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해시트는 가능한 경우의 수를 몽땅 끄집어내 보았다. 허무맹랑한 상상력을 발휘하길 마다치 않았다.
매사 칼날 같은 이성을 위시하는 라피난의 냉정함과 당최 사람 새끼라고는 믿기 꺼려지는 이레이의 강인함을 떠올렸다. 곰곰이 돌이켜 보면 라피난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겉모습에 별반 차이가 없었다. 어릴 땐 노안이다가 나이 들수록 점점 동안이 되는 외모의 전형이라고 막연히 생각해 왔으나 아예 노화가 멈춘 것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더군다나 라피난의 머리카락은 얼핏 보면 백발로 보이는 밝은 금색이었으니까. 서책에서 밝힌 늙은 드래곤의 특징과 딱 맞아떨어졌다.
다만 그렇게 따진다면야 이레이도 지난 몇 년간 전혀 나이 든 느낌이라곤 없는 데다가, 라피난과는 반대로 선명한 붉은빛 머리카락을 자랑하는 것까지 어린 드래곤의 특징에 얼추 부합했다. 결국엔 끼워 맞추기인 셈이다.
무엇하나 그냥 흘려 넘길 수가 없는데 그렇다고 제대로 된 확신이 드는 증거도 없었다. 이 의심 자체가 그저 시간 낭비는 아닐까 떨떠름해하던 해시트가 불현듯 인상을 찌푸렸다.
“나는 아직 그놈 나이도 모르는군.”
밤이 깊어서 더 늦기 전에 잠을 청하고자 침대에 누웠을 때다. 예고 없이 치민 의문에 그녀는 쉽게 눈을 감지 못하고 빠르게 껌뻑였다. 이레이는 몇 살일까?
라피난은 그의 나이를 알고 있을까? 왜 여태 이레이에게 나이를 물을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혹시 이레이가 의도적으로 숨긴 것이었나? 아니면 이미 들었는데 해시트가 기억하지 못하는 건 아닐까?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손도 잡아 봤고 입술도 부딪쳐 봤는데 고작 나이를 몰라서 답답해했다. 애초에 그런 걸 알 바 아닌 사이라고 먼저 선을 그어 버린 쪽이 그녀였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의 남편감을 셋이나 끔찍한 방법으로 죽여 버린 건 저쪽이었으니까. 그가 제국의 안위를 위협하기 시작한 이상, 이제 해시트는 이레이 린에 대해서 속속들이 알아야 할 의무가 생겼다.
해시트는 이불 속에서 꿈지럭 돌아누웠다. 들릴락 말락 한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이제 안 오려나.”
내뱉은 뒤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입술을 앙다물 따름이다. 듣는 이 없이 혼잣말로 끝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커튼 틈으로 내리쬐는 달빛에 키가 큰 그림자가 겹쳐지는 일은 없었다. 석방 이후 이레이는 단 한 번도 해시트의 방에 찾아오지 않았다. 석방 당일 그의 처소에서 우연히 마주친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 조우였다.
다시 말해 그녀는 찾아오지 않는 불청객을 기다리느라 며칠째 밤잠을 설치는 중이었다. 올까 봐 두려워 긴장하는 것인지 영영 오지 않을까 봐 불안해 걱정하는 것인지, 그것만은 여전히 들여다보기 전이다.
정작 감옥에 가둬 두었을 땐 멋대로 들락거리며 시체의 목을 가져다 놓더니만 무슨 심경의 변화인지 알 수 없었다. 헤아리기 힘든 타인의 정신머리를 추측하고 있자니 해시트는 새삼 모든 것이 괘씸하기 이를 데 없었다.
도통 깊이 잠들지 못하는 그녀가 이레이가 다녀갈 때만 세상모르고 깊은 잠에 빠졌었나 보다. 저쪽에선 좋다고 남의 자는 얼굴을 실컷 구경하고 갔겠지. 대관절 누가 곤히 잠든 옆에 눈 없는 목을 두고 갈 생각을 하느냔 말이다. 역시 제정신이 아닌 게 분명하다.
결국 오던 잠도 달아나 버리고 말았다.
벌떡! 불시에 침대 밖으로 뛰쳐나온 해시트가 손에 잡히는 대로 겉옷을 낚아챘다.
*
무작정 발길 닿는 대로 걸었는데도 결국 도착한 곳은 눈에 익은 장소였다. 옛 성벽을 확장하느라 허물었던 자리. 돌담의 흔적을 따라 아무렇게나 피어난 꽃이 아름다우면서도 쓸쓸한 곳.
그녀는 이 장소에 와 본 적 있었다, 딱 한 번. 이레이 린과 함께.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러나 오늘부로 두 번째가 되어 버렸다.
“이런 누추한 곳은 금방 잊어버릴 줄 알았는데.”
해시트를 발견한 이레이가 그녀에게 짧은 시선을 두었다 떼어 내며 말했다. 못내 토라진 목소리였다. 정말이지 여러모로 예상치 못했다. 해시트는 저도 모르게 걸치고 나온 외투의 앞섶을 바짝 여몄다.
“산책로로 쓰기엔 괜찮아서, 가끔…….”
거짓말이다. 지난번 그의 손에 이끌려 찾아왔던 이래 다시는 찾지 않았었다. 이곳에서 선황의 밀회 장면을 맞닥뜨리기도 했었고, 무엇보다 뭘 한다고 청승맞은 밤 산책 따위를 즐기겠는가. 호위병들 물리고 혼자 밤이슬 맞고 돌아다녀 봤자 환절기 잔병치레 걱정만 늘어날 터인데.
속마음을 들킬까 잠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이내 돌아온 이레이의 대꾸는 그런 노력이 허망해질 만큼 시큰둥했다.
“그렇군.”
심지어 걸터앉은 바위에서 엉덩이를 떼어 내지도 않고 멀뚱히 고개만 끄덕거렸다. 물끄러미 닿아 오던 푸른 눈빛도 곧 궤를 달리했다. 해시트의 시선이 반사적으로 그를 좇았다. 질문은 다짜고짜 튀어나왔다.
“네놈 몇 살이냐?”
이레이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황당한 기색이었다. 그러나 곧 무심해졌다.
“알면.”
“너는 이 몸의 나이를 아는데 나는 모르니까.”
“그래서 억울하신가?”
그의 목소리가 점점 쌀쌀맞아졌다. 미친놈인 양 화를 낼 때와는 묘하게 다른 분위기, 또 전장에서 날뛸 때와도 완전히 딴판이었다. 굳이 빗대자면 사탕 뺏긴 어린애처럼 부루퉁하다던가, 혹은 하고픈 말이 있는데 자존심 때문에 애써 참는 어른애처럼 보였다. 그렇게 꾹 버티다가 툭 따져 묻는다.
“나보다 억울해?”
아니나 다를까, 사실 억울해 죽겠는 건 바로 저 자신이란다.
“…….”
해시트는 쉬이 대답하지 못하고 입술을 감쳐물었다.
초여름 밤의 정원에 수풀 사이로 찌르르 풀벌레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바람결에 흩어지는 들꽃 향기는 이 순간이 꿈이나 환상이 아님을 증명하는 듯했다.
한낮에 내리쬐던 뙤약볕은 어디로 가고, 밤이 깊어지자 팔뚝에 닭살이 돋을 만큼 날씨가 쌀쌀했다. 그런데도 손끝으로 자꾸만 땀이 배어 미끄러웠다. 몇 번인가 주먹을 움켜쥐려다가 포기했다.
긴장하게 되는 이유야 뻔했다. 그리고 이 감정이 긴장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린 지도 어느덧 꽤 됐다.
마침 달빛을 등지고 있어 다행이다. 해시트는 뒤늦게 입을 열었다.
“이레이. 너는 네 존재가 잘못되었다고 여긴 적 있나?”
지금껏 그 앞에서 떠들어 댄 중에 가장 담담했다고 자신한다. 아마 그래서였을 것이다. 이레이는 조금 전 해시트가 그랬듯이 돌연 입을 다물었다. 해시트는 기세를 몰아 한결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나는 있어.”
“…….”
“어린 시절의 나는, 내가 겪는 모든 고초가 단지 내가 성별을 잘못 타고났기 때문이라고 여겼었다. 그러니까 전부 내 탓이라고 말이야. 그땐 고작 그런 걸로 죽을 만큼 억울해했어. 내가 남자로 태어났다면 좋았을 텐데. 그럼 모두가 편했을 텐데…….”
“지금은?”
침묵하던 이레이가 바위에서 몸을 일으키며 질문했다. 이윽고 한 걸음씩 다가오기 시작한 그의 발끝이 마침내 해시트의 그림자를 밟았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해?”
너무 진지한 표정이 되레 우스웠다. 해시트는 숨죽여 웃음을 터뜨렸다.
“이 멍청아,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 봐라. 이런 문제에서 반드시 잘못된 무언가를 찾아야 한다면 그게 이 몸이겠나?”
“……그건 그래.”
이레이의 눈썹 한쪽이 멋쩍게 위아래로 들썩였다.
부득불 잘잘못을 따지려거든 그녀의 섬약함이 아니라 그것을 잘못되었다 못을 박은 이들에게서 찾아야 했다. 해시트는 잘못 태어나지 않았고 그것을 증명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녀가 찾아낸 최선의 방법으로.
만약 라피난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내심 흐뭇해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이레이는 라피난이 아니었으므로, 미케나 제국의 황제가 얼마나 원대한 야망을 속에 품고 있든지 간에 전혀 감동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달빛 아래 눈을 가늘게 뜨고 해시트의 얼굴을 바라볼 뿐이다. 늘 그렇듯이, 오늘도 예고 없이 운을 뗐다.
“해스.”
이름을 부를 땐 입술에 시선이 고정되어 있다. 거기서부터 천천히 위로 올라와 다시금 눈을 맞추고.
“좋아, 인정하지. 내가 느끼는 억울함이란 너에 비하면 너무나 개인적이고 사소해서 한심할지도 몰라. 하지만 지금은 그 지경이 될 때까지 나를 찾지 않았다는 게 너무나 괘씸하군.”
“응?”
“거울은 보고 다니나? 쓰러지기 일보 직전인데.”
이레이의 눈빛이 확신에 차 있었다. 해시트는 더럭 팔을 들어 손등으로 뺨을 가렸다.
“이, 이게 다 네놈이 속 썩여서…….”
“무슨 속셈인지는 모르겠지만 당장 그만둬. 한 번만 실수해도 죽을 수 있다.”
“…….”
“물론 내가 그렇게 안 둘 거지만.”
작은 웃음소리가 귓가로 흩어졌다. 어느새 바짝 좁혀진 거리에 그의 숨결까지 다 느껴졌다. 해시트는 말없이 시선을 내리깔았다. 차라리 이레이의 가슴팍에 이마를 기대 표정을 숨겨 버리자 조금 살 것 같았다. 질끈 눈을 감았다.
“난 도저히 네놈 변덕을 못 따라가겠다. 왜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지?”
“왜겠어. 네가 날 안 무서워하니까. 아, 그래서 말인데 방금 말 돌린 건 봐줄게. 정말 기분이 좋아졌거든.”
“뭐? 봐줘? 너 감히 뭐라고 했냐?”
“봐줘. 난 건방진 놈이잖아.”
거침없이 올라온 손이 해시트의 뒤통수를 감싸 푹 끌어당겼다. 그냥 안겨 있어. 발끈해 그의 품에서 떨어지려던 해시트의 시도가 결심과 동시에 수포로 돌아가는 순간이었다. 이내 뒤통수를 조심스레 쓰다듬는 손길은 간절하게 면죄부를 구하는 듯했다.
“그래도 네 목숨은 걱정되는군.”
머리 위로 무거운 한숨이 어른거렸다.
“불면 날아갈까 쥐면 깨질까, 늘 조마조마하던 내 마음을 황제께서는 아실까 모르겠군. 확실한 건 라피난은 아직 네 작당을 눈치채지 못한 모양인데…… 적당히 해. 내가 그 자식한테 일러바치기 전에.”
짧은 사이 이레이의 손길은 쓰다듬는 것이 아니라 끌어안는 행위로 변했지만, 해시트는 웬일로 내치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었다. 그럴밖에. 그녀의 두려움을 그에게 들켰다고 하니 사과할 방법이 이것뿐이었다. 잠시 후에야 슬그머니 그를 밀어 내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