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시트와 가여운 짐승들-42화 (41/104)

42화.

“이봐.”

“응.”

“우리는 친구인가?”

이레이의 만면이 즉각 이지러졌다. 해시트는 뒤늦게 질문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이게 진짜 나랑 장난치고 싶어서 이러나……. 뭐? 친구?”

짓씹는 기색이 겨우 욕설만은 참고 있는 게 역력했다. 해시트는 당황했다. 그것도 상당히.

이게 아닌데. 서책에서 읽은 내용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아서 저도 모르게 꺼낸 질문이었다. 그렇다고 곧이곧대로 이레이에게 밝힐 수도 없는 노릇이라, 그녀는 속으로 진땀을 뻘뻘 흘리며 겉으로는 여느 때처럼 무심함을 가장해야 했다. 그래 봤자 입으로는 변명을 쥐어짜는 중이다.

“그러게. 생각해 보니 너와 우정을 나눈 기억은 별로 없군.”

“우리가 나눈 게 뭔지 내가 정확한 단어로 알려 줄까?”

“하지 마. 하기만 해. 하면 죽여 버린다. 진짜 죽일 거야.”

“너야말로 결혼하겠다는 수작 한 번만 더 부려 봐. 미리 말해 두는데 이번엔 한 놈으로 안 끝나.”

사소한 말실수로 시작된 논쟁은 결국 살벌한 협박으로 이어졌다.

또 이런 식이다. 해시트가 당황해서 마음에 없는 소리를 하면 이레이는 기다렸다는 듯 당장 실행 가능한 미친 짓을 예고한다. 이때 해시트가 귓등으로도 안 듣는 척을 하면 옳다구나 실감 나는 묘사를 더해 그녀의 꿈자리를 뒤숭숭하게 만들 것이다.

아무리 사람 목숨을 파리 새끼보다 못하게 취급하는 놈이라지만 어째 날이 갈수록 더했다. 하기야 전쟁터에서 날뛰던 모습을 떠올린다면 파리 새끼는커녕 모래알보다 못한 존재로 보는 게 분명했지만…….

“이레이.”

이제 해시트는 떨리는 음성을 숨기지 않았다. 지금이야말로 그와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할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황제가 됐다고 끝난 게 아니다. 내겐 여전히 해내야 할 사명이 많아. 그러려면 대신들의 협조가 필요하고, 일단은 그들에게 신뢰를 얻어야…….”

“그놈들 전부 죽여 줄까?”

“뭐?”

“말만 해. 지금껏 그랬던 것처럼.”

“…….”

“전부 죽여서 아무것도 거리낄 것 없게 만들어 주마.”

이레이는 해시트의 말을 끊고 잇따라 차갑게 부연했다. 베일 듯 날카로워진 그의 눈빛에 해시트의 눈동자도 서서히 식어 갔다.

그래 지금껏, 이 남자의 손에 몇 명의 정적이 죽어 나갔는지 단박에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결코 그녀에게 충성을 맹세하지 않으면서 필요할 때만 세상에서 제일가는 충신 흉내를 냈다.

그래서 그가 해시트를 위해서 살생을 일삼는 것인지, 살생을 일삼기 위해 그녀 곁에 붙어 있는 것인지 혼란스러워하기도 했었다.

혼란이 사그라든 자리에 희미한 분노가 자라기 시작했다. 해시트는 걸음을 물려 싸늘하게 그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황제가 되었는데도 계속 그렇게 살아야 하나?”

왜?

왜 그래야만 하지?

그 질문에 이레이가 진지하게 대답하기 전에 속사포처럼 쏟아 냈다.

“나는 앞으로 얼마나 더, 죽여 마땅한 자들을 낙인찍어 뒤에선 그들을 죽이고 앞에선 추모해야 하지? 그러다 내 판단력이 흐려지면? 입바른 말 대신 입에 발린 소리를 쫓게 된다면? 충언이 두려운 나머지 죄 없는 자를 죽이라 명한다면!”

해시트에게 ‘죽여 마땅한’ 이들을 일깨워 준 라피난은 그래도 상관없다 할 것이다. 기실 그는 대의를 위한 죽음에 죄책감을 느낄 군자가 아니니까. 그에게 대의는 곧 미케나이며 미케나인즉슨 해시트이니까. 그 이치가 정확하게 라피난이 그녀의 생사에 목숨 걸게 했을 뿐이다.

하면 이레이는?

이레이는…… 대의 같은 것 없이도 해시트의 뜻에 따라 무수한 목숨을 앗는다.

“나는 언젠간 두려움조차 잊어버릴지 모르지. 수십, 수백, 수천, 어쩌면 수만 명의 목숨이 더는 무겁게 느껴지지 않을지도 몰라. 훗날엔 내 백성들이 죽어 나가도 눈 하나 깜짝 않는 끔찍한 황제가 될 수도 있지.”

그리하여 해시트가 가장 두려운 것은 그 누구도 이레이와 라피난을 죽일 수 없다는 점이었다. 아무도 막을 수 없는 검을 양손에 쥐고 휘두르다가 휘둘려 버린다면.

“이레이, 너는 정말 이 몸이 그렇게 되기를 원하나?”

딴에는 마지막이란 심정으로 몰아붙였지만 이레이는 그녀가 쏟아부은 성토 중 그 어떤 것도 곱씹지 않았다. 줄곧 해시트를 내려다보는 눈빛에는 안타까움이 아닌 야속함만이 변함없었다.

“알 게 뭐야. 그딴 건 라피난에게나 물어봐.”

그러고는 꽉 이를 악물어 버틴다. 일순 불거진 턱 근육이 그가 얼마나 화를 참고 있는지 일러 주었다. 네가 성군이 되든 폭군이 되든 알 바 아니라고, 입 밖으로 내는 순간 뺨을 얻어맞을 소리만은 기꺼이 참아 준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또, 또 이런 식이다. 해시트는 해시트대로, 이레이는 이레이대로 속이 상해 서로를 힘껏 노려보는 결말. 아주 지긋지긋한데 이러지 않는 방법을 몰라서 결국엔 상대를 할퀴려다 제 마음에 생채기는 내고 만다.

한참의 침묵 끝에 해시트가 말했다.

“그게 바로 내가 널 버려야 하는 이유다.”

제아무리 정원을 떠나며 아주 작은 목소리로 읊조렸을지언정 이레이가 듣지 못했을 리 없었다. 당연히 들으라고 한 말이다.

상처받은 만큼 상처 주고 싶어서.

여전히 철이 덜 든 유치한 인간이라서, 이상하게도 그의 앞에선 자꾸만 밑바닥을 보이게 돼서. 그래서.

이런 못된 심보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그것만은 절대로 알고 싶지 않았다.

*

한낮의 황제궁에는 때아닌 손님이 찾아와 있었다.

“폐하의 차 시중을 드는 게 너냐.”

황제 해시트가 잠시 외출한 사이 홀로 황제궁을 방문한 이는 명실상부 황제가 가장 아끼는 충신, 카일 재상이었다. 라피난의 부름에 황급히 뒤뜰로 따라 나온 시종은 그의 서늘한 기세에 눌려 괜히 눈치를 보다가 대답했다.

“그렇습니다만, 재상님께서 어쩐 일로 저를 불러내셨는지…….”

“너 혼자인가?”

“예?”

“다과 담당이 너 혼자냐고 물었다.”

라피난이 틈 없이 다그쳤다. 항간에 무자비하기로 소문이 자자한 카일 가문의 장자답게 한 마디 한 마디를 꺼낼 때마다 서슬이 새파랬다. 성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시종은 지레 겁을 집어먹고 태도를 빠릿빠릿하게 고쳤다.

“아니오! 그럴 리가요. 저 말고도 스무 명은 거뜬합니다.”

“잡일꾼 말고, 직접 찻잎을 골라 우리는 사람만 대라.”

“어…… 그렇다면 네 명이 더…….”

“불러내.”

또다시 말허리를 잘라 낸 명령이 떨어졌다.

이번에도 한 번에 알아듣지 못한다면 화를 면치 못하리란 직감이 시종의 머릿속을 관통하긴 충분했다. 부랴부랴 숙소로 달려 들어간 시종이 이내 세 명의 동료를 달고 뒤뜰로 돌아왔다. 그리고 라피난이 묻기도 전에 아는 바를 몽땅 늘어놓았다.

“한 명은 근무 시간이라 지금 숙소에 없습니다. 폐하의 일과를 다섯으로 나눠 저희 다섯 명이 교대로 근무하거든요. 서로 인수인계하는 업무가 전혀 없는 터라, 질문이 있다면 각자 물어보셔야 할 겁니다!”

이 정도면 흠잡을 데 없는 서술이었다. 내심 뿌듯함에 찬 시종과 달리 라피난은 마뜩잖아했다.

“일과를 다섯 등분이라. 근무 시간이 남들에 비해 짧겠군.”

“아, 예. 그거야 폐하께서 배려해 주신 덕분에…….”

“내가 질문 하나를 할 텐데 넷이 동시에 대답해라. 반 박자라도 늦는 사람은 죽는다.”

“예?”

시종 넷의 눈이 똑같이 휘둥그레졌다. 그들이 당황하든 말든 라피난은 기다리지 않고 검을 뽑아 들었다. 스릉! 날카로운 마찰음 끝에서 그가 물었다.

“폐하께 올리는 차의 이름을 말해.”

*

해시트는 결심했다. 역시 새 남편감을 찾는 게 좋겠다고. 어느덧 휘캄의 차남 장례식이 끝난 지 보름이 지나가고 있었다.

달빛 아래서 이레이와 설전을 벌인 것은 겨우 이틀 전이다. 그 이틀 만에 황제로 하여금 혼인에 대한 결의를 재차 다지게 하였으니 과연 제국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전쟁 영웅다웠다.

그나마 라피난이 성 곳곳을 돌아다니며 선대에 해결되지 않은 귀찮은 일감들을 속속들이 찾아내 해시트의 책상 위에 덥석덥석 올려 준 덕분에, 해시트는 쉴 틈 없이 일만 하느라 이레이의 생각을 뒷전으로 미룰 수 있었다.

그녀가 지친 얼굴로 서류를 집어 들었다.

“이러다 과로사하겠군.”

“농담이 지나치십니다.”

쿵, 오늘도 어김없이 한 뼘 두께의 종이 더미가 책상에 내려앉았다. 해시트의 불만을 질 나쁜 농담으로 일축한 라피난이 거두절미 업무 보고를 시작했다.

“맨 아래는 변두리 지역의 상수 사업에 대한 제안서입니다. 이 년 정도 기간을 투자하면 주기적으로 돌아오는 가뭄을 예방할 수 있으리라 예상됩니다. 그리고 중간엔 국경지대에 쌓인 시체가 부패하면서 독수리 떼가 출몰한다는 상소문입니다. 몇 가지 대처 방법을 첨부했으니 검토해 주시죠. 마지막으로 맨 위의 석 장은 이레이 린 대장이 쓴 수사 보고서인데, 발로 썼는지 도저히 알아볼 수 없는 악필이라서요. 일단은 직접 보시라고 가져와 봤습니다만…… 보기 싫으시다면 찢어 버리겠습니다.”

저 깐깐한 성격에 하필 이레이의 이름을 가장 마지막에 언급한 데는 다 이유가 있을 터였다. 해시트는 그만 정신 차리고 일이나 열심히 하라는 그의 언질을 잘 알아들었단 뜻으로 떨떠름하게 눈을 흘겼다.

펜 끝으로 맨 위 종이 석 장을 옆으로 밀어 대충 떨구자, 라피난이 기다렸다는 듯 회수해서 북북 찢었다. 아무렴 사정 다 아는 판국에 소설로 쓴 수사 보고서 따위를 보고 있을 시간과 정성은 없었음이다.

“살인 사건 수사는 알아서 처리해라. 무고한 사람한테 누명 씌우는 것만 아니면 상관없어.”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기왕 폐하와 척진 디어 가문에게 뒤집어씌우는 게 어떨까 싶네요.”

“뭐?”

해시트의 눈썹이 휘어졌다.

“세르히라 양에게?”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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