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시트와 가여운 짐승들-43화 (42/104)

43화.

“…….”

“내키지 않으십니까?”

라피난이 채근했다. 당연히 해시트는 내키지 않았다.

이미 아비와 후견인을 모두 잃은 젊은 여자로부터 여덟 살짜리 어린 자식마저 떼어 내 국경지대로 보내 버린 지 석 달이 채 되지 않았다. 굳이 역적으로 몰아 죽여 버리거나 평생 감옥에 가둬 둘 필요성이 있을까 의문이 드는 것은 비단 해시트의 심성이 허약해서가 아니리라.

말이야 바른말이라고, 그 여자는 선황의 아들인 제릴을 황가에 입성시키는 데만 목적을 두었을 뿐 달리 정치적 야심을 드러낸 적도 없었다. 과거에 목격했던 선황과의 밀회 장면을 떠올려본다면 글쎄, 단순히 그를 사랑했을 뿐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해시트가 짐작하기에는 그랬다.

혀를 찰 만큼 물컹한 추측을 거듭하고 있을 즈음, 불현듯 이어진 라피난의 목소리가 해시트의 상념을 끊었다.

“폐하. 그녀를 죽이기 싫으십니까?”

고저 없는 질문에선 특별한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 라피난에게 익숙한 해시트도 차분히 대답했다.

“남들 눈에 보복처럼 보일 거다. 당분간은 미결 사건으로 둬.”

“예. 그러죠.”

“……웬일로 바로 물러서지?”

“그럼 안 됩니까? 폐하께서 꼭 극적인 논쟁을 원하신다면야 강력하게 의견을 피력해 드리겠습니다만.”

“아니, 됐다.”

해시트가 질색하며 손사래 쳤다. 그가 너무나 진심임을 잘 알기에 질 나쁜 농담으로 매도하지 못하는 게 애석할 따름이었다. 그녀는 잇따라 헛웃음을 터뜨리곤 책상에서 몸을 일으켜 티 테이블을 가리켰다.

“잠깐 앉지. 논할 일이 있다.”

차 한잔 하면서 혼인 얘기를 꺼낼 심산이었다. 겨우 보름 전에 했던 말을 번복하려니 별수 없이 조금 민망했다. 일단 차임벨부터 울려놓고 소파에 앉은 해시트가 부러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운을 뗐다.

“새 신랑감을 찾아야겠어. 하루빨리.”

“알겠습니다.”

라피난은 예상보다도 더 담박하게 반응했다. 이래서야 차를 준비시킨 해시트의 성의가 무색해질 지경이다. 허어, 해시트는 헛숨을 찼다.

때마침 차 시종이 노크와 함께 집무실로 들어왔다. 양손으로 다과 쟁반을 받쳐 들고 공손히 무릎을 굽히는 모습이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해시트는 쟁반을 들고 있는 차 시종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돌연 미간을 찌푸렸다.

“이상하군. 저 앤 이 시간에 근무하는 아이가 아닌데……. 왜 아직 여기 남아 있지?”

이미 두 시간 전에 다른 시종과 교대했어야 할 아이였다. 의아해하는 그녀에게 라피난이 대답해 주었다.

“다른 시종들이 자리를 비워서 그럴 겁니다.”

“응?”

해시트가 그를 돌아보았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제가 전부 처형했거든요. 몇 시간 전에.”

“……뭐라고?”

“제게 즉결 처형권을 주시지 않았습니까, 폐하께서.”

라피난은 태연하게 받아쳤다. 해시트의 반문이 결코 그런 뜻이 아님을 모를 리 없을 텐데도 뻔뻔하게 모르쇠로 일관하면서, 슬며시 턱을 치켜들어 차가운 눈으로 시종을 응시하며 부연했다.

“설마 처형 사유를 모르시지는 않겠지요. 최대한 빨리 차 시종을 새로 교육해 출근시키라고 일러두었으니 염려 마십시오.”

그런 충격적인 소리를 지껄이는 내내 표정에 미동 하나 없었다.

해시트는 멍하니 눈꺼풀을 여닫았다. 깜빡.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그녀는 도저히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전부 다 죽였다는 거냐? 사람 넷을?”

“그럼 설마 살려 두실 생각이셨습니까?”

또다시 반문한 라피난이 시종에게서 쟁반을 건네받으려는 듯 팔을 뻗었다.

시종의 손끝이 달달 떨려 찻주전자가 엎어지기 직전이었다. 얼굴은 사색이 되다 못해 아예 잿빛이었다. 톡 건드리면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성싶다. 조금 전 해시트와 라피난의 대화를 들은 것치고는 의연한 편이었다. 용케 라피난에게 쟁반을 건넨 뒤에는 황급히 허리를 숙여 눈을 내리깔았다.

“그, 그럼 저는 이만…….”

“나가.”

해시트는 전에 없이 싸늘한 음성으로 시종을 물렸다. 달칵, 문 닫히는 소리가 울려 퍼지자마자 라피난이 해시트의 찻잔으로 주전자를 기울였다.

침착한 목소리가 계속됐다.

“그래서 오늘 드실 차는 오랜만에 제가 준비해 봤습니다.”

“…….”

“드시죠.”

스윽, 물결 일렁이는 찻잔이 해시트의 앞으로 내밀어졌다.

해시트는 말없이 그 안으로 시선을 기울였다. 탁한 감빛으로 넘실대는 찻물에서 쓴 냄새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런 불길한 색과 향을 가진 차를 지금껏 듣도 보도 못 했다. 독약이라면 모를까.

“폐하. 식기 전에 드십시오.”

라피난이 재차 차를 권했다. 그러는 자신의 찻잔에는 찻물을 채우지도 않은 채였다. 사탕 한 알을 줄 때조차 포장이 꽉 묶인 새것만을 쥐여 주던 그답지 않다……. 해시트는 무심코 질문을 던졌다.

“너는 왜 안 마시나.”

“잘하셨습니다. 그 정도 의심은 하셔야죠.”

그제야 라피난의 입술이 희미한 호선을 그려 냈다. 해시트가 그리 묻지 않았다면 얼마든지 호된 잔소리를 퍼부었을 터다. 누군가 대접하는 음식을 취할 땐 언제나 독살을 의심하라고 일러 준 이가 바로 라피난이었으니까. 그런데도 지금은 묘하게 비꼬는 느낌을 지우기 힘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감히 황제에게 눈치를 주는 신하가 어디 있느냐, 따지기엔 사실 그와는 처음부터 이런 관계였다. 라피난은 칼날 같은 이성을 내세워 태생이 유약한 해시트를 매사 혹독하게 몰아붙이고,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그녀의 목숨을 내일도 붙어 있게 했다. 오늘처럼.

“하나만 여쭙겠습니다, 폐하.”

자신의 찻잔에도 마저 찻물을 채운 라피난이 망설임 없이 차를 들이켰다. 탁, 소리가 나도록 찻잔을 내려놓는다. 해시트는 내내 굳은 표정으로 그를 지켜본 끝에 마지못해 찻잔을 움켜쥐었다.

“해 봐.”

결국 찻잔에 입술을 묻으며 대답했다. 라피난은 추궁에 뜸 들이지 않았다.

“하루라도 빨리 혼인을 원하시는 분께서 왜, 헤라꽃의 꽃잎과 가시와 잎사귀와 뿌리를 따로따로 달여 동시에 복용하셨는지 궁금합니다.”

“…….”

“왜 스스로 독약을 삼키셨는지요.”

듣지 못한 척 입 안으로 차를 쏟아부었다.

역할 정도로 쓴 냄새가 울컥 식도를 타고 올라왔다. 진짜 독약도 이것보다는 맛있겠다. 절대로 평범한 차가 아니란 확신이 치밀자 해시트는 주먹으로 입가를 틀어막고 라피난을 노려보았다. 우욱. 여차하면 라피난의 옷을 끌어다 토할 작정이었다.

어찌나 맛이 쓴지 인상을 찌푸리기도 전에 혀가 마비되는 듯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실제로 마비된 게 맞았다. 조금 지나자 아무런 맛과 향기도 느낄 수 없었다. 천만다행히 시력과 청력은 멀쩡해서 곧 이어진 라피난의 말과 행동을 한순간도 놓치지 않을 수 있었다.

“알고 계셨겠죠. 헤라꽃의 각 부분은 따로 취하면 몸에 좋은 약이 되지만, 동 기간에 모두 복용하면 치명적인 독약이 된다는 사실을요. 중독 증상이 심하면 죽음에 이를 수도 있고, 운 좋게 치사량을 조절해서 살아남는대도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 됩니다. 그 또한 잘 알고 계셨겠죠. 벌써 몇 년째 헤라꽃 꽃잎을 달여 드셨으니까요.”

이 순간 그의 목소리 틈으로 새어 나오고 있는 감정은 놀랍게도 절제를 실패한 원망이었다.

해시트는 당황했다. 그 원망이 해시트가 아닌 라피난 스스로를 책망하고 있음에. 그러나 잠시뿐이었다. 갑자기 왈칵, 식도를 까뒤집은 불쾌한 냄새가 그녀의 모든 사고를 멈췄다.

마비됐던 감각이 돌아오며 구토감이 밀려들었다. 급히 손바닥을 펼쳐 입술을 틀어막았으나 속수무책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손바닥이 흥건해질 정도로 피를 토해 낸 뒤였다.

쿨럭! 기침이 연달았다.

“이게 무슨……! 큭!”

숨 쉬기 괴로운 기침과 위장을 무자비하게 비트는 토기가 쉴 새 없이 휘몰아쳤다. 설마 정말 독극물이었나 의심스러울 정도의 고통이었다. 검붉은 피가 마구 터져 나오며 손바닥을 넘어 손목과 바닥까지 줄줄 샜다.

라피난은 해시트가 고통에 몸부림치는 동안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이윽고 그녀의 발작이 잦아들기 시작했을 때야 여느 때와 같이 차분한 몸짓으로 품에서 손수건을 한 장 꺼냈다.

“해독제입니다.”

그가 손수건을 들고 해시트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어앉으며 말했다.

“앞으로 매일 식후에 한 잔씩 드십시오. 오늘은 첫날이라 반작용이 컸지만 내일부터는 그럭저럭 견디실 만할 겁니다.”

“하아, 하아…….”

해시트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이제 조금 살 만해졌을 뿐 아직은 욕할 기운도 없었다.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아 주는 라피난의 손조차 쳐 내지 못하고 그저 눈물 맺힌 눈으로 노려보자, 라피난이 별수 없다는 듯 눈썹을 으쓱 들었다 놓더니 별안간 입가에 이어 그녀의 손까지 슥슥 닦아 주기 시작했다.

“그래도 피가 완전히 검은색은 아닌 걸 보니 목숨에 지장이 갈 수준은 아니었나 보네요. 다행입니다.”

“젠장……. 어떻게 알았지? 이레이가 알려 줬나?”

우뚝, 해시트의 손등을 받쳐 들고 꼼꼼히 손수건 질을 하던 라피난의 손이 찰나 멈췄다가 움직임을 재개했다.

“이레이는 이 상황을 알고 있었단 말씀이군요. 참고하겠습니다.”

“응? 아, 아니야, 그놈도 말렸단다…….”

“그런데 제겐 안 알렸고요. 잘 알겠습니다.”

“그런 게 아니라, 으, 으윽……. 잠깐, 라피난. 나 골 울리는데…….”

“여기 물 드십시오.”

라피난이 잽싸게 미지근한 물을 대령했다. 미리 준비해 두고 있던 게 확실한 속도였다. 혹시 엄살을 부려 상황을 모면한다는 오해를 사지 않도록 해시트는 단숨에 물 한 컵을 다 비워 냈다. 와중에 라피난이 정말로 이레이를 심문할까 봐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남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라피난은 해시트가 물컵을 내려놓자마자 이제 기다려 줄 만큼 기다려 주었다는 듯 매섭게 그녀를 다그쳤다.

“왜 이런 짓을 벌이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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