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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시트와 가여운 짐승들-35화 (34/104)

35화.

황제의 거처를 함락한 성벽 안에 마련해 드리자는 의견에 토를 다는 이는 없었다. 당연히 따뜻하게 난로를 떼어 드려야지요. 기다렸다는 듯 동조한 라피난의 말처럼 당연한 수순이었다.

포로들은 한 놈도 남김없이 포박해 격리해 두었으니 경비를 걱정할 것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두 달 넘게 이어진 농성전에 황제 본인이 가장 피로해했다. 젊디젊은 황태자와는 체력부터가 다를 수밖에. 그래서 황제와 그의 수행원들은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하여 봉화를 챙겨 따뜻한 성벽 안으로 이동했다.

해시트는 황제의 거처에 다다르자마자 나직이 중얼거렸다.

“어쩌면 폐하께서는 오늘 밤 나와 멀리 떨어져 있고 싶으셨을 수도 있다. 본능이란 그런 거니까.”

무표정한 그녀의 뒤로는 봉화를 피울 새도 없이 유명을 달리한 열댓 구의 사체가 얼어붙어 가고 있었다. 이 정도로 몰아치는 눈보라 속에선 횃불을 켜는 것조차 버거웠으리라. 덕분에 소란은 아주 적었고, 가뜩이나 잠귀가 어두운 황제는 누적된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여전히 깊은 수면 아래 유영 중이었다.

해시트는 한참이나 침묵한 채 그녀와 닮은 나이 든 남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느 순간 그녀가 허공에 손바닥을 납작하게 펼쳤다.

“줘.”

짧게 달싹인 입술은 복면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으나 요란하게 번쩍이는 눈동자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선득하게 아름다운 금빛이 쉬지 않고 경련한다. 찰나 한계까지 공포에 질렸다가 금세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며 모호해지길 반복했다. 나중엔 완전히 차분해졌다.

이레이의 말대로 그녀가 정말 라피난을 닮아 버린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기야 지금 상황에선 그편이 낫겠지만…….

그러나 라피난은 다르게 생각했나 보다. 그는 차마 그녀에게 단검을 건네주지 못하고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허락하신다면 제가 하겠습니다, 전하.”

“안 돼. 내가 할 일이다.”

곧장 야멸찬 불허가 떨어졌다.

처음으로 라피난이 해시트의 어리광을 들어줄 마음의 준비를 마쳤음에도 이번만큼은 해시트에게 어리광 부릴 마음이 없던 모양이다. 그녀는 손수 라피난의 손에서 단검을 빼앗아 들고는 단단히 고쳐 쥐었다.

“너는 계속 충신으로 살아야 한다.”

그러니 그에게 이런 일을 시킬 수 없다고.

어디 선대를 죽인 역적을 신하로 삼을까 보냐, 그런 우는 범해선 안 됐다.

“반드시, 이 몸이 죽을 때까지 나를 모셔라.”

“……알겠습니다.”

라피난이 고개를 숙였다.

이제 해시트의 눈은 담담함을 넘어서 바깥의 눈보라보다 더 싸늘하게 식어 버렸다. 오랫동안 깜빡이지 않고 버티니 빨갛게 핏발이 서지 않고는 못 배겼다. 그리하여 오직 복면 위로 보이는 금빛 눈동자만이 그녀의 감정을 오롯이 비추는 창이었다. 물기에 어려 한없이 일렁이면서도 슬픈 느낌만은 아니었다.

이레이는 그 모든 광경을 한 걸음 뒤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볼 수 있기를 고대했다. 하지만 마침내 해시트가 한 발을 앞으로 디뎠을 때 돌연 라피난이 그의 팔뚝을 움켜쥐고 문밖으로 끄집어냈다.

“왜 나까지? 물어보지도 않고.”

구경하고 싶었는데. 이레이가 구시렁대거나 말거나 라피난은 문짝을 굳게 닫으며 그를 노려봐 줄 뿐이었다. 이윽고 조금은 분한 목소리로 짓씹었다.

“아마 너에게 제일 보이고 싶지 않으실 거다.”

그 사실을 인정하기까지 무척이나 갈등했다는 기색이었다.

결국 이레이의 표정도 약간은 씁쓸해져 그와 함께 네모난 문짝만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나란히 서서 침묵을 느끼려니, 문득 떠오르는 질문이 있었다.

“라피난.”

“왜.”

“예전부터 궁금했는데, 왜 네가 저 애 곁에 있는 거지?”

“…….”

라피난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침묵이 순식간에 공간을 잠식했다. 숨이 막힐 듯한 고요함도 잠깐, 말소리가 사라지자 이내 다른 것들이 기승을 부렸다.

창문을 두드리는 세찬 바람 소리. 벽난로의 불씨가 타들어 가는 소리. 두껍게 쌓인 눈 위로 새 눈발이 낙하하는 소리. 징벌의 증거로써 곳곳에 꽂아 둔 깃발이 펄럭이는 소리. 저 멀리 울려 퍼지는 술 취한 자들의 노랫소리.

그중에 가장 선명하게 이레이의 귀청을 찢은 것은, 질긴 살점과 단단한 뼈를 갈라 심장을 꿰뚫는 어느 쇠붙이의 소리였다.

푸욱!

“크헉!”

세상에서 가장 막강한 나라를 가진, 아니, 가졌던 황제의 단말마조차 그에 비하면 그저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단지 그걸로 끝이었다.

“…….”

“…….”

또다시 침묵을 빙자한 소란스러움이 되풀이되었다. 몇 번이나. 적잖은 시간이 흐른 뒤에, 라피난은 무슨 심경의 변화를 느꼈는지 갑자기 이레이의 질문에 대답해 주었다.

“나는 아쉬웠다.”

대답이 아닌 참회 같기도 했다.

“어째서 아름다운 인간은 언제나 빨리 죽는가. 어째서 늘 그렇게 쉽게 죽어 버리는가.”

“…….”

“그냥……, 저분은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랐을 뿐이야.”

아름다운 인간. 그 단어가 누구를 염두에 두었는지야 자명했다.

인간사의 모든 홍복을 타고났다 일컬어지는 아름다운 미케나의 황태자. 해시트. 오늘 밤이 지나면 그녀는 어제까지와는 다른 사람이 될 것이다. 여러모로.

라피난은 허무감에 젖은 연초록빛 눈동자를 아주 느리게 껌뻑였다. 이레이가 그 눈빛을 잠시 일별했을 때, 굳게 닫혀 있던 문짝이 열렸다.

밖으로 걸어 나온 해시트의 콧잔등에 핏방울이 튀어 있었다. 미처 닦아 내지 못했거나 피가 튄 줄 몰랐을 수도 있다. 그런가 하면 두 손은 아예 피로 흠뻑 젖어 있었으니 아무렴 어떤가 싶었다.

“이거.”

그녀가 표정 없이 라피난에게 피 묻은 단검을 내밀었다. 그것을 라피난이 두 손으로 건네받자 말없이 눈발이 나리는 바깥으로 걸음을 옮겼다. 터벅터벅 나아가는 뒷모습이 정말로 조그맸다. 추울 텐데. 이레이는 그 작은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곧 시선을 떼어 내고 라피난과 함께 뒤처리에 임했다.

내일이면 선황이 될 레오니스 황제는 오늘 밤 성에 숨어 있던 적들과 마주치고 만 것이다.

눈발이 거세 봉화는 타오르지 않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들과 용맹하게 맞서 싸워 그들을 멸하는 데 성공하였다. 한데 적군의 마지막 일격으로 치명상을 입어 전사하고 말았으니 참으로 통탄할 비극이었다.

뒤처리까지 마치고 밖으로 나와 보니, 해시트가 눈에 손을 씻고 있었다.

소복이 쌓인 흰 눈에 빨간 핏물이 부대끼며 괴상하게 고운 빛깔로 물들었다. 그녀는 이레이와 라피난이 나온 것을 발견하자마자 대수롭지 않게 두 손을 털어 냈다. 꽁꽁 얼어붙은 손끝에서 희석된 핏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녀가 말했다.

“끝났으면 가지.”

조금 전 제 손으로 친아버지를 죽인 사람이라고는 도무지 믿기지 않는 침착함이었다. 이레이는 그녀가 라피난의 망토 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그리 오래 보고 있지는 않았다.

어느새 눈보라가 거의 잦아들어 가고 있었다. 완전히 그치기 전에 막사로 돌아가야 했다.

*

해시트는 잠들지 못했다.

원래 깊이 잠드는 편은 아니었지만 이대로라면 한숨도 못 잘 게 분명했다. 그럼 앞으로의 일정에 차질이 생길 테지. 해시트는 어떻게든 잠들기 위해 이미 감고 있던 눈꺼풀에 더욱 힘을 줬다. 그러나 여전히 잠은 오지 않고, 도리어 온몸의 감각이 생경하게 곤두섰다.

별안간 이불 한쪽이 들춰지는 작은 소리에도 소스라치게 놀라고 만다. 스륵, 들뜬 공간으로 침범한 것은 타인의 서늘한 체온이었다. 해시트보다 훨씬 무거운 남자의 체중이 실리자 침대가 저울처럼 비스듬하게 기울어졌다. 그녀는 바로 언성을 낮췄다.

“미쳤어? 꺼져라.”

이제 누구냐고 묻지도 않았다. 하물며 어떻게 들어왔냐는 질문은 그녀 입만 아팠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왜인지 이레이가 삐쭉 눈썹을 들썩이는 얼굴이 정확히 그려졌다. 이어 툭 내뱉는 말소리에 더욱 선명해진다.

“밖에 눈 내려.”

“그래서?”

“어쩌면 천둥이 칠 수도 있지. 번개가 닥칠 수도…….”

“뭐?”

“너 그런 거 무서워하잖아. 해스.”

눈 내리는 날 천둥 번개가 친다는 말은 듣도 보도 못 했다. 응당 무슨 귀신이 씻나락 까먹는 소리를 하느냐고 타박해 주어야 옳았다. 근데 못 했다. 안 한 건 아니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그의 입에서 그녀를 부르는 호칭이 흘러나온 순간에 해시트는 갑자기 말문이 막혀 입을 뗄 수가 없었다. 억지로 입술을 열어 보아도 결국 거기서 그쳤다. 맴도는 수많은 말들은 그저 입 안에서 머물렀다.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아, 그녀는 깨달았다.

“해스.”

이제 세상에 그녀를 그렇게 불러 주는 사람은 단 한 명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다른 한 명은 오늘 밤에 그녀가 죽였다.

“……왜…….”

멍하니 이레이를 찾던 시야에 점점 물기가 아롱져 사방으로 번졌다. 빛이 없는 전장의 막사에서 이레이가 두 팔을 뻗어 그녀의 등을 단단히 끌어안았다. 그의 가슴께에 부딪힌 이마가 아프다는 생각보다 눈물이 먼저 터져 나왔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더욱 강하게 그녀를 끌어안는 힘에 심장이 쿵쾅거리며 함부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숨 막히는 안온함 속에서도 죄책감은 선명했다. 우르릉 쾅, 마치 천둥처럼 두방망이질 쳤다.

정말로 천둥이 친다면 좋겠다.

해시트는 떨리는 손으로 이레이의 등을 마주 안았다. 그의 가슴도 그녀처럼 쾅쾅 울렸다면 차라리 안도했을 것이다. 닿은 자리가 얼마만큼 뜨겁게 달아올랐다면 그녀도 한숨지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바짝 끌어안아 보아도 그는 전혀 따뜻하지 않았다. 온기라곤 없이 서늘했다.

귓가에 바짝 속삭이는 목소리만이 다정하여 쉬지 않았다.

“천둥이 치고 있어.”

그럴 리 없다. 눈은 멎었고 밤하늘은 쾌청할 것이다. 막사에 드리워진 그림자만 곁눈질해도 바로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해시트는 입술을 잘근거렸다. 제멋대로 흘러나온 울음은 흐느끼는 족족 이레이의 품으로 스며들어 갔다. 종국엔 그녀가 그의 품을 적시는지 그가 그녀의 괴로움을 앗아 가는지 알 수 없어졌다.

그날 밤 이레이는 몇 번이나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괜찮아. 천둥이 치고 있어.”

해시트가 잠들 때까지 계속, 공기 중에 내버려 두었다간 필경 서서히 부식되어 버릴 그녀를, 어느 날 홀연히 증발해 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그 여자를 빈틈없이 끌어안은 채 쉬지 않고 중얼거렸다.

“해스. 그러니까 나는 아마 너를…….”

너를.

그 뒤에 무슨 말이 오갔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가물어지는 시야 속에서 해시트는 생각했다. 나를……. 나를.

하지만 나를 불쌍해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고, 당신은.

해시트는 그저 생각만 했다.

제2막. 본디 왕께서는 사랑을 모르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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