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그리하여 그날 라피난 카일의 심장이 어떻게 뛰었는지는 오직 그 혼자만이 알았다.
영원히.
*
쨍강!
거울이 깨졌다. 내내 얌전히 벽에 걸려 있던 물건이 고작 바람이 조금 불었기로서니 순식간에 바닥으로 곤두박질칠 일인가. 의자에 앉아 산산조각 난 파편을 물끄러미 구경하던 이레이는 곧 고개를 돌렸다. 어차피 그 여자와의 추억이 깃든 거울도 아니니 부서지든 가루가 되든 관심 없다.
턱을 괴고 있던 손가락을 떼어 낸 그가 천천히 얼굴을 쓸어 올렸다. 피곤하다는 듯이, 그러나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도록 무감한 얼굴이었다. 혼자 있을 때의 그는 대부분 이 모양 이 꼴이기 때문에 희미하게 미소 짓거나 찡그리는 사소한 감정의 표현조차 쉽게 상상할 수 없었다.
그러나 오늘 그는 몇 차례에 걸쳐 얼굴을 쓸어 올림으로써 명백한 감정을 표현했다. 답답함이다. 종국엔 두 손바닥을 덮은 그대로 긴 한숨을 흩트렸다.
“후우.”
살짝 벌어진 손 틈새로 푸른색 안광이 번뜩거렸다. 북쪽 바다의 빙하를 끌어온 것처럼 냉랭했다. 반면 그 아래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한없이 끓는점에 가까웠다.
“버림받기 전에 떠나야겠지.”
나도 알아. 남자는 또다시 달빛 아래 그를 섧게 했던 어떤 여자의 말을 되뇌인다.
“그게 내가 널 버려야 하는 이유다.”
상처 주려고 작당을 했더랬다. 의도한 대로 상처받았으니 상처를 준 입장에선 쾌재를 불렀을지, 야속한 심보를 상상해 보던 그가 별안간 의자 팔걸이를 짚고 일어났다.
“누가 두 번씩이나 당할까 봐.”
낮게 가라앉은 중얼거림이 마치 자기암시와도 같았다.
*
해시트의 입술이 멍하니 벌어졌다.
“지금 뭐라고…….”
“다시 말할까요.”
“……아니.”
머뭇거리던 그녀가 까무룩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굳이 다시 들을 필요 없다. 폐하, 저와 혼인하시면 됩니다. 그런 말을 라피난 카일에게 두 번이나 뱉게 하는 것도 퍽 잔인한 처사다.
와중에 여전히 한 손이 라피난에게 붙잡혀 있길래, 해시트는 힘을 줘 손을 빼내려고 했다. 그러나 붙잡은 힘이 너무 굳세 빠져나올 수 없었다. 물론 작정하고 뿌리쳤다면 뿌리칠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 라피난이 해시트가 거부하는 일을 억지로 행할 리 없었으므로, 결과적으로 그녀가 그의 손길을 용인한 셈이다.
한차례 성토대회가 지나간 방 안은 너무 조용했다. 라피난이 움켜쥔 손수건이 구겨지는 소리까지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그 소리가 완전히 꺼지기 전에 해시트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죽어도 싫다더니?”
허탈함 반, 황당함 반이 섞인 눈초리로 라피난을 추궁한다. 물론 라피난이 겨우 이 정도에 민망해하리라 기대하진 않았다.
“그렇게까지 말한 적은 없습니다.”
“그거나 이거나!”
“다르죠. 그래도 답변을 드리자면, 그냥 갑자기 마음이 바뀌었다고 해 두겠습니다. 어떤 감정들은 깨달음의 순간이 너무나 찰나여서요.”
“그게 어떤 감정인데?”
“글쎄요.”
라피난이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눈꺼풀이 한 번 여닫힐 때마다 바라보는 방향이 제각각 변화했다. 처음엔 해시트의 얼굴, 다음엔 겹쳐 쥔 손, 귀걸이가 달랑거리는 동그란 귓불, 그리고 핏물이 튄 옷자락과 떨리는 어깨. 그런 것들을 가만히 살펴보다가 대답했다.
“지금껏 가야 하는 길이라서 어쩔 수 없이 걸으시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사사롭게 갈망하는 이 하나쯤 곁에 두셔도 괜찮겠다 여겼죠. 하지만 원해서 그 길을 걷고 계신다면, 그렇다면 제가 낫습니다.”
“진심이냐?”
“예. 폐하께서 사랑하는 남자 대신 제가 그 자리에 있어야겠습니다. 허락하신다면.”
그런 얘긴 좀 더 달콤하게 속삭이는 게 서로에게 예의가 아닐까 싶었다. 아무래도 그는 청혼이랍시고 지껄이는 중이었으니까.
해시트는 꽤 오랫동안 라피난을 바라보기만 했다. 까닭 있는 망설임이었다. 그새 절교한 것이 아니라면 라피난과 이레이는 아직 친구였다.
“후회하지 않겠어?”
“그렇군요. 폐하께서는 벌써 후회하고 계신가 봅니다.”
“아니야.”
“그럼 문제없는 거고요.”
“라피난, 난 지금 네 의사를 묻는 거다.”
“제 의사는 이미 밝혔습니다.”
매끄럽게 받아친 라피난이 갑자기 해시트의 손을 놓고 그녀의 팔뚝을 감쌌다. 지그시 느껴지는 압박감에 해시트가 흠칫 몸을 떤 순간 곧장 질문이 이어졌다.
“제가 두려우십니까.”
흡사 전쟁 포로를 대하는 듯 사무적인 말투였다. 한편으론 이미 한쪽 무릎을 꿇고 있던 터라, 물끄러미 그녀를 올려다보는 자세가 실제 연인에게 청혼하는 기사 같기도 했다. 어느 쪽이든 후회 같은 걸 할 만한 위인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해시트의 입가에 맥 빠진 웃음이 흘렀다.
“왜? 내가 널 두려워해야 할 이유라도 있나?”
“그렇지 않습니다.”
라피난이 즉각 부정했다. 이번에도 해시트는 곧이곧대로 믿을 수 없었다. 애써 묻어 두었던 궁금증이 또다시 머리를 내밀려 했다. 결국 그녀는 라피난을 밀어 내고 책상으로 걸음을 옮겼다. 서랍 속에 숨겨 두었던 서책을 밖으로 꺼냈다.
“이레이의 방에 이런 게 있더군.”
“이리 주십시오.”
라피난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손에 들린 물건을 그의 눈으로 확인한 직후였다. 한달음에 책상으로 다가와 무서운 표정으로 손을 내민 건 그다음이었다. 약속이라도 한 듯 이레이와 똑같은 반응이어서 해시트는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이 책이 뭔지 알고 있군…….”
“읽으셨습니까?”
“조금. 찢겨 나간 내용이 많아서 전부 읽진 못했다.”
“단순한 괴담집일 뿐입니다.”
“그렇게 얼버무릴 거면 진작 그랬어야지. 이제 글렀어. 포기하고 제대로 설명해 봐.”
“무엇을요.”
“내가 두려워해야 하는 게 너희 둘 중에 누구인지.”
붉은 섬 카이렌에서 왔다는 날개 달린 짐승이 둘 중에 누구인지 밝히라는 으름장이었다. 내심 라피난이 ‘별 황당무계한 억지를 다 부리시냐’며 타박하길 기대했던 해시트는 연달아 청천벽력을 맞닥뜨려야 했다.
“그런 것이 그리 중요합니까?”
“…….”
“폐하. 그런 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답변인즉슨 둘 중에 하나가 인간이 아님을 이실직고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해시트의 안면이 무섭게 굳었다.
“너 농담이지?”
“…….”
“라피난!”
재차 다그쳐 보아도 소용없었다.
라피난은 해시트의 허락도 구하지 않고서 창가의 램프를 낚아채 와 불을 붙였다. 그러고는 장식용 촛대에서 초를 뽑아내 그 불씨를 이어받더니 그녀에게 우악스레 손을 뻗었다.
“실례하겠습니다. 폐하.”
“아, 안 돼!”
뒤늦게 그의 의도를 파악한 해시트가 양손으로 서책을 끌어안았지만 라피난이 더 빨랐다. 군더더기 없이 단호한 손길이 순식간에 해시트의 품에서 서책을 앗아 갔다. 두꺼운 가죽 표지 대신 종이 부분에 초를 가져다 대자 금방 불이 붙었다.
그는 불붙은 서책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그리고 램프를 깼다. 쨍그랑. 책에 붙은 불씨가 꺼지기 전에 그 위로 램프의 기름을 몽땅 들이붓는다. 불길이 화르륵 몸집을 불리며 기어코 두꺼운 가죽 표지까지 집어삼켰다.
어떻게 그렇게 빨리 판단하고 움직일 수 있었는지 경이로울 지경이다. 해시트는 라피난이 깨진 램프 조각마저 불길로 내던졌을 때야 버럭 언성을 높였다. 이게 뭐 하는 짓이야! 결코 그녀의 반응이 느린 게 아니라 라피난의 모든 행동이 지독하게 빨랐다. 심지어 사죄까지 일사천리였다.
“죽을죄를 짓고 있죠. 하지만 부디 노여워 마십시오. 그런 사소한 걱정들은 모두 접어 두셔도 좋습니다.”
일련의 모든 행동이 한 점의 흐트러짐도 없이 차분했다. 해시트에게 사죄하기 무섭게 즉각 눈동자를 굴려 타들어 가는 서책을 다시 확인한다. 선명한 녹안이 나이 든 맹금류의 그것처럼 매서웠다. 넘실대는 붉은 불길을 투영한 채로도 냉랭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불길이 꺼져도 절대로 책을 소생할 수 없으리란 확신이 들었을 즈음에야 조용히 한 걸음을 다가왔다.
저벅, 타는 웅덩이를 건너오는 발소리에 해시트의 마음이 바짝 조여들었다. 긴장감이 목덜미를 뒤덮었다. 이레이 앞에서 느끼는 감각과 사뭇 달라 이상했다. 부지불식간에 지척까지 다가온 남자가 굳이 그녀의 귀에 입술을 대고 속삭였다.
“제가 결코 이레이를 죽이지 못하듯이, 그도 절대 저를 해칠 수 없습니다.”
맹세코, 하늘이 두 쪽 나는 한이 있어도……. 나직한 숨결이 귓바퀴를 훑는다.
밀어가 지나간 길을 따라 기묘한 열기가 흘렀다. 의외로 따뜻한 숨결의 흔적에 해시트는 자리에 못 박힌 듯 움직이지 못했다. 죽어도 서로를 죽일 수 없다는 두 남자가 그녀의 발목을 하나씩 붙들어 매고 놓아 주지를 않았다.
*
곧바로 결단 내리지 못하는 해시트에게 라피난은 천천히 고민해 보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본인이 저지른 방화를 말끔히 수습하더니 창문을 열어 실내를 환기한 뒤 혹시 불씨가 살아나지는 않는지 꼼꼼히 확인한 다음에야 꾸벅 허리를 숙이기에 해시트는 뭐라 꾸중할 의욕조차 들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지리멸렬한 동시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이 이어졌다.
고민을 좀 해 볼라치면 서류가 밀려들었고 결단을 좀 내려 볼까 하면 회의가 잡혔다. 무의미한 탁상공론이 이어지는 가운데 이따금 쓸 만한 안건도 오르내리곤 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현실성 있으면서 독창적인 의견을 발탁해 발전시키기란 손이 이만저만 많이 가는 게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눈 깜짝할 새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그동안 라피난은 단 한 번도 해시트에게 청혼과 관련된 화제를 꺼내지 않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업무 보고로 얼굴을 맞대는 사이였으니 기회가 없었다는 건 말이 안 된다.
혹시 이대로 흐지부지 없던 일로 넘어가고픈 게 아닐까?
해시트는 아주 잠깐 의심해 보기도 했다. 그러나 라피난의 성격상 그럴 가능성이 희박, 아니, 전무하다는 건 누구보다 그녀가 가장 잘 아는 바였다. 차라리 정면 돌파를 하면 했지 카일 가문의 장자가 쩨쩨하게 도망칠 궁리를 할쏘냐.
하루에 세 번씩 쓰디쓴 해독제를 황제의 앞에 내어놓고 그녀가 다 마실 때까지 꿈쩍 않는 것만 보아도 그의 대쪽 같은 성격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덕분에 해시트는 라피난이 바라는 대로, 천천히 고민 중이었다.
물론 그녀 또한 여유 부리는 성격은 아닌 탓에 ‘천천히’라고 해 봐야 ‘틈틈이’의 다른 표현에 가까웠다. 매일 밤낮 라피난의 청혼을 수락할지 말지 고민하느라 머리가 빠개질 위험에 처해 있었단 뜻이다.
오늘은 며칠 새 늘어난 두통을 삭이고자 모처럼 대낮 산책에 나서기로 했다. 모처럼 맞이한 휴일이라 가능한 일정이었다.
성 이곳저곳을 쏘다니며 산책을 빙자한 상념에 허우적거리길 한창, 정신을 차려 보니 해시트는 어느 구석진 빨래터에 다다라 있었다. 귀에 익은 목소리가 불쑥 그녀를 불러 세운다.
“폐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