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차라리 언성 높여 화를 냈다면 끝까지 모른 척했을 텐데, 뻔뻔함이라면 해시트도 누구 못잖게 자신 있었으니 말이다.
하필 우연이 안 좋게 겹쳐 오해를 산 것이고, 너의 꼴사나운 오해 때문에 죄 없는 시종이 넷이나 죽었으니 이 사달을 어찌 책임질 거냐며 혼쭐을 내기에도 적당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왜, 제게는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으셨습니까?”
“…….”
“폐하께서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지 저는 아직도 까맣게 모르는군요.”
드물게 괴로움을 감추지 못하는 라피난 앞에서 해시트도 버틸 재간이 없었다. 사정도 모른 채 처형당한 시종들에 대한 죄책감과는 또 다른 감정이었다.
아연하게 그를 바라보던 해시트가 머뭇대며 입술을 벌렸다.
“라피난.”
이런 기분으로 그의 이름을 불러 보는 건 무척 오랜만이었다. 다시 속이 울렁거렸다. 토악질이 올라오는 게 아니라 마음 한 귀퉁이가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그녀의 하나뿐인 가족이자 친구이며 스승인 남자에게 이해받지 못할까 봐, 두려움이 앞섰다.
“라피난. 너는 이 세상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나?”
그에게 이 기분을 외면당한다면 과연 굳건히 버틸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이 몸은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제왕의 재목으로 태어났으면서도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평생 나를 감추고 살아왔다.”
“폐하, 그것은…….”
“알아. 내 잘못이 아니지.”
“…….”
뭐라 말하려던 라피난의 입술이 꾹 다물렸다. 해시트는 억지로나마 미소를 띠었다.
“그래서 이 세상이 잘못되었다는 거다.”
“……폐하께서 짊어지신 짐을 함께 나누지 못한 건 제가 부족해서입니다. 그래도 말씀해 주셨어야 합니다.”
라피난은 짐짓 침착해 보였다. 사실은 입 밖으로 꺼내는 모든 단어를 정성껏 골라 내고 있음을 해시트는 어렵지 않게 알아차렸다. 그가 내리깐 눈꺼풀에 촘촘한 속눈썹이 바릊댔다.
“살아남기로…… 약속하지 않으셨습니까, 저와.”
“일단은 살아남지요. 죽어 마땅한 놈들은 차근차근 죽이더라도 말입니다.”
십 년 전과 같은 말을 꺼내는데도 아주 다르게 읊는다. 시선과 말투, 몸짓까지. 십 년 전과 같은 것이라곤 오직 투명한 녹색으로 빛나는 그의 눈동자뿐이었다. 그런가 하면 대뜸 그녀의 손을 겹쳐 쥐는 손길은 완전히 새로운 것이었다.
해시트의 눈이 동그래졌다. 라피난이 필요하지 않은 신체 접촉을 단 한 번이라도 행한 적이 있던가? 심지어 그냥 겹쳐 쥔 것도 아니고, 온기를 주고받을 듯 단단히 힘을 준다. 그러나 표정만은 무뚝뚝했다.
“저는 폐하를 살리려고 제 모든 걸 걸었습니다.”
“……틀렸거든, 바보야.”
해시트가 허탈한 날숨을 터뜨렸다.
이제 보니 라피난은 그녀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다고 단단히 오해한 모양이었다. 그런 게 아닌데. 정말로 그런 게 아니다. 적어도 헤라꽃 차를 물처럼 마신 이유는 따로 있었다. 차츰 해시트의 얼굴은 웃는 것도 찡그린 것도 아닌 이상한 표정으로 물들어 갔다.
“라피난, 나는 세상을 등지려는 게 아니다. 나는…….”
이럴 땐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라피난도 여기까지는 그녀에게 가르쳐 주지 않았었다. 문득 해시트는 이런 때조차 동요 없이 경청하는 라피난의 침착함이 부러워졌다. 아니, 사실은 늘 그랬다. 그토록 냉철한 이성과 감정에 좌지우지하지 않는 판단력을 염원했다. 그녀도 그처럼 되고 싶었다. 그리하여.
“이런 말도 안 되는 세상을 내 대에서 끊어 버리고 싶다.”
쥐어짜듯 해시트가 고백했다. 곧바로 단언했다.
“약속하마. 반드시 가장 존경받는 성군으로 황가를 멸족시키겠다.”
“…….”
“다시는 이 땅에 황제를 만들지 않을 거야. 내가 살아서 이뤄 내야 할 마지막 임무는 제국에 새로운 세상을 선물하는 것이다.”
잘못된 지금의 세상 대신에 완전히 새로운 세상을 전해 주겠다고, 그녀의 결심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지난날 해시트는 오랫동안 말 못 할 걱정에 시달려 왔다. 마침내 벼르던 사명을 그 앞에 꺼내 놓았을 때 혹시 그것을 부정당하면 어쩌나 이따금 악몽을 꿀 때도 있었다. 이 사명은 곧 그녀의 존재 이유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난하던 걱정과 달리 막상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다만 길게 침묵하는 입술이 한참이나 잘게 떨렸다.
“…….”
그는 내내 무표정했고, 여전히 투명하게 빛나는 초록색 눈동자로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믿을 수 없게도 눈자위에 물기가 고여 있었다. 매끈하게 일렁이는 물기가 금방이라도 떨어져 내릴 것처럼 무겁게 아롱져 갔다.
라피난은 용케 눈물을 떨어뜨리지 않고, 그래서 눈 한 번 깜박이지도 않은 채 묵묵하게 해시트를 바라보기만 했다.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짧은 반문을 던졌다.
“새로운 세상이라니요.”
목이 메어 깊이 잠긴 목소리였다. 그 또한 처음 듣는 생경한 말투와 음성이었기에 해시트는 약간 횡설수설했다.
“앞으로 나는……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위대한 업적을 쌓아, 그것을 토대로 황권을 강화하고, 반대로 신관과 대신들의 권력을 조금씩 앗아 올 것이다.”
어차피 수없이 속으로 되뇌었던 말들이다. 잠시 당황했을지언정 해시트의 목소리엔 금세 단단한 힘이 실렸다.
“더 이상 뒤에서 정적을 죽이고 앞에서 슬퍼하는 짓은 하지 않겠다. 마땅히 죽여야 할 놈이 있다면 모두가 보는 앞에서 처형해서 본보기로 삼을 것이야. 나는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무소불위의 권력자가 될 거다. 그래서 이민족의 종교를 물밑에서부터 하나씩 수용해 나가고, 전쟁 노예를 해방하고, 이방인을 박해하던 이들에게 똑같은 고통을 맛보여 주고, 약한 것이 잘못된 것이라 말하는 이들이 손가락질받는 세상을 만들 거다.”
“…….”
“섬기는 신이 늘어나면 신관의 권위는 자연스레 줄게 된다. 많은 노예를 거느릴수록 막대한 세금을 물게 한다면 노예 해방도 꿈같은 얘기는 아니야. 시간이 아주 오래 걸리겠지. 당연히 하루아침에 이룰 욕심은 없어. 조바심 갖지 않고 천천히……. 알맞게 걷은 세금을 알맞은 곳에 쓰고, 백성들에겐 자비롭되 권력을 탐하는 자들을 엄벌하다 보면……, 모두에게 사랑받는 성군인 동시에 누구나 두려워하는 폭군이 된다면……!”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기침 때문에 잠시 멈춰야 했다. 피를 한 움큼이나 토한 몸으로 한꺼번에 너무 많은 말을 했더니 어지럼증이 돌았다. 라피난은 콜록거리는 해시트를 지켜보다가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천천히 말씀하십시오.”
“……나는 결국 성 안의 모든 이들과 척을 지게 되겠지만 상관없어. 라피난.”
손등으로 입가를 닦아 낸 해시트가 형형한 눈빛으로 라피난과 시선을 맞췄다.
“나는 너만 있으면 된다.”
“…….”
“라피난. 정말 너만 있으면 돼.”
“…….”
“네가 이 몸의 눈이 되어 준다면.”
선황의 사생아와 그의 어미조차 죽이지 못하는 물러 터진 심성으로 떠들어 대기엔 심히 드높은 이상이다. 그러나 일말의 허풍이나 거짓은 없었음이라. 급기야 해시트는 라피난의 옷깃을 움켜쥐고 버럭 소리쳤다.
“이 몸이 정말로 폭군으로 변해 버리지 않도록, 역사에 티끌 한 점 없이 완벽한 황제로 기록될 수 있도록! 알겠나? 네가 계속 이 몸을 감시하고 곁에 머물러라. 내가 후계를 남기지 않고 생을 마감할 때까지!”
“그것이 새로운 세상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불쑥 라피난이 질문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알면서도 외면하고 싶은 것은 아니고? 해시트는 엉망으로 입매를 뒤틀었다.
“황가의 대가 끊어지면 백성들이 직접 대표를 뽑아 정치에 참여하게 만들 거다.”
“반말이 만만치 않을 텐데요.”
“하늘과 땅 정도는 뒤집혀야 세상을 바꿀 수 있겠지.”
“아니요. 무소불위의 권력자가 사라지면 신관들과 대신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새 황제를 추앙할 겁니다.”
“그럴 수 없어. 내가 재위하는 동안 그들이 가진 모든 힘을 빼앗을 테니까.”
“무기를 빼앗긴 장수라고 해서 위험하지 않은 건 아니죠. 세력이란 그리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만일 그렇다 하더라도, 백성들이 새로운 황제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어찌 성스러운 황가의 핏줄을 오염시키느냐 여기저기서 폭동이 일어나고 반란이 끊이지 않겠지.”
“어떻게 자만하십니까.”
“말했잖아. 모두의 존경을 받는 가장 완벽한 황제로 죽겠다고.”
그 말이 꼭 살지 않고 죽겠다는 뜻으로 들렸는지 라피난이 질끈 두 눈을 감았다. 해시트는 그에게 붙잡히지 않은 손으로 살며시 그의 어깨를 다독여 주었다. 그런 뜻이 아니다. 불안해하지 마라…….
“나는 감히 더럽힐 수 없는 성역이 될 거야. 그래서 만민이 평등한 새로운 세상에 유일하게 특별한 존재로 남을 생각이다. 내 손으로 아바마마를 죽이던 순간에 나는 이미 인간이 아니게 되었다. 그러니 누구에게도 인간 취급 따위 받지 않아도 좋아. 라피난 너도 알고 있지 않으냐? 내가 세상을 바꿀 숙명을 타고났다는 걸. 아니, 네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도 내가 그렇게 만들 것이다.”
티끌처럼 사소한 흉조차 용납하지 않으리라. 뚜렷한 각오는 살심과 닮아 있었다.
“그러려면 명예롭게 황족을 멸족시켜야 해……. 누구도 트집 잡을 수 없게…….”
그렇듯 스스로의 목숨을 담보로 잡을 때조차 망설이지 않았으니, 하물며 모두의 입에 오르내릴 어리석은 선택을 할 가능성은 환상수에 수렴했다. 고작 사랑 때문에.
사랑.
마침내 라피난은 무언가를 깨달은 사람처럼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서 신랑감이 죽어 나가도 계속 새 사내를 찾으시는 겁니까? 이레이를 사랑하면서 아니라고 우기시고요.”
“우습군. 내가 그 자식을 사랑하는 게 중요한가? 짐은 황제인데.”
해시트는 그 하찮은 사랑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사랑이 얼마나 하찮은 짐짝인지 밝힌 이상 거리낌 없었다.
어느덧 라피난의 눈자위에 머물러 있던 눈물도 거짓말처럼 말라붙어 버렸다. 오직 맑은 이채만이 남아 있다. 칼날 같은 이성이 도사리는 눈빛, 긴 세월 해시트가 동경해 마지않았던.
그의 뼛속 깊은 냉정함은 아마도 이런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
과연 맞는 말이다. 황제에게 삿된 감정이 허락될 리 없다. 순식간에 그런 현실적인 결론으로 이르렀을 것이다.
분명 그렇기 때문에 그녀가 만백성의 사랑을 받는 황제일 터. 누구라고 그녀를 은애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이냐. 그야 어느 전설 속 짐승의 심장은 얼음장보다도 차가워서 사랑을 모른다고는 하지만.
불현듯 라피난은 손바닥으로 자신의 가슴께를 짚었다. 꾸욱, 심장의 박동을 재는 사람처럼 손을 떼어 내지 않고 그대로 입을 연다.
“폐하, 그러하시다면…….”
메마른 눈동자 위로 뜻 모를 확신이 고여 들고 있었다. 폐하. 진실로 그러하시다면.
“저와 혼인하시면 됩니다.”
기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