 턱을 치켜들었다. 무심한 낯으로 가리킨 끝에 해시트가 서 있었다.
그의 시선이 내내 제 얼굴에 닿아 있는 줄도 모른 채 쥰의 어깨에 걸친 이레이의 팔뚝만 노려보고 있던 해시트는 그제야 흠칫 놀라 눈을 세게 끔뻑였다. 아니, 이 망나니가 아무리 쥰 앞에서라지만 또 밖에서 반말을 지껄이네.
당혹스러운 혼잣말이 빠르게 머릿속을 지나갔다. 얘니 쟤니 경망한 호칭까지 따져 묻는다면 참수형이 부족하리라. 하지만 왜인지 입술이 딱 달라붙고 만 해시트를 대신해서 쥰이 재잘재잘 이레이에게 핀잔했다.
“무슨 용무인지는 몰라도 안 됩니다. 폐하께선 저와 등산 가시기로 했어요.”
“그럴 리가. 쟤는 네가 자기를 업고 산에 오른다고 약속하기 전까진 여기서 한 발자국도 안 뗄 거다.”
“에이, 왜 이러십니까? 아무리 대장님이라도 새치기하는 모습은 보기에 안 좋습니다. 분명 제가 먼저 폐하와 면담 중이었다고요.”
쥰의 앞에서 마음이 편해지는 건 비단 해시트뿐만이 아니었나 보다. 이레이도 퍽 편안하게 쥰을 대했다. 서로 주거니 받거니 가벼운 설전 끝에, 그가 쥰의 어깨에 둘렀던 팔을 들어 그대로 그녀의 정수리에 꿀밤을 먹였다. 꽁.
“아얏.”
“그렇게 따지면 내 순서가 훨씬 앞이거든.”
어린애 타이르듯 받아친 이레이가 바로 부연했다.
“나는 아침부터 쟤 집무실까지 갔다가 빈손으로 돌아왔다.”
그랬나. 하필이면 오늘 집무실로 찾아갔었다니 운이 나빴다.
무심코 그들의 대화를 경청하던 해시트는 눈을 내리깔고 이레이와의 지난 만남을 떠올렸다. 어떻게 된 사이가 한 번을 제대로 들어맞지 않고 어긋나기만 한다.
달이 휘영청 밝던 밤에 선황과 그의 연인이 밀회를 즐기던 장소에서, 전혀 달콤하지 않은 밀어를 속삭이다가 결국엔 싸우고 돌아섰다. 너를 버리겠다는 둥 작정하고 남긴 못된 말이 아직 기억에서 사라지기 전이었다.
당연히 엄청나게 화가 나 있을 줄 알았는데, 뜻밖에 담담해 보이는 이레이의 태도가 해시트를 묘한 섭섭함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등산은 무슨 등산이야. 넌 이 빨랫감들이나 어떻게 좀 해라.”
“헉, 맞다. 빨래…….”
“억울하면 다음엔 제발 이기고.”
이레이가 푸스스 웃음을 터뜨리며 쥰의 머리를 헤집었다. 저런 식으로 타인을 대하는 그는 해시트에게도 낯설었다. 그러니까, 해시트에게도 저렇게는 안 한다. 순간 울컥 치민 짜증이 그녀의 이성을 이겼다.
“이레이 대장, 빨래는 네가 해. 명령이다.”
다짜고짜 던진 소리에 이레이가 바로 고개를 돌렸다. 아직 상황 파악이 덜 됐는지 멀뚱한 표정이었다.
“어?”
“네가 하라고. 쥰은 나랑 등산 가야 해.”
“네?”
이레이에 이어 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문했다. 해시트는 이레이가 얼빠져 있는 틈을 타 후다닥 쥰의 팔목을 낚아했다.
“가자, 쥰.”
“으악! 잠깐만요. 폐하! 이대로 가면 저 나중에 대장님한테 죽……!”
“아, 그 전에 편한 옷으로 갈아입어야겠군. 내 방에 들렀다 가면 시간이 많이 지체될 것 같은데, 쥰. 네 옷을 좀 빌려주겠나?”
“뭐라고요? 폐하께서 제 옷을요?”
“안 되냐? 다시 돌려주마.”
낑낑대던 쥰의 태도가 단숨에 뒤집혔다.
“가문의 영광입니다. 평생 액자에 걸어 두고 가보로 삼을게요. 땀에 젖은 그대로 주시는 거죠?”
그녀는 더 이상 이레이에게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미 죽어도 여한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꿀꺽 마른침을 한 번 삼키더니 나사 하나 빠진 사람처럼 몽롱한 눈으로 앞장서 걷기 시작한다. 등 뒤에서 이레이의 불만이 터져 나온 것과 동시였다.
“뭐야? 해스! 또 왜 그러는데? 내가 쥰 보는 데서 반말했다고 이래?”
아아, 그러고 보니 그런 좋은 핑계가 있었다. 해시트는 옳다구나 이레이를 돌아보고 혓바닥을 내밀었다.
“맘대로 생각해.”
그런 오해라면 언제든 환영이었다.
*
진짜 괜히 따라왔다…….
장장 두 시간에 걸친 등반은 해시트로 하여금 자신의 과오를 맹렬히 후회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올라오는 데 이만큼 걸렸으니 내려갈 땐 못해도 이거 반만큼은 걸리리라.
마음 같아선 확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하산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단축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쥰이 사형을 면치 못할 테니 인내하기로 했다. 다만 그 전에 호흡 곤란으로 사망에 이른다면 그땐 미처 신경 써 줄 수 없겠다.
“잠깐, 잠깐만 쉬었다 가지…….”
해시트가 무릎을 짚고 밭은 숨을 골랐다.
산세가 가파른 탓도 있었지만 사실 체력이 예전만 못했다. 대관식 이후 쭉 과로와 울화에 시달려 온 데다 헤라꽃 독에 중독되기도 했으니 멀쩡한 게 더 이상하다. 최근엔 해독제 때문에 피를 자주 토해서 어지럼증까지 더해졌다.
힘들어하는 해시트를 본 쥰이 미리 챙겨 온 손수건을 바위 중앙에 깔고 그녀에게 손짓했다.
“폐하, 이쪽에 앉으세요.”
“너는 안 앉나?”
해시트는 쥰이 깔아 둔 손수건을 치우고 바위 구석에 걸터앉았다. 손수건은 땀 닦는 데 쓰려다가 도로 곱게 개켜 쥰에게 내밀었다. 이미 쥰의 옷을 빌려 땀으로 흠뻑 적셨는데 손수건까지 더럽히긴 싫었다. 그녀는 옷소매를 당겨 이마에 흐르는 땀을 꾹꾹 찍어 냈다.
“그냥 손수건으로 닦으셔도 괜찮은데…….”
“좋은 말로 할 때 받아서 집어넣고 옆에 앉아.”
“옙.”
쥰이 냉큼 손수건을 받아 들고 그녀 옆자리에 앉았다. 또 한발 늦게 쑥스러워졌는지 뺨을 긁적이다가, 그대로 손가락을 미끄러뜨려 산 밑을 가리켰다.
“보십시오. 엄청 예쁘죠?”
해시트는 말없이 쥰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녀의 말대로 산 아래 펼쳐진 수도 풍경이 한눈에 꽉 차게 들어왔다. 드높은 성벽도 이리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니 꼭 장난감 같다. 문득 솔솔 부는 바람이 느껴지자, 해시트는 그만 인정하기로 했다. 오르는 길이 고되긴 했지만 올라오길 잘했다고.
“그래, 아름답군.”
그녀의 백성이 저 아름다운 풍경 속에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니 뿌듯함에 기분이 좋아졌다. 쥰은 흐흐 웃고는 손가락을 움직여 풍경 속 어딘가를 찍었다.
“저긴 원래 빈민촌이었어요.”
지난달 개장한 유원지 자리였다. 당연히 해시트도 그곳이 예전에 빈민촌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굳이 대꾸하지 않는 해시트의 의중을 알아차렸는지, 쥰은 천천히 다음 말을 이어 갔다.
“전쟁에 나갔다가 불구가 된 전직 기사와 군인, 그리고 전쟁으로 부모, 자식을 잃은 노인과 고아들이 저곳으로 쫓겨나 살았죠. 폐하께서 부상자와 유가족을 위한 연금 제도를 시행하신 덕분에 차츰 줄어들다가 자연스레 사라졌어요.”
“…….”
해시트는 계속 침묵했다. 애당초 그녀가 전장에서 번번이 살아 돌아오지 않았다면 진작 끝나고도 남았을 전쟁이었다. 결국 그녀가 죽지 않아서 선황이 전쟁을 끝내지 못했던 것이다……. 따지고 보면 그녀 때문에 생겨난 빈민을 구제하였다는 찬사 앞에서 마음껏 으스댈 순 없었다.
쥰이 또 손가락을 미끄러뜨려 한창 상수도 공사 중인 지역을 가리켰다.
“아직도 한여름이 되면 농사는커녕 마실 물도 없어지는 동네가 있대요. 그걸 기회 삼아 물값으로 폭리를 취하는 장사치들도 있고요.”
“그래? 재상이 쓴 보고서에 그런 말은 없었는데.”
해시트의 미간이 더럭 좁아 들었다. 처음 내비친 반응이었다. 쥰은 기쁜 내색 없이 어깨를 가볍게 들썩였다.
“워낙 시골의 일이니까요. 어쨌든 수도가 정비된 후엔 부디 나아지길 바랄 뿐이에요. 못된 장사치들 밥줄이 끊겨서 굶어 죽는다면 더 좋겠지만, 거기까진 어렵겠죠?”
“어렵지. 굶어 죽기 전에 다 잡아들여서 나무에 매달아 버릴 거다. 어디 새 밥이 되어서 하늘 높이 날아 보라지.”
“와우.”
“제기랄, 날을 잡아서 국토 대장정이라도 해야 하나. 땅덩어리가 워낙 넓으니 일일이 들여다보기 힘들어서 원.”
“흐헤헤, 거기 저도 데려가 주시면 안 돼요?”
“아서라. 놀러 가는 것 같으냐?”
“놀러 가시는 거면 차라리 낫게요? 늘 일만 하고 계시잖아요. 전쟁터에서도 틈만 나면 서류 들여다보고 계신 거 다 봤습니다.”
배시시 웃던 쥰이 금세 표정을 고쳐 염려하는 눈빛을 보냈다. 그에 가소롭다는 듯 눈을 가늘여 주었더니 냅다 시치미를 떼고 다시 손가락을 놀리기 시작한다.
“어어, 그러니까 저기 보이는 학교 말인데요…….”
원래 제국인만 받아 주던 학교가 해시트의 황제 즉위 이후 외국인들과 혼혈까지 입학할 수 있게 되었다고, 또 저 끝은 무투회장인데 해시트가 극장 간판에 갑부들의 이름을 달아 주는 대신 운영비를 부담케 하면서 가난한 이들도 부담 없이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고, 저 골목은 예전엔 밤만 되면 깜깜했는데 이제 상시 보초가 있어서 사람들이 안심하고 돌아다닌다고.
그런 이야기가 귀가 간지러울 정도로 계속되기에 해시트는 공연한 호통이라도 쳐서 쥰의 입을 다물게 하려 했다. 그때 쥰이 말했다.
“그리고 저기가 우리 오빠 무덤이에요.”
해시트는 막 입술을 떼어 냈다가 그대로 가로 닫아 숨을 삼켰다. 어느덧 손가락을 거둬들인 쥰이 또렷한 시선으로만 한 점을 응시하고 있었다.
“폐하께서는 기억하지 못하시겠지만, 제 오빠의 부고를 우리 가족에게 전해 주신 분이 바로 폐하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