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너 나랑 결혼할래?”
“…….”
“어차피 다른 여자랑 결혼할 마음도 없다며. 그럴 바엔 이 몸이 호강…… 으, 으음…….”
도중에 말끝을 흐릴 수밖에 없었다. 서류를 내려다보던 고개 방향 그대로 눈동자만 굴려 해시트를 확인하는 라피난의 눈빛이 도무지 말을 끝맺지 못하게 살벌했다. 어떻게 된 충신이 차기 황제를 앞에 두고 이토록 정색할 수가 있느냔 말이다. 그와 함께한 지 어느덧 십 년째인 해시트는 선뜻 무엄하다 경을 치지도 못했다.
표정만으로도 충분했는데 굳이 확인 사살까지 해 준다.
“싫습니다.”
“그 앞에 무척 황송합니다만, 같은 빈말을 붙일 생각은 안 드나?”
인사치레에 취미 없다는 걸 알면서 그냥 한번 뻗대 봤다. 아니나 다를까 즉각 단답이 돌아왔다.
“죄송합니다.”
바늘 하나 들어갈 틈이 없다. 해시트는 질린 표정으로 손을 내저었다. 훠이.
“됐다. 기대도 안 했어. 최선을 다해 독신으로 늙어 죽으려무나.”
“미리 남편감을 찾아 두시려는 이유가 있습니까? 어차피 즉위하신 뒤엔 대신들이 생때같은 아들들을 들이밀 텐데요.”
“뭐 문제 있나? 마냥 손 놓고 있는 것보단 낫잖아.”
그 말에 라피난이 조심스레 주위를 둘러보더니 다시 질문했다.
“하면, 외람되지만 전하.”
어쩐지 이번엔 마음에도 없는 빈말을 기꺼이 앞세운다 싶더니.
“지난겨울 선황께서 승하하시던 날 아침에 이레이 린이 전하의 막사에서 나오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
“또 제가 오해한 겁니까?”
“……그건.”
뭐라 대답하려던 해시트가 돌연 들숨을 삼켰다.
다 봤으면서 여태 입 다물고 있었다니 칭찬해 줘야 할지 징그러워해야 할지 난감했다. 고작 밤 산책 좀 다녔기로서니 득달같이 눈치를 줄 땐 언제고……. 물론 ‘고작 밤 산책’이 아니라서 알은체할 수 없었을 라피난을 잘 알고 있었다.
결국 해시트는 누구보다 제 잘못임을 인지하고 있던 셈이다. 애써 외면하던 책임과 마주하자, 그녀는 지금 느끼는 난감함이 팔자 좋은 특권처럼 느껴졌다. 그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전하?”
라피난이 재차 해시트를 불렀다. 목소리에 희미한 걱정이 서려 있었다.
해시트는 그새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빠르게 훔쳤다. 또다시 정신을 갉아먹는 불안감이 엄습해 온 탓이다. 선황을 죽인 이래 시도 때도 없이 들이닥쳐 그녀를 눈보라가 내리던 밤으로 데려간다.
땀에 젖은 손바닥으로 미끄러지던 검 손잡이의 냉기가 쥘 듯이 생생했다. 비단 그뿐 아니라 무엇 하나 잊어버린 것이 없었다. 박동하던 심장을 꿰뚫던 순간의 감촉, 왈칵 터져 나오던 핏물과 콧잔등을 스치던 뜨거운 핏방울. 눈에 씻어 버린 시뻘건 두 손. 그리고 한밤중에 그녀를 끌어안던 서늘한 체온과, 따뜻한 속삭임.
“해스. 그러니까 나는 아마 너를…….”
그 뒤는 듣지 못했다. 해시트는 선명한 기억에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질끈 두 눈을 감았다. 이제야 제대로 된 음성이 흘러나왔다.
“네가 본 사실 자체는 오해가 아닐 거다.”
결코 꿈결이나 환상이 될 수는 없었다. 그날 밤 일어난 무엇도 없던 일이 되어선 안 됐다. 모든 게 현실이었고, 그녀는 제 손으로 직접 아비를 죽여 황위를 탐한 자식이 되었다. 그러니 다시는, 그런 사사로운 안온함에 휩쓸려 이마를 기대지 않으리라.
“그저 지나간 과거일 뿐이지.”
해시트는 미케나로 돌아가자마자 황제가 될 테니까. 이 얼마나 고대하던 운명인가.
그녀가 감았던 눈을 뜨고 조용히 시선을 추스르자, 잠시 후 라피난이 들릴락 말락 한숨짓더니 어느새 도착한 회의장 문을 열고 한 걸음 옆으로 비켜섰다.
“들어가시죠. 논할 사안이 많습니다.”
기다란 탁자를 사이에 두고 문관과 무관 무리가 각기 일렬종대로 서 있었다. 전쟁이 승기를 잡아 갈 무렵 호출을 받고 열심히 달려온 일부 대신들과 전쟁터에서 공적을 세운 장군들이었다. 그들과 동떨어져 출입문을 지키던 병사가 우렁차게 외쳤다.
“황태자 전하 납십니다!”
그러자 그 말만을 기다렸다는 듯 모두가 그녀에게 예를 갖췄다.
무릎 꿇은 무리를 지나쳐 상석으로 향하는 내내 해시트는 무표정했다. 축복의 찬사가 쉬지 않고 공기 중에 떠올랐지만 도통 그녀의 귓가에는 닿지 못했다. 조금 전부터 해시트의 머릿속을 가득 메워 버린 이레이의 목소리 때문이었다.
“좀 가까이서 본 거야. 꼭 너는 인간이 아닌 것처럼 말하길래.”
생각해 보면 그의 말은 틀린 게 하나도 없었다. 어쩌면 가장 정확했던 바이다.
그래. 그녀가 스스로 아비의 목숨을 끊던 날 그녀는 이미.
경멸에 찬 성토가 겨우 혼자만이 들을 수 있는 중얼거림이 되어 입가에 맴돌았다.
“인간이 아니어야만 갈 수 있는 길을 걸어와 놓고.”
그런 주제에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호사를 기대하다니, 어불성설이다. 마침내 부정할 수 없는 결론에 다다른 그녀가 피식 웃으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좋은 아침이야. 이 몸은 대관식이 끝나면 바로 혼담을 올릴까 하는데, 그대들의 생각은 어떤가?”
아직 좌중이 꿇었던 무릎을 펴기도 전이었다. 그러나 누구도 해시트에게 너무 이르다 나무라지 못했다.
꿀꺽, 누군가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누군가는 마음에 둔 여인이 있으시냐 조심스레 질문하기도 했다. 긴장과 어수선함 사이의 묘한 분위기가 돌이킬 수 없게 치달아갔다.
여인이 아니라 사내를 구해 와야 한다면 다들 놀라 자빠질 게 분명하다. 벌써부터 충분히 혼란한 꼴을 지켜보려니 해시트도 차츰 머릿속에서 이레이의 목소리를 지워 낼 수 있었다.
“어서 후사를 봐야 하지 않겠나. 제국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아주 인자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그때만 해도 두 달 뒤에 무슨 황당한 일을 겪게 될지 꿈에도 몰랐으니까.
*
그리하여 오늘은 그 두 달에서 한 달이 더 지난 아침이다.
“……돌겠군.”
해시트는 말 그대로 골이 썩어 가는 표정으로 이마를 짚었다. 실제로 피비린내 때문에 머리가 엄청나게 지끈거렸다.
눈을 떠 보니 침대맡에 ‘또’ 잘린 모가지가 올라와 있더라. 모가지의 주인은 다름 아닌 휘캄의 차남이었는데 순서로 따지자면 리히티와 듀이네 장남에 이어 세 번째였다. 텅 빈 눈두덩 아래 핏물이 고인 꼴이 마치 원한에 차 피눈물을 흘리는 귀신 같았다.
고인이 정말 귀신이 되었다면 잡아가야 할 놈이 누구인지는 명백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놈은 이미 잡혀서 감금된 지 한 달째다.
한 달 전, 현행범으로 끌려간 이레이는 여전히 탑층 감옥에 수감 중이었다.
“폐하. 다 끝났습니다.”
아침부터 몸통 없는 시체를 능숙하게 정리한 라피난이 공손하게 인사해 왔다.
벌써 이 짓을 세 번이나 반복한 탓인지 그도 처음처럼 분기탱천하여 이레이를 찾아가거나 하지는 않았다. 두 번째까지만 해도 거의 눈이 뒤집혀서 탑층 감옥의 간수들을 들볶더니만 이젠 그마저도 하청을 줄 작정인가 보다.
반면 해시트는 나날이 냉정을 잃어 갔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거지?”
쾅, 매가리 없는 주먹이 협탁을 내리쳤다. 침대에 걸터앉은 그녀는 황망하게 벌어진 입술을 다물지 못했다.
“밤새 간수들은 몽마에 홀리기라도 했다던가? 서른 명이 넘는 장정들이 겨우 감옥 한 칸을 못 지키는 게 말이 되느냔 말이야! 그리고 분명 이레이에게 이 몸의 혼인에 대해서 입도 벙긋하지 말라고 일렀을 텐데?”
“네, 그리고 탈옥의 흔적은 없었습니다. 이번에도요.”
라피난이 침대 앞으로 다가와 말했다. 그의 무표정이 상당히 진지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해시트는 결국 두 손으로 이마를 부여잡았다. 악문 잇새로 후회가 들끓었다.
“젠장, 그냥 처음에 사형시켜 버릴걸…….”
“말을 아끼겠습니다.”
“닥쳐…….”
그런 말도 안 하고 아예 침묵하긴 싫다는 티를 저렇게 낸다. 그나마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마십시오’라고 핀잔하지 않은 데 고마워하기엔 이레이를 사형시키고픈 해시트의 결심이 너무나 진심이었다. 그것이 이제는 불가능한 일이 되어 버렸을 뿐.
그가 덴체 리히티를 살해한 죄목으로 감옥에 갇힌 지 벌써 한 달이나 지났다. 그 한 달 사이 새로운 시체가 두 구나 발견되면서 이레이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도 기꺼이 황제의 명을 받든 충신으로 거듭났다. 사형은커녕 곧 석방해 줘야 할 판국이다.
웬일로 반항 한 번 않고 순순히 연행당하더니 역시나 믿는 구석이 있던 모양이다. 해시트가 새 남편감을 결정하는 족족, 대관절 어떻게 알았는지 혼례식 전날에 무자비하게 죽여서 오늘처럼 머리만 뎅강 가져다 두니 한마디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아무리 간수들에게 입조심을 하라 일러도 예외 없었다. 독방에 수감 중인 죄인이 무슨 수로 이런 짓을 벌이겠느냐 누군가 비웃는다면, 해시트는 그 질문을 그대로 돌려주고 싶었다.
그러게 말이다.
저놈이 이 정도로 미친놈일 줄은 그녀도 미처 몰랐다고.
*
결국 세 번의 소동을 수습하는 동안 라피난이 가장 바빴다.
그는 사체의 나머지 몸통을 찾아내―그 미친놈이 글쎄 몸통은 봉쇄된 제 처소에 처박아 뒀더라―모가지와 봉합해서 나름 멀쩡한 모양새로 수습하여 휘캄의 수장에게 전달했고, 곧장 다시 해시트의 집무실로 찾아와 보고했다.
“공식적으론 낙마 사고라고 밝히기로 휘캄 측의 동의를 얻었습니다만, 이미 성 안에 퍼진 소문까지 막긴 힘들어 보입니다. 이미 두 번째 사체가 나왔을 때부터 대신들은 진범이 따로 있다고 주장하고 있고요. 이레이를 석방해서 그를 수사 대원으로 영입하라는 건의가 끊이질 않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다들 발등을 거나하게 찍혀 봐야 정신을 차릴는지 이레이 대장을 향한 믿음이 아주 볼 만했다. 어디서 굴러먹다 왔을지 모를 빨간 머리 이방인이라며 겸상도 안 하던 것이 불과 엊그제 같은데 말이다.
그야 신뢰라기보다 그저 써먹기 좋다 여겼겠지만. 혹은 지난 몇 년간 단 한 번의 전투에서조차 패배하지 않은 역귀 같은 사내를 이대로 잃어버릴 순 없다는 미련에 불과했다.
해시트는 검토하던 서류를 거칠게 패대기쳤다. 어떡하긴 뭘 어떡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