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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시트와 가여운 짐승들-34화 (104/104)

34화.

크샨 왕조의 당대 왕은 자존심이 강하기로 유명했다. 아마 그래서였을 것이다. 정녕 네놈들이 미케나의 황태자를 해하려 했느냐 해명을 요구하러 떠났던 사절단을 한 명만 빼놓고 몽땅 모가지를 뎅강 잘라서 되돌려 보낸 것은.

장장 넉 달 만의 귀환이었다. 겨우 살아남은 자는 귀가 잘리고 눈이 멀어 단지 떠들 입만이 남아 있는 상태였다. 그마저도 돌아오자마자 무어라 입을 열기 전에 꼴까닥 숨이 넘어갔다. 덕분에 그들이 크샨 왕국 근처에도 못 가 봤다는 진실은 영원히 밝혀지지 않았다.

해시트가 사절단의 장례를 마치고 처소로 돌아왔을 때, 이레이는 멋대로 그녀의 방에 침입해 창턱에 걸터앉아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표정한 그녀를 빤히 쳐다보다가 일순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우울해할 줄 알았는데 멀쩡하네? 위로해 주려고 왔더니.”

그가 진실을 몰라서 그런 말을 했을 리는 없다. 그에게 몰래 사절단을 죽이고 돌아오라 명령한 이는 다름 아닌 해시트였으니까. 하면 단순히 놀리는 것일 수도 있었다. 해시트는 슬며시 미간을 찌푸렸다.

“집어치우고 출정 준비나 꼼꼼히 해라. 참고로 이번 전쟁에선 얼마든지 날뛰어도 된다.”

“그놈의 전쟁, 이젠 지겹지도 않군.”

“두려우면 후방에 밀려나 있든가. 네 마음대로 해.”

해시트는 유독 쌀쌀맞게 그를 대했다.

레오니스 황제는 크샨과의 충돌만은 피하고 싶어 했지만, 상황이 이 지경으로 흘러오자 이제 전쟁 없이는 굴욕을 피할 길이 없었다. 사절단이 잔인하게 살해당한 여파로 민심이 들끓을 대로 들끓은 상태였다.

냉담한 해시트의 반응에 이레이가 흥미롭다는 듯 눈꼬리를 접었다.

“드디어 라피난을 좀 닮아 가나. 이번엔 흉내가 아니군.”

“…….”

“그 녀석이 뿌듯해하겠어.”

가만 보면 중요한 순간마다 참 못된 말을 잘하는 남자였다. 그야 일부러 그러는 걸 테지. 해시트는 무고한 희생 앞에 의연해진 저를 칭찬해 주는 라피난을 상상해 보았다가 속이 울렁거려 일찍 침대에 누웠다. 그러나 잠들지는 못했다.

*

가을 초입에 시작한 전쟁은 혹한의 겨울을 거쳐 늦은 봄까지 계속됐다.

레오니스 황제가 서거한 것은 전쟁이 한창이던 겨울날이었다. 그날은 아침부터 갑작스러운 눈발이 휘날려서 공습에도 나가지 못했다.

오후가 되자 두 명의 병사가 폭설을 견디지 못하고 얼어 죽었고, 그 시체를 치우고 온 뒤엔 다들 슬픈 마음을 견디며 담요를 뒤집어써야 했다. 한겨울 농성전이 길어지면서 다들 체력 보전이 쉽지 않았다. 전쟁이 더 길어지면 피해가 막심할 것이다. 결단을 내려야 할 때였지만, 못내 망설이는 이유는 간단했다.

“과연 이 눈이 내일 밤까지 내려 줄까.”

눈을 가늘게 뜬 해시트가 막사의 커튼을 슬쩍 걷어 냈다. 굳건히 닫힌 크샨의 국경 위로 흰 눈이 두껍게 쌓여 가고 있었다.

그녀의 뒤에서 이레이가 말했다.

“내릴 거야. 최소한 내일 밤까지는.”

뭐든 앞뒤 안 가리고 장담하는 취미를 오늘도 어김없이 발휘한다. 그러고 보면 구름을 헤아리는 재주가 제법 탁월하긴 했으나 평소 언행 때문에 번번이 신뢰가 안 갔다. 이레이는 그런 해시트의 의심을 이해한다는 듯 어깨를 으쓱 떨치더니 별안간 라피난을 끌어들였다.

“봐, 라피난. 분명 하루 정도는 더 퍼부을 것 같지 않나?”

“……쉽게 그치진 않을 것 같습니다.”

힐끔, 라피난이 이레이를 곁눈질하며 나직이 동조했다.

둘의 의견이 굳어지니 결국 해시트도 결심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천천히 마른침을 삼킨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폐하의 동태는 어떠신가?”

“어제와 비슷합니다. 전면전이 시작되더라도 굳이 지휘관으로 나서지는 않으실 듯합니다.”

“좋아. 모두에게 일러라. 새벽 동트기 전에 공격을 시작한다고.”

“예, 전하.”

“이레이, 너도 단단히 준비하고.”

그녀의 말에 이레이가 곧장 까만 로브를 뒤집어쓰고 대꾸했다.

“난 이거면 돼.”

역시나 호언장담이었다.

*

그날 밤 긴 농성전이 끝나고 제국군은 드디어 크샨의 영토에 발을 들였다.

수도를 함락하려면 아직도 긴 여정이 남아 있었으나 모두들 기적 같은 첫 승에 기뻐하느라 그날만은 약탈한 창고를 열어 원 없이 먹고 마시며 추위를 달랬다. 어떻게 두 달이나 굳건하던 성벽이 하루아침에 무너질 수 있었는지, 누군가 몰래 성벽을 넘어 미리 손을 써 두었으리란 상상은 당연히 아무도 하지 못했다.

아마 일 년 전 가을, 홀로 반란 영주를 제압하고 해시트를 기다리다가 성문을 열어 주었던 이레이를 기억하는 누군가가 혹시 모르겠지만, 다행히 그런 사소한 일을 머릿속에 담아 둔 이는 별로 없었다.

다시 말해 한 명쯤은 있었다.

“와, 이러고 있으니까 작년 가을 생도 시절이 떠오릅니다. 그때 이레이 대장님의 활약상이 훈련소까지 흘러 들어와서 다들 흥분했었거든요. 하하! 물론 이번 전쟁과 비교할 규모는 아니지만, 혼자서 반란 영주 일가를 제압하시고 백성들을 구출해 내셨었다니……. 새삼 대단하시다는 생각이 든다니까요.”

쥰은 모처럼의 따뜻한 저녁 식사 덕분에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연신 재잘거렸다. 그녀의 왼쪽 눈을 가린 새까만 안대 구석에는 금색 실로 해시트의 서명이 수놓아져 있었다.

재활 이후 이레이의 소대에 배정받은 그녀는 나이에 비해 다소 애늙은이 같은 면모 때문에 소대 내 막내 역할은 전혀 담당하지 못했지만, 가끔 이렇게 씩씩하게 조잘거리며 술자리를 이끌어 가곤 했다. 어차피 이레이 린이 대장으로 있는 부대에서 감히 막내의 본분 따위를 요구할 만큼 간 큰 대원은 없었으므로 아무도 불만을 제기하지 않았다.

이레이는 묵묵히 부하들이 따라 주는 술을 마시다가 느닷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장 이레이를 올려다보는 쥰의 정수리를 푹 눌러 앞을 보게 하더니, 시큰둥하게 부하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다들 쉬어라.”

“대장님은 어디 나가시렵니까?”

“산책 좀 하다가 내 막사로 가서 자게.”

“밖에 엄청 춥습니다. 눈도 내리고요. 그냥 여기 계시지 않고요.”

“너희들 술 냄새 못 참아 주겠어.”

그가 슬며시 웃는 낯으로 빈 술통 더미를 턱짓했다. 그 말에 반박할 수 없는 양의 술을 목구멍에 쏟아붓긴 했다. 쥰을 비롯한 모두는 머쓱하게 뒤통수를 긁적였다. 근데 저 중에 반은 대장님이 비운 거잖아요……. 아무렴 그렇게 술을 들이붓고도 술 냄새 하나 안 나는 그들의 대장이 세상 특이한 체질일 터다.

평소엔 마지막까지 자리에 남아 음주에 힘쓰던 상사가 오늘따라 일찍 일어난다니 다들 의아해했다. 그렇다고 기분이 나빠 보였느냐면 또 그것도 아니라서. 오히려 퍽 즐거운 기색이었는데 그건 어딘가 설레어 보이기도 했다.

“그럼 들어가십시오!”

“오냐.”

미련 없이 밖으로 나가는 이레이의 등 뒤로 소대원들의 말소리가 계속됐다. 쥰, 너 대장님 좋아하지. 네? 아니요? 무슨 그런 마, 마, 말도 안 되는 억측을 하고 그러십니까? 되게 불쾌합니다! 에이, 좋아하는 거 맞네. 불쌍한 자식, 어쩌다 그런 가시밭길에 발을 들였누. 왜, 왜 가시밭길인데요? 우리 대장님은…… 고백받으면 사람을 죽여. 네?! 거짓말이야. 사실은 찢어. 뭐라고요?! 이레이가 떨떠름하게 눈가를 좁혔다. 저것들이 또 애 붙잡고 쓸데없는 소리를 하고 있네. 물론 소대원에게 고백받으면 죽이긴 할 거다.

산책 좀 하다가 막사로 돌아가겠다던 그는 산책이라고 하기엔 너무 짧은 거리를 걸어 막사로 들어갔다. 그조차도 그가 아니라 라피난이 주인인 곳이었다.

“왔군.”

이레이의 얼굴을 확인한 라피난이 슬쩍 옆으로 비켜섰다. 내내 그를 기다렸다는 듯한 태도였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비켜선 자리에 해시트가 앉아 있었다. 평소와는 조금 다른 모습으로.

긴 흑발을 꽁꽁 묶어 로브 속에 감추고, 검은 복면으로 얼굴의 절반을 넘게 가렸다. 그리고 평상시엔 체구가 작아 보일까 회피하던 검은 옷으로 온몸을 무장한 채였다. 복면 위로 빼꼼 드러난 금색 눈동자만이 하릴없이 반짝거렸다.

그새 어깨에 쌓인 눈을 툭툭 털어 내며 이레이가 말했다.

“다들 술에 절어 있어. 앞이 안 보일 정도로 눈보라가 몰아치는 중이고.”

해시트는 별다른 대꾸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추장스러운 비단옷과 장신구를 모두 떼어 낸 그녀는 뭐든지 너무 작아서 라피난의 망토 속으로 숨어들기에 충분했다.

이레이는 해시트가 라피난의 품에 거의 안기다시피 하는 광경을 불만스럽게 바라보았지만 특별히 딴죽을 걸진 못했다. 언젠가 해시트가 하사해 준 망토조차 카펫으로 사용해 온 그다.

그 정도로 추위를 타지 않는 작자였으니, 아무리 눈이 펑펑 내린들 라피난처럼 망토를 걸치고 나갔다간 다들 무슨 일이냐며 한마디씩 물어볼 게 뻔했다.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감기 걸린 척이라도 해 둘걸.”

부루퉁한 그의 투정에도 역시나 타박이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아마 엄청나게 긴장한 모양이다. 지금쯤 라피난의 귓가에는 해시트의 심장 소리가 쿵쿵 요란법석을 떨어 댈 터였다. 바들거리는 손끝과 흐트러진 숨소리 같은 것들이 쉽게 상상 가자, 불현듯 이레이는 성큼 걸음을 당겨 라피난의 망토를 걷어 냈다.

“해스.”

눈을 맞추니 파드득 까칠한 반문이 돌아왔다.

“뭐야?”

“그냥. 오늘 네 목소리를 못 들은 것 같아서. 이제 됐다.”

그는 방긋 웃으며 그녀의 볼을 두드려 준 뒤 필요 이상의 짜증이 돌아오기 전에 재빨리 망토 자락을 되돌렸다. 허리를 펴는 그에게 라피난이 한심해하는 눈빛을 쏘며 소리 없이 입 모양만으로 욕설을 건넸다. 이레이는 만족스레 막사 밖으로 앞장섰다.

어두운 눈보라를 헤칠 땐 세 사람 중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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