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쥰 데이티니스?”
해시트가 휙 뒤를 돌았다. 산더미 같은 빨래 바구니를 안고 등장한 쥰이 고개를 쑥 옆으로 내밀고 반갑게 웃었다.
“우와, 정말 오랜만에 뵙습니다!”
한쪽 팔을 붕붕 흔드는 모습이 꼬리 달린 강아지를 연상케 했다. 무쇠로 된 빨래 방망이를 휘두르면서도 그녀는 전혀 버거워하지 않았다. 쟤는 힘이 참 세구나……. 해시트가 막연히 감탄했다.
갑자기 쥰이 사색이 되어 바짝 바닥에 엎드렸다. 쿵! 무쇠 방망이가 계곡 바위에 부딪히며 굉음을 퍼뜨렸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기뻐서 그만……! 용서해 주십시오!”
와중에 용케 빨래 바구니를 계곡에 빠뜨리진 않았다. 해시트는 엎드린 채 진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쥰과 빨래 바구니를 번갈아 보다가 피식 실소하고 말았다.
“일어나라, 옷 다 젖겠다. 입고 온 옷까지 세탁해서 돌아갈 셈이냐?”
붙잡고 일어나라고 손을 내밀어 주자 몹시 황송한 얼굴로 덥석 마주 잡는다.
아무래도 쥰은 일단 저지른 다음에 쑥스러워하는 성격으로 보였다. 해시트의 손을 놓은 뒤에야 두 뺨을 발갛게 물들이며 신난 미소를 감췄다. 아직 어린 티가 난다고 해야 할까.
고작 두 살밖에 차이 나지 않는데도 해시트는 쥰을 만날 때마다 귀엽다는 감상이 앞섰다. 평범한 가정에서 씩씩하게 자라나 하고픈 일을 하고 사는, 표정이 다양하고 저보다 두 살 어린 여자아이.
한데 그런 여자아이 혼자서 해치우기엔 빨랫감이 너무 많지 싶다. 해시트가 턱짓으로 빨래 바구니를 가리켰다.
“다 네 거냐?”
“아뇨. 가위바위보에 져서 선배들 몫까지 받아 왔습니다.”
“가위바…… 그게 뭔데?”
“아, 그게 뭐냐면요, 그러니까 이렇게 손바닥으로 가위랑 바위랑 보자기 모양을 만들어서 일대일로 승패를 가르는 아주 평화적인…….”
“보자기? 그건 뭔데?”
“엇, 그러게요? 그게 뭐더라? 잠깐만요, 폐하. 제가 설명을 듣긴 들었는데요…….”
손바닥을 활짝 펼쳐서 ‘보자기’ 모양을 만들어 냈던 쥰이 설명을 잇지 못하고 횡설수설했다. 괜히 물어봤다. 해시트는 건성으로 손을 내저었다.
“아아, 됐어. 선임들이 억지로 네게 일을 떠넘긴 게 아니라면 아무래도 상관없다. 그건 그렇고, 너희들 생각보다 유치하게 노는구나.”
그 말에 쥰이 멋쩍게 뒤통수를 긁적였다.
“이레이 대장님께서 알려 주신 놀이예요. 시끄러우니까 대련 좀 작작 하라면서요. 그전까진 대련으로 빨래 당번을 정했거든요.”
“…….”
그러고 보니 쥰이 이레이의 백인 소대에 귀속되었다던가. 잠깐 잊고 있었다. 해시트는 쥰의 왼쪽 눈을 가리고 있는 안대에 잠시 시선을 두었다가 떼어 냈다.
혹시 쥰 데이티니스가 얼마 전 누명으로 투옥되었다가 석방된 자기네 대장에 대해서 마구 떠들어 댈까 봐 내심 걱정했지만, 다행히 쥰은 명랑함과 눈치를 바꿔 먹은 부류가 아니었다. 꾹 다물린 해시트의 입술을 보자마자 눈치껏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폐하께서 여기까진 웬일이세요?”
해시트는 냉큼 대답해 주었다.
“모처럼 휴일이라. 시찰도 회의도 없는 날은 극히 드무니 혼자 산책하면서 즐기고 있었다.”
“어쩐지, 오늘따라 성 안에 관료들이 안 돌아다닌다 했어요. 다들 휴가 가셨군요? 엄청 부럽습니다…….”
“흠, 글쎄다. 방금 네가 한 말을 들으면 다들 피눈물들을 흘릴 것 같은데.”
“네? 왜요?”
쥰이 멀뚱히 눈썹을 치켜떴다. 이런 걸 말해 줘도 되려나. 짧은 고민 끝에 해시트가 입맛을 다셨다. 굳이 숨길 건 또 뭐람.
“휴가가 아니라 병가거든. 카일 재상이 일을 너무 많이 시켜서 관료들이 단체로 골병이 들었다.”
“……예?”
둥글게 올라간 쥰의 눈썹이 우뚝 제자리에 정지했다. 해시트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흘려보냈다. 읊으려니 벌써 질렸다.
“상수 사업 보고서 하나를 무려 열일곱 차례나 반려시키고 열여덟 번 만에 통과시킨 걸로도 모자라 예산 산정 과정 내내 재상이 직접 들여다보면서 한 닢 단위로 확인해 대니 다들 출근길이 지옥 길이었을 거다. 감기 몸살이 관료실 전체에 퍼졌는지 보름 전부터 실신 환자가 속출하더니 결국엔 이 꼴이 났지 뭐냐. 내가 확신하는데 이건 천재가 아니라 인재야.”
“으, 으음…….”
“그래. 짐도 어처구니가 없단다. 그 녀석이 언젠간 이 꼴을 낼 줄 알기야 했다만 생각보다 빨라. 후우……. 쥰.”
“예!”
“너는 그 녀석이 네 상사가 아닌 걸 다행으로 여기고 네 동료들과 가위바위보인지 대련인지나 열심히 해라. 라피난이 너희들 상사였다면 빨래 당번은 물론이거니와 탈수 방식까지 꼼꼼히 정해 줬을 거야. 그뿐이겠어? 색깔 옷과 흰옷을 한꺼번에 세탁했다간 벌점을 받았겠지.”
글쎄 그놈은 그러고도 남을 놈이라고. 해시트가 미운 마음 없이 투덜거렸다.
지금껏 이런 식으로 불만을 늘어놓을 때 들어주는 이는 이레이뿐이었다. 이간질당할 빌미를 남기지 않고자 다른 이 앞에서는 입도 벙긋한 적 없다. 다시 말해, 라피난을 제외하면 믿을 만한 측근이 이레이밖에 없었다.
그러니 그와 서먹해진 이래 해시트 혼자 삭일 수밖에 없는 불평이었다.
물론 이레이와 별문제 없이 잘 지냈다고 한들, ‘있잖아, 내가 저 잔소리꾼과 결혼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제국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쟤보다 더 나은 선택지는 없을 것 같다만, 이러다 베갯머리송사로까지 잔소리를 듣게 될까 봐 좀 걱정이 돼서 말이야. 근데 네가 걜 죽여 버릴까 봐 걱정스러운 마음이 훨씬 더 크긴 해.’ 같은 한탄을 늘어놓는 건 애초에 불가능했을 테지만.
이상하게도 쥰과 함께 있으면 해시트는 말이 쉽게 나왔다. 그녀의 왼쪽 눈을 가린 안대를 볼 때마다 가볍게 죄어 오는 죄책감과는 별개로 마음이 느긋하고 편안해진다. 그 이유는 아마…….
“폐하께서는 편찮으신 곳 없이 괜찮으신 겁니까?”
“음?”
“관료들이 죄다 앓아누웠다면서요. 재상님의 열정에 못 이겨 매일같이 격무에 시달린 건 폐하께서도 마찬가지이실 것 아닙니까?”
쥰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해시트의 안색을 살폈다. 슬쩍 까치발을 들어 얼굴을 가까이 들여다보는 행동에서 초조함이 묻어났다. 그래서 해시트도 선선히 퍼지는 웃음을 숨기지 못했다.
그 이유는 아마, 쥰 데이티니스가 아주 강직하고 올곧은 동시에 해시트에게 순수한 선의를 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몸은 멀쩡해. 관료들이 운동 부족이었던 것 같아.”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그래도 너무 무리하진 마십시오.”
“걱정하지 말라니까. 이 몸은 살면서 감기 한 번 걸린 적 없는 강골이다.”
신뢰와 책임은 늘 한 묶음이었다. 무더운 여름에도 이불을 제대로 덮고 자지 않으면 곧잘 배앓이를 하는 약골 해시트는 앞으로도 타고난 강골로 둔갑하여 백성들의 신뢰에 보답해야 했다. 불현듯 그녀가 쥰에게 질문했다.
“쥰, 너의 가족들은 어디에 있나?”
얼핏 부모와 형제가 있다는 소리를 들은 기억만 났다. 쥰은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성 밖에 예전부터 살던 집이 있습니다. 부모님은 거기 계세요.”
“형제는 독립해서 나간 건가?”
“예?”
“아니야? 형제가 있다고 들은 것 같은데.”
“아아……, 네. 남자 형제가 하나 있습니다. 오빠요.”
“다들 나를 많이 원망하겠군.”
해시트가 또다시 쥰의 왼쪽 눈을 보았다. 총명한 안광 대신 검은 안대가 그녀의 씁쓸한 눈빛을 허무하게 흘려보냈다. 취미 삼기엔 아깝다 싶을 만큼 조각에 자질이 있었지만 한쪽 눈을 실명한 이후엔 그 취미마저 놓아 버렸을 게 분명했다.
솔직한 해시트의 표현에 쥰은 고민스러운 듯 잠시 침묵하고 있었다. 별안간 계곡 바닥에 굴러다니는 무쇠 방망이를 주워다 빨래 바구니 옆에 얌전히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아마 아닐걸요. 그랬다면 오빠가 전쟁터에서 죽었을 때 이미 실컷 원망했을 겁니다. 그런데 저는 부모님께서 폐하를 원망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네요.”
“…….”
“폐하의 추측대로라면, 제가 입대한다고 했을 때도 결코 허락하지 않았겠죠.”
“……형제가 고인이었나?”
머뭇거리며 해시트가 되물었다. 쥰이 씩 미소 지었다.
“옛날에요.”
그러고는 두 손을 옷자락에 슥슥 닦아 내고 그중 하나를 해시트에게 내밀었다. 설마 붙잡으라는 건가? 갈피를 잡지 못한 해시트가 못내 당황해하는데, 쥰은 민망한 기색 없이 흔쾌하게 제안했다.
“폐하. 저와 등산 가실래요?”
“뭐?”
“등산이요.”
“등산?”
해시트는 얼이 빠져 두 번이나 반문하고 말았다. 등산이라니, 진심으로 하는 말인지 의심스러웠다.
비록 그녀가 그간 전쟁터에서 살다시피 해 왔다고는 하나 그건 황족의 소임이라 피치 못한 것이고, 솔직히 말해 땀 흘리는 운동은 질색이었다. 검술은 최악이고 체술은 끔찍하다.
승마조차 라피난을 만난 열한 살에 겨우 시작했으니 등산이야 더 말할 게 무어 있단 말인가. 사람 목숨이 달리지 않은 이상 해시트가 등산로 근처에 얼씬거릴 일은 영원히 없었다.
“짐이 내일부터 다시 업무가 많은 관계로…….”
“성 밖으로 조금만 나가면 군사 지역 안에 좋은 등산로가 있답니다. 수도가 한눈에 다 보여요.”
“장난하나? 지금 나더러 수도가 한눈에 보일 정도로 높은 산에 오르라고?”
“네. 감기 한 번 안 걸리는 튼튼한 몸이시라면서요? 그 정도면 거뜬할 거예요.”
빵긋! 쥰의 두 뺨이 둥글게 올라갔다. 여태 잘 간직하던 눈치를 갑자기 얻다 팔아먹었는지 아리송했다.
이따위 제안을 건넨 이가 이레이였다면 응당 정강이를 걷어차고 떠나 버렸겠지만, 애석하게도 지금 그녀의 앞에서 방글방글 웃고 있는 쥰 데이니티스는 어느 속이 시꺼먼 무뢰한과는 다르게 순수하고 충성스러웠다.
해시트는 되도록 화내지 않고 쥰을 떨궈 낼 방법을 모색하기로 했다. 진지하게 머리를 굴리는데, 멀지 않은 곳에서 인기척이 울렸다.
“둘이 여기서 뭐 해?”
이레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