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시트와 가여운 짐승들-36화 (35/104)

36화.

#1. 첫 번째 일출

아침은 돌이킬 수 없는 과거와 함께 왔다.

밤사이 퍼붓던 폭설이 거짓말인 것처럼 맑게 갠 하늘 아래에서, 제국군은 싸늘하게 식은 황제의 주검을 마주해야 했다. 모두가 이 현실이 꿈이기를 바라는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다만 은애하는 군주를 잃은 슬픔보다 미래를 향한 냉엄한 걱정을 앞세운 채였다. 이제나저제나 고대하던 첫 승을 거둔 것이 겨우 어제였다. 황제의 장례를 치르고자 회군한다면, 앞으로의 전세가 어떻게 흘러갈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감히 먼저 입을 놀리진 못하고 그저 망연해하던 그때, 황태자 해시트가 비장한 얼굴로 모두의 앞에 나섰다.

“이 또한 신의 뜻이다!”

분명 누구보다 슬픔에 젖었을 황태자다. 그런데도 발갛게 핏발 선 눈엔 눈물 한 방울 매달지 않고서 하늘 높이 검을 치켜들었다.

“제군들은 모두 나를 따르라.”

스릉! 검집을 빠져나온 칼날이 맑은 겨울 하늘을 무자비하게 찔러 댔다.

“미케나는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그러자 무수한 병사들이 황태자를 따라 검을 뽑았다. 커다란 함성과 함께 재창한다.

“승리!”

“승리를!”

완벽한 승리를, 미케나 신과 선황 레오니스에게 바치기를. 아마 모두가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황태자 해시트만 빼고.

그로부터 다섯 달 후 미케나 제국은 크샨 왕국과의 전쟁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머쥔다.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황제 대신 완벽하게 제국군을 통솔한 황태자 덕분이었다.

*

애당초 이교도 징벌을 명분으로 내세운 전쟁이었다.

제국은 왕국의 자치권을 인정하되 국경 지대의 가장 비옥한 땅을 사방 일천 파라상만큼 상납받기로, 또 크샨 왕조를 포함한 왕국 국민이 미케나의 국교로 개종하겠다는 조건으로 종전을 공표했다.

훗날 크샨 왕국이 해당 영토의 반납을 요구하면서 두 나라 사이에 2차 전쟁이 발발하기도 하는데, 일명 ‘일천 파라상 싸움’으로 남게 되는 길고 긴 역사의 시발점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래 봐야 아주 먼 미래의 일일 뿐이다. 유독 잔혹했던 전쟁이 막 끝난 지금, 당장 해치워야 할 사안은 단연코 왕국의 개종 문제였다. 전세가 기울어졌을 때 일찌감치 개종을 맹세하며 투항해 온 이들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왕국 백성들이 훨씬 더 많았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먼저 투항해 온 이들 중 다수가 귀족과 대부호였고, 어쩐 일인지 힘없고 가난한 이들만이 끝까지 자신들이 믿는 신의 이름을 고집하였다. 목숨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개종하지 않겠다 버티는 포로들은 원칙상 처형할 수밖에 없었다. 평소 원칙과 가장 거리가 먼 이레이 린 대장이 그 처형을 집행했다.

형장의 천막이 걷히던 날의 아침, 이레이는 여느 때처럼 해시트의 처소에 쳐들어와서 무심한 낯으로 몇 마디를 들쑤셨다.

“원래 종교란 내세에 대한 소망 같은 거니까. 현세에 지친 이들이 훨씬 맹목적일 수밖에 없지.”

언뜻 씁쓸한 목소리였다.

제아무리 오늘 처형한 포로의 숫자가 많을지언정 전장에서 그의 전차에 깔려 죽은 적군에 비할 바는 못 되었을 텐데, 하물며 지금껏 숱한 살인을 저지르면서 그가 망설이거나 측은지심을 내비치는 모습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해시트는 의문했다.

“왜 갑자기?”

물끄러미 쳐다보는 눈빛에 이레이가 슬며시 미소 지었다.

“생각해 봐, 해스. 이상하지 않나?”

감히 제국의 차기 황제에게 사고(思考)를 권하는 배짱만은 변함없었다.

“결국 인간들의 믿음이 향하는 곳엔 각기 다른 이름을 가진 유일신이 있단 말이지. 이름만 다를 뿐 기실 똑같은 존재인데, 그이를 다른 이름으로 부르며 섬길 수 없어서 죽음을 선택한다는 게.”

“한심하지. 안타깝고.”

해시트는 다소 냉정하게 이레이의 말허리를 잘랐다. 무고한 이들의 죽음 앞에서 언제나 쉽게 허물어지던 그녀답지 않았다.

아니, 아닌가. 잠시 해시트를 바라보던 이레이는 금방 생각을 고쳐먹었다. 그가 착각한 게 아니라면 최근 해시트의 심경에는 적잖은 변화가 생겼다. 정확한 시점은 응당 선황의 죽음일 터다. 의심의 여지없이 뻔한 인과를 앞에 두고도 그는 왜인지 흥미에 차 표정을 비틀었다.

“해스.”

그녀에게 다가간 이레이가 구부정하게 시선을 맞췄다. 냅다 얼굴만 들이대고 아무 짓도 하지 않자 이내 해시트의 한쪽 눈썹이 짜증스레 까딱였다.

“뭘 봐?”

“음. 이제 피하지도 않는군.”

피했으면 섭섭하다는 핑계로 수작을 부렸겠지만, 어차피 결과는 똑같았다. 곧장 고개를 비틀어 입술을 포개는 행동에 해시트가 흠칫 찡그리며 상체를 뒤로 뺐다. 정강이가 걷어차이기 전에 재빨리 떨어져 나가는 얼굴은 아쉬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좀 가까이서 본 거야. 꼭 너는 인간이 아닌 것처럼 말하길래.”

“네놈은 눈이 입에 달렸나 보지?”

해시트가 잡히는 대로 팔을 휘저어 은촛대를 내던졌다. 휙! 물론 그것이 이레이의 몸뚱이에 맞아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의 손아귀에 가뿐히 안착한 은촛대가 좌우로 얄밉게 흔들렸다.

“기념품은 언제나 환영이야. 전부 다 피가 되고 추억이 되거든.”

불씨가 꺼진 촛대 위로 가느다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겨우 실낱같은 연기로 그의 얄미운 낯을 가리기엔 턱없었다. 해시트는 마뜩잖게 이레이를 노려보다가 한순간 고개를 돌렸다.

“알아서 해라.”

그깟 추억을 맘속에 품든지 말든지.

“이 몸은 이제 회의에 들어가야 해.”

“아직도 회의할 게 남았나?”

“까마득히. 우선 상납받은 영토에 남을 임시 관리자부터 정해야 해. 내정해 둔 인물은 있지만, 통보는 아직이라서.”

“라피난 어때. 단 몇 달이라도 그 자식 얼굴을 안 보고 살면 마음이 편하겠어.”

“말을 말자.”

“그냥 해 본 소리야. 보나 마나 선황의 측근들로 꾸렸을 테지.”

“…….”

꽉 다물린 입술이 무언으로 긍정했다.

상납받은 영토에서 미케나의 수도까지는 쉼 없이 말을 달려도 한 달은 거뜬했다. 그인즉슨 선황의 측근들이 본국에서 실세를 이어 가기 전에 패전국의 섭정으로 떨어뜨리고 가겠다는 속셈이었다. 정식 관리자를 선출해 보내 주었을 땐 해시트의 대관식이 끝나고 그들의 가족들은 황실에 볼모로 잡혀 있을 것이다.

문득 해시트가 물었다.

“너, 이 몸이 황제가 되면 깍듯이 예를 갖추겠다고 했지?”

금색 자수가 놓인 하얀 겉옷을 걸치며 새삼스레 눈을 맞춘다. 이레이는 소파에 걸터앉아 그녀의 뒷모습을 구경하던 중이다. 멀뚱히 눈을 끔뻑이다가, 천천히 턱을 괴고 대꾸했다.

“아직 멀었잖아.”

“멀었든 가깝든.”

“조급하게 굴지 않는 것이 성군의 미덕이라는 것도 모르나?”

가벼운 타박이 반복됐다. 그런 시시한 약속을 여태껏 기억하고 있는 그녀가 한참 잘못되었다는 듯이. 대놓고 시비 거는 말투였음에도 해시트는 웬일로 아랑곳하지 않았다. 별안간 단장을 마치고 출입문 앞에 서더니 그에게 일별을 던졌다.

“어쨌든, 그때가 되거든 다시는 날 그런 눈으로 보지 마라.”

“응?”

그런 눈이 어떤 눈인데?

순간 황당함에 젖은 이레이가 뒤늦게 턱에서 손을 떼어 냈지만 이미 해시트는 방 밖으로 나간 뒤였다.

이른 봄바람이 한창이던 때다. 바람결에 부드럽게 반동하는 출입문을 멍하니 지켜본 끝에 이레이는 느지막이 시선을 옮겼다. 스치는 유리창에 그의 얼굴이 비쳤다. 빨간 머리에 파란 눈동자를 가진 남자. 농담으로도 유약함과는 거리가 먼 생김새였다.

한데 이상하기도 하지.

그 눈빛만은 왜인지 유약한 동정심으로 절절 끓고 있었으니 말이다.

*

“잠자리는 마음에 드십니까?”

“그럭저럭.”

해시트는 시큰둥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전장의 막사보다야 크샨 왕국의 귀빈실이 편한 게 당연했다. 인사치레로 시간 낭비 하는 취미라곤 없는 놈이 왜 안 물어도 될 걸 묻나 했더니 웬걸, 곧 본론이 따라왔다.

“제 방은 제법 괜찮던데요. 옆방 사람이 밤늦은 시각에 마실 다니는 것만 빼면 이런 호사가 없습니다.”

라피난의 옆방은 보통 이레이의 차지다. 잔소리하려고 뜸을 들였구나. 해시트는 못 알아들은 척 걸음을 재촉했다.

“그렇군. 모처럼의 호사니 맘껏 즐기도록.”

다행히 라피난도 더 캐묻지는 않았다. 어차피 밤마다 산책을 나가자며 불쑥불쑥 찾아오는 백인 소대 대장이 가장 큰 문제라는 건 너도 알고 나도 아는 사실이었으므로.

다만 번번이 그 문제아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하는 해시트에게 아예 책임이 없느냐 따진다면, 그건 따지는 이에게 불경죄를 물어 마땅했다. 태생적 충신인 라피난 카일은 불필요하게 주군을 몰아붙이는 대신 그녀의 민망함을 기회 삼아 넌지시 청했다.

“즉위식 전에 제릴 군을 국경 지대로 보내 둘까 합니다.”

갑자기 언급된 이복동생의 이름에 해시트의 미간이 흠칫 좁아 들었다. 그러나 금방 표정을 가다듬고 라피난은 돌아봤다.

“세르히라 양은? 아비와 연인을 모두 잃은 마당에 자식과 쉽게 떨어지려 들지 않을 텐데.”

“그렇겠죠.”

라피난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당사자의 의사에는 일말의 관심조차 없다는 표정이었다. 하기야 그에겐 선황의 연인과 사생아의 거취 따위, 앞으로 작성해야 할 수많은 보고서 안건 중 하나에 불과할 테지. 그리고 해시트에게도 그래야 했다.

“너 알아서 해라.”

굳은 목소리로 내뱉은 그녀가 다시금 걸음을 재촉했다.

마침 회의에 가던 참이라, 아비의 부고를 전해 듣고 뒤로 픽 고꾸라지던 세르히라를 곱씹지 않을 핑계는 차고 넘쳤다.

미케나로 돌아가기 전에 결정지어야 할 일이 너무나 많았다. 선황의 장례를 먼저 치를 것이냐 대관식을 먼저 열 것이냐. 장례는 얼마간 지속할 것이며 대관식 규모는 얼마나 크게 벌인 것인가, 대관식에서 해시트가 상복을 입어야 하는가 예복을 입어야 하는가, 그 외에도 셀 수가 없다.

하여간에 제국은 예로부터 쓸데없는 일에 돈과 시간을 낭비하는 전통이 있었다. 해시트는 자신이 즉위하면 다 폐기 처분하리라 이를 갈곤 했다. 그러려면 먼저 넘어야 하는 산이 있음을 불현듯 깨닫곤 떨떠름하게 라피난을 곁눈질할 따름이다.

“저기, 라피난.”

“예.”

“있잖아…….”

“예, 말씀하십시오.”

라피난은 들고 있는 서류를 갈무리하느라 목소리만으로 대답했다. 차라리 그편이 운을 떼긴 수월했다. 해시트는 잠깐 입술을 감쳐물었다가 툭 떼어 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