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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시트와 가여운 짐승들-38화 (37/104)

38화.

“그냥 석방해 버려. 애초에 몇 명 되지도 않던 남편 후보가 세 명이나 죽었으니 이제 나서는 사내도 없을 거 아냐. 혹시 더 죽일 놈이 없어서 그놈이 아쉬워하거든 꼭 죽여 버려라. 특별히 즉결처형권을 주마.”

빈정거리긴 했지만 사실 찾아보려고만 한다면 결혼할 사내야 쌔고 쌨다.

지금까지는 황가와 혼약으로 맺어질 수 있는 일곱 가문에서도 반드시 직계 혈통만 고집해서 그렇지, 방계를 후보에 포함하는 순간 전국 각지는 물론이고 물 건너 외국에까지 혼담이 물밀듯 들어올 게 뻔하다.

심지어 당대 미케나의 황제는 그 아름다움을 온 대륙에 모르는 자가 없다는 해시트가 아닌가. 설령 앞으로 몇 명이 더 죽어 나간들 객기 어린 젊은이가 끊일 일은 절대로 없을 터였다.

귀한 아들을 황제의 남편 자리에 앉히고자 노력하는 부모의 야망 또한 결단코 마를 일은 없었다. 실제로 목이 잘리기 전까진 누구도 제 목이 잘릴 것이라 예상하지 못하는 법이니.

다만 해시트는 더 이상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가 싫었다. 까무룩 상념에 빠져 있던 그녀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할 선생은…… 많이 슬퍼하던가?”

할 선생. 해시트는 오늘 죽은 사내의 아버지를 그렇게 부른다. 나이 들어 은퇴한 황궁 예법 교사는 몇 달 사이 아들을 둘이나 잃었다. 그에게 두 시신을 모두 인도해 준 라피난은 허심탄회한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용케 실신하진 않더군요.”

“직접 할을 만나 봐야겠다. 오후 일정 조율하도록.”

“예.”

라피난이 즉각 품에 낀 서류를 뒤적였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해시트가 문득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원래 일정이 뭐였지?”

“혼례복 시착이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조율할 필요도 없겠군. 바로 출발하지.”

이미 공중 분해되어 사라진 오후 일정에 심심한 애도를 표하며 그녀는 일찌감치 이레이에게 사형을 선고하지 않았던 자신의 판단을 다시 한번 후회했다. 고백하겠다. 그때는 죽일 수 없어서 죽이지 못했는데, 지금은 죽여도 죽지 않을까 봐 못내 두려웠다.

*

해시트가 알기로 휘캄의 수장, 할은 드물게 명예를 아는 인물이다.

가문의 장남이 여색을 탐하다 저잣거리에서 비참하게 죽음을 맞이했을 때도 사면을 바라기는커녕 자식을 제대로 단속하지 못한 자신에게 죄가 있다며 함께 벌을 받기를 청했었다.

그래서 해시트는 염치 불고하고 그에게 죽은 장남 대신 차남을 부마로 달라 요구했더랬다. 이미 두 명의 사내가 죽어 나간 시점에 또 그 꼴이 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었으나 삼엄한 경비를 약속하고 혼인을 발표했다. 결과는 보시다시피 결혼식이 아닌 장례식이었지만.

조문을 마치고 노인과 단둘이 남자마자 해시트는 망설임 없이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네. 내가 판단을 잘못했어.”

“폐하!”

할은 펄쩍 뛰며 해시트를 만류했다. 두 달 새 자식을 둘이나 앞세운 노인은 양 볼이 핼쑥해진 채로도 꼿꼿한 기세만은 여전했다.

“제 슬픔은 그저 인간의 도리일 뿐입니다.”

“…….”

인간 된 도리를 찾는다면 해시트는 아무것도 내세울 수 없었다. 고의는 아니었으리라. 그녀는 묵묵히 듣기만 했다.

“부디 폐하께서는 개의치 마십시오. 비록 제 자식 중 하나는 불명예스럽게 죽었지만, 또 다른 아이는 제국의 밑거름이 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주저하지도 마십시오. 밟고 지나가셔야만 합니다.”

한데 무엇을 위해 이토록 단단해야 하는지, 이 노인은 이 제국의 황제도 황제의 심복도 아닌데 말이다. 이제는 황궁의 예법 선생조차 아닌 일개 백성이 새파랗게 젊은 새 황제의 어깨에 진 짐을 덜어 가려 애쓰고 있다. 그를 지킬 책무는 오롯이 해시트에게 있었는데도.

아연한 얼굴의 그녀에게 계속 할이 말했다.

“가문의 다음 대는 딸아이 중 한 명이 이어 가기로 했습니다. 이 결정에 사촌 조카들이 눈을 부라리고 있지만 제가 폐하의 황태자 시절을 직접 지켜본 이상 토를 달 수는 없을 겁니다. 지금까지 여자는 수장이 될 수 없다 믿어 온 이들을 꾸짖어 주셔야지요. 과거의 저를 포함해서요.”

그리고 잠시 망설이다가 덧붙였다.

“그래야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겁니다.”

그는 자식의 죽음보다도 행여 해시트의 각오가 무너진다면 그것을 더 비통해할 성싶었다. 해시트의 어깨에 진 짐을 얼마만큼 덜어가 놓고 그가 통째로 해시트의 어깨에 걸터앉은 격이다. 해시트로선 얼마든지 기꺼운 일이었다.

그녀는 그의 아들을 죽게 만든 죄를 사죄하고자 이곳에 왔지만, 그래선 안 된다는 것을 방금 깨달은 참이었다. 황제는 제 마음이 편해지자고 슬퍼해서는 안 된다.

그녀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대가 짐에게 기대하는 게 뭔지 알아. 저버리지 않겠다.”

“예.”

줄곧 해시트를 꿰뚫어 보던 할의 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믿고 기다리겠습니다.”

“실례했네.”

해시트는 두말 않고 몸을 일으켰다. 할에겐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잠시 후, 황명으로 배웅을 사양하고 부지런히 마차에 몸을 실었을 때다. 마차 문을 닫아 주는 라피난의 어깨 너머로 헐떡거리는 숨소리가 울려 퍼졌다.

“폐하!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할 선생?”

그녀를 따라 나온 할이 지팡이도 없이 마차로 달려오고 있었다. 해시트는 라피난에게 그를 부축하라 눈짓하곤 창밖으로 얼굴을 뺐다. 무슨 일이냐, 그녀가 묻기도 전에 더럭 다급한 질문이 터져 나왔다.

“호, 혹시 진범을 잡기 위한 수사대가 꾸려졌습니까?”

“…….”

저도 모르게 마차의 창틀을 움켜쥐었다.

할은 어떻게든 참으려 했던 질문을 도무지 참지 못해 뛰쳐나온 것이 분명하다. 평소 같았으면 질문에 앞서 해시트의 허락부터 구했을 텐데 다짜고짜 다그친 것만 보아도 그랬다. 당황한 해시트를 보고서야 자신의 무례를 인지했는지 파드득 고개를 조아린다.

“송구합니다. 미천하지만 우리 휘캄 가문의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언제든 말씀해 주십시오……. 전쟁 영웅인 이레이 린 경에게 누명을 씌우다니 너무나 괘씸합니다…….”

“…….”

이제 해시트는 아예 시선을 돌려 버릴 수밖에 없었다. 눈치껏 할의 시야를 막아선 라피난이 그녀 대신 대답했다.

“조금만 기다리시지요. 백방으로 노력 중입니다.”

“아아, 죄송합니다. 노인네가 그만 추태를…….”

“아닙니다.”

할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린 그가 어느새 뒤따라 나온 휘캄의 시종으로부터 지팡이를 건네받아 할의 손에 쥐여 주었다.

“몸 잘 추스르십시오.”

“예, 카일 경…….”

“그럼 이만.”

그는 제법 사려 깊은 행동을 할 때조차 무뚝뚝하다 못해 차가웠다. 바늘 하나 들어갈 틈 없어 뵈는 라피난의 무표정을 몰래 들여다보다가, 해시트는 더 견디지 못하고 마차 창문을 닫았다. 탁!

*

어떻게 그 삼엄한 경비를 뚫고 빠져나와 살인을 저지를 수 있었을까?

그래 놓고 번번이 날이 밝기 전에 도로 독방에 들어가 앉아 있다는 것도 참 황당한 노릇이었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탈옥해서 영영 사라져 버리라고 악다구니를 쓰고픈 심정이었다.

이레이가 갇힌 탑 꼭대기 층 감옥의 독방은 복도와 수감실 사이에 육중한 철문이 세 개나 가로막고 있었다. 그를 그곳에 가두기로 마음먹은 날부터 절대 탈옥할 수 없도록 철저한 보수 공사까지 진행했다.

조그마한 새 한 마리나 들락거릴 만한 창문은 너무나 작고 초라해서 차라리 숨구멍으로 불러야 할 지경이었다. 그마저도 창밖은 까마득한 절벽과 깊은 호수로 이어지는 데다, 호수에는 인간의 살점을 좋아하는 식인 물고기를 넉넉히 풀어 두었다. 그리고 탑 외벽에는 미끌미끌한 기름을 흠뻑 발라 두어서 결코 맨손으로 오르내릴 수 없었다.

심증은 있으나 확증은 없다는 말이 딱 들어맞았다.

이러니 다들 철석같이 이레이가 억울한 누명을 썼다고 믿을 테지. 솔직히 말해서 해시트조차도 어쩌면 진범이 따로 있는 게 아닐까 의심해 보기도 했다. 그러나 이레이의 자백을 직접 들은 터라 의심은 오래 버티지 못했다.

성에 돌아와 습관처럼 헤라꽃 차를 마시던 해시트는 결국 이레이의 처소로 향했다. 이레이가 연행되던 순간에서 그대로 멈춰 버린 공간은 여전히 엉망진창으로 어질러져 있었다.

“지저분하군.”

꼭 이레이를 알게 된 뒤 해시트의 머릿속 같다. 인정하긴 싫지만 부정할 수도 없는 사실에 발목이 잡히기 전에 얼른 조사를 마치고 돌아가야 했다. 해시트는 긴장한 표정으로 집 안에 발을 들였다.

그날 라피난과 이레이가 도대체 어떤 소란을 벌였던 것인지, 바닥을 나뒹구는 물건을 밟지 않으려면 걸음마다 방향을 틀어야 했다. 되도록 현장을 보존하려 이리저리 방황하던 해시트의 시선이 찰나 가늘어졌다. 우뚝, 걸음을 멈춘 그녀가 제자리에 쪼그려 앉는다. 퍼질러진 세간살이 가운데 뜻밖의 물건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이 책은…….”

단검에 관통당한 두꺼운 서책 한 권, 눈에 익은 가죽 표지였다.

어디서 봤더라. 해시트는 무심코 손을 뻗어 책을 집어 들었다. 달포 새 뽀얗게 쌓인 먼지를 툭툭 털어 내자 음각 처리된 제목이 정체를 드러냈다. 이 또한 낯설지 않은 글귀다. 그녀는 멍하니 입술을 달싹였다.

“카이렌의 날개 달린 짐승들.”

그러자 덮어 두었던 기억이 와르르 쏟아져 흐르기 시작했다. 공교롭게도 이 또한 이레이의 목소리에서 출발했다.

“그냥 숨겨 두고 싶었던 건가? 다른 사람들이 읽지 못하도록.”

그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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