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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시트와 가여운 짐승들-29화 (29/104)

29화.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날아간 화살이 나뭇가지 어딘가로 향하는가 싶더니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쿵!

죽은 이의 손에서 활시위가 채 떨어지기도 전이었다. 끔찍한 지옥도 한가운데서 그 장면만은 마치 의도된 연극인 양 느릿느릿 해시트의 시야에 맺혔다. 그래, 확실히 화살 따위는 그에게 문제가 되지 않을 성싶다.

그런데도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해시트에게, 이레이가 다시 한번 손을 내밀었다.

“날 믿어, 해스.”

왜인지 그 말 뒤로 언젠가 들었던 속삭임이 겹쳐졌다.

“그래서 해스. 내가 널, 황제로 만들어 준다고 했잖아.”

한 번 잡으면 다신 벗어날 수 없을까 봐 두려워했었다. 그만큼 매혹적이었다. 해시트는 홀린 듯이 그 위에 손을 얹었다. 본능이었다는 말로밖에 표현이 안 됐다.

꽈악, 피 묻은 두 손이 단단히 맞물린 순간 이레이는 씨익 웃었고 라피난은 거칠게 소리쳤다.

“전하!”

외면해야 한다. 해시트는 질끈 두 눈을 감고 딱딱하게 말했다.

“헬렌밀의 호수에서 합류하지. 수행원 중에 쥰 데이티니스라는 열여덟 살 여성이 있다. 만약 오늘 살아남는다면 잘 치료해 줘서 내 앞에 데리고 와라. 그리고 숲을 떠나기 전에 적들이 쏜 화살을 샅샅이 수색해 전부 불태우도록. 알겠나? 단 한 개도 남겨 두어선 안 돼. 시체를 관통한 것까지 몽땅 뽑아내서 태워.”

마차 밖으로 뛰쳐나온 그녀가 바닥에 떨어진 화살 한 개를 주워 품 안에 챙기며 덧붙였다.

“조금 늦어져도 괜찮다. 죽은 이들의 가족에게 전해 줄 유품을 챙겨 줘. 명령이다.”

다행히 라피난은 그녀의 의도를 알아차린 듯했다. 더는 말리지 못하고 꾹 이를 악물었다.

“호수는 발각될 위험이 있습니다. 최대한 빨리 출발해서 도시 첫 번째 길목에 두 번째로 보이는 여관을 잡아 두겠습니다. 그곳으로 오십시오. 암호는…….”

잠시 가물어지던 목소리가 곧 쓸 만한 암호를 쥐어짜 냈다. 흘긋, 이레이를 곁눈질하고는.

“떠돌이.”

아니. 똑바로 바라보면서 말했다.

*

“이쪽이 지름길이야.”

이레이가 이끈 곳에는 절벽에 가까운 가파른 구릉이 있었다. 저런 건 당연히 지름길일 수밖에 없지 않나. 감히 ‘저런 걸’ 숲길과 비슷한 노력으로 건너갈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그것도 이렇게 까마득히 어두운 밤에.

해시트는 못내 아연실색했지만 내색하지 않으며 그를 따라갔다.

다행히 이레이는 구릉을 타는 해시트에게 느려 터졌다며 구박하진 않았다. 그녀가 최대한 노력해서 속도를 낸 덕분도 있었고, 애당초 이레이에겐 빨리 가야 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는 열심히 언덕을 오르는 해시트를 가만히 지켜보다가 문득 입을 뗐다.

“업어 줄까?”

“필요 없어.”

그녀가 매몰차게 거절하자 잠시간 더 내려다보다가 휙 고개를 되돌렸다. 어째 기분이 상한 낌새다. 아니나 다를까 금세 낮은 중얼거림이 들렸다.

“라피난이 화났을까 봐 걱정하고 있군.”

“…….”

그런 거 아니야, 라고 항변하기엔 이미 티를 내고 말았다. 해시트는 이레이의 앞에서 잘 숨기지 못했다. 그야 굳이 숨길 필요 없는 상대니까, 그렇게 변명하기에도 마땅치 않았다. 이레이가 그 속이 훤히 들여다보인다는 양 피식거렸다.

“너처럼 다른 사람 눈치를 보는 황족은 세상에 없을 거다.”

“…….”

“원래 그런 성격인 거야, 아니면 그 자식이 네게 그렇게 특별한가?”

하지만 해시트가 계속 대답이 없자 그도 더는 혼자 떠들어 대지 않았다.

침묵 속 꾸역꾸역 바위산을 오르고 있자니 불현듯 억울함이 치밀었다. 그러는 저도 라피난이 떠돌이라고 놀려서 화났으면서. 그런가 하면 어쩌자고 이놈을 따라나설 마음이 들었는지 뒤늦은 후회에 휩싸이기도 했다. 수행원들을 뒤로한 채 홀로 이레이를 따라온 선택에 하릴없는 자괴감이 들었다.

헬렌밀 대신전으로 도착했을 때 라피난이 없다면 어떡하지?

혹시 라피난이 잘못되었다면…… 해시트는 어떻게 해야…….

불길한 생각이 미친 순간, 돌부리가 부서지며 몸이 아래로 꺼졌다.

“헉!”

삐끗, 헛디딘 빈틈으로 작은 돌멩이들이 굴러간다. 통통통……! 까마득한 아래에서 메아리가 울려 퍼졌다. 해시트가 긴박하게 죄였던 숨통을 천천히 터뜨렸다.

“하아아…….”

그제야 고개를 들어 올리자, 이레이가 그녀의 손목을 단단히 붙잡아 버티고 있었다.

“그래서 업히랬잖아.”

짜증 가득한 말투와는 달리 그는 해시트를 완전히 끌어 올려 준 뒤에도 쉽게 손을 놓아 주지 않았다. 한쪽 팔로 그녀를 끌어안다시피 지탱한 채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눈짓으로 그녀에게 양해를 구했다. 쉬었다 가자는 뜻이었다.

잠시 후, 적당한 평지를 찾아낸 그가 해시트를 나무 밑동에 내려 주고 말했다.

“먼저 얘기할 때까지 모른 척해 주려고 했는데, 이 짓도 짜증 나서 못 해 먹겠어.”

잔뜩 짓씹는 목소리였다.

이레이는 털썩 자리에 쪼그려 앉더니 해시트의 바짓단을 걷어 냈다. 퉁퉁 부은 왼쪽 발목이 고스란히 드러나자 해시트는 그가 화를 내던 진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떠돌이라고 놀림받아서가 아니었다. 해시트가 다쳐서. 그녀는 본능적으로 변명했다.

“별로 안 아팠어.”

이레이는 듣는 체도 안 했다. 그저 흘긋 그녀를 한 번 올려다보더니, 자신의 무릎 위에 그녀의 발바닥을 올려놓곤 본격적인 진료에 돌입했다.

“마차가 전복될 때 다쳤군. 발목뼈가 아예 옆으로 나갔는데 퍽이나 별로 안 아팠겠어. 이대로 보름만 방치해도 평생 절름발이 신세인 건 알아?”

“그 정도는…… 걷다 보니까 나름 걸을 만하던데.”

“뼈 맞출 거니까 잠깐 입 다물고 있어라. 진통제 없으니까 알아서 견디고.”

지금은 있어도 주기 싫어. 그는 차갑게 덧붙였다. 이상하게 점점 쌀쌀맞아진다. 그건 해시트로 하여금 겨우 납득한 상황을 다시 몰이해로 몰아넣기에 충분했다.

으득, 엇나간 발목뼈를 원래대로 비트는 소리가 났다. 눈물이 찔끔 고일 정도로 아팠다. 해시트는 뜨겁게 달아오른 눈시울을 감추려 두 손으로 눈가를 짚었다. 미처 가리지 못한 입술에서 슬그머니 질문이 튀어나왔다.

“왜 일부러 못되게 굴지?”

단지 부상을 숨겼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까지 못되게 할 필요는 없었다. 분하게도 그녀는 이레이나 라피난처럼 괴물 같은 신체 능력을 가진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번번이 부딪히고 깨지고 죽을 뻔하면서 겨우겨우 살아남곤 했다. 다쳤다고 내색하지 못한 자존심이 초라한 건 사실이었지만, 그것조차 한두 번이 아니었으므로 오늘에야 유독 화를 낼 이유로는 부족했다.

이레이도 그렇게 생각했나 보다. 불현듯 그의 표정이 착잡해졌다.

“나도 모르겠군. 그러게. 위악을 떠는 건 네 특긴데 왜 내가 이러고 있는지…….”

잘 모르겠어. 모르겠다는 말이 몇 번쯤 그의 입가를 맴돌며 웅얼거렸다.

사실 해시트는 그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애매모호한 말장난으로 요리조리 빠져나갈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다. 이레이도 자존심으론 해시트에 못지않았으니까, 당연히 솔직함을 기대하지 않았단 뜻이다. 그래서 뜻밖의 상황에 당황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설상가상으로 그때까지 해시트의 발목에 고정되어 있던 이레이의 시선이 그녀의 얼굴로 올라왔다. 깜빡, 눈꺼풀을 부대끼는 짧은 사이에 그의 눈빛이 확연히 달라졌다.

“내가 화내서 섭섭한가? 다정하지 않아서?”

“……그럴 리가.”

해시트는 넌지시 그의 시선을 피했다.

꼭 어리광부리는 어린애가 된 기분이었다. 말도 안 된다. 분노해 마땅했다. 죽다 살아나자마자 다시 사지로 걸어 들어가야 하는 상황에서, 그것도 산처럼 쌓인 사람 목숨을 밟고 도망치는 와중에 염치가 있다면 그래서는 안 됐다.

그녀는 바짝 마른 목울대를 억지로 꿀꺽 삼켰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서였지만 차라리 귀를 막는 게 나을 뻔했다. 바로 이레이의 다음 질문이 이어졌다.

“다정하게 대해 줄까.”

“…….”

“원한다면.”

어느새 그는 언제 해시트를 바라봤냐는 양 다시 그녀의 발목을 들여다보는 작업에만 열중이었다. 나무토막 대하듯 시큰둥하기 짝이 없는 손길이었다. 하지만 목소리만은 계속 나직했다.

“해스.”

이름을 부른다.

해시트는 갑자기 발목에 닿아 있는 그의 손가락이 소름 끼쳐서 견딜 수 없었다. 그의 차가운 체온이 생전 처음 느껴 보는 감각을 그녀에게 알게 했다. 그러나 여전히 알맞은 단어를 몰랐기에 그녀는 더럭 화를 냈다.

“그렇게 좀 부르지 마!”

“싫었으면 진작 말했어야지.”

이레이가 피곤하게 한숨지었다.

“그때 허락했잖아, 네가.”

그러잖아도 해시트는 후회하고 있었다. 그때 그렇게 부르도록 묵인하는 게 아니었다. 그때 그래선 안 됐는데. 계속 언성이 올라갔다.

“그때는 내가……!”

“그때 너는 뭐.”

“…….”

“얘기해 봐.”

당사자가 싫다는데 무슨 억지를 그리 부려 대는지 답답하기만 했다. 벌써 몇 번째 주장이 묵살당하자 해시트도 오기가 차올랐다.

되는 대로 입을 놀렸다.

“그땐 그냥…….”

비록 조금 머뭇거렸을지언정, 불가항력처럼, 그녀도 솔직해지고 만다.

“그땐 내가 조금 쓸쓸했어.”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더는 할 말이 없어 굳게 다물어 버리자 자연스레 이레이의 차례로 돌아갔다.

“그럼 지금은?”

“…….”

한 번 닫힌 그녀의 입술은 좀체 다시 달싹일 줄을 몰랐다. 아마 이레이도 대답을 기대하진 않았을 것이다. 어차피 그가 듣고픈 대답은 정해져 있었을 테니까. 해시트가 해 주지 않는다면 그가 못 박아 버리면 그만이다.

“지금은 내가 있어서 쓸쓸하지 않은 거겠지.”

“…….”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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