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그런 곳은 어쩌다 알아냈느냐고 질문이 돌아올 것을 대비해 나름 만반의 준비를 갖춰 두었거늘, 애석하게도 라피난은 의문 한 점 없는 얼굴로 명령을 받들었다.
“예. 주시하고 있겠습니다.”
어쩌면 너무 티가 나는 바람에 물어볼 의욕조차 사라졌을지도…….
해시트는 찻잔을 기울여 얼굴을 가렸다. 어차피 라피난이 ‘황제궁 앞에 쏟아진 동물 뼈 사건’의 진실을 눈치챘대도 당분간은 그녀를 들볶을 리 없었다. 그보다 훨씬 더 중차대한 사건이 그들의 코앞까지 다가와 있는 이상.
*
확신컨대 이십여 년 전, 갓 태어난 아이의 성별을 바꿔 세상에 공표할 때까지만 해도 레오니스 황제는 전혀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을 터다.
아이는 또 낳으면 되고 그중에 언젠가는 남자아이가 있을 테니까. 그때 가서 불필요한 논란을 막기 위해 최선의 선택을 했었노라 근엄하게 진실을 밝힌다면 별문제 없이 지나가리라. 그렇게 생각했을 터다.
하지만 아이는 더 이상 태어나지 않았고 황비는 여자아이가 열한 살이 되던 무렵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황제에겐 골치 아픈 일이었다. 더욱 골치 아프게도, 엄마를 잃고 덩그러니 혼자 남은 열한 살짜리 여자아이는…… 너무나 명석했다.
단순히 언어를 깨우치고 성서를 외며 예술적 감각이 영민한 수준의 명석함이 아니었다. 해시트는 자신이 어째서 남자로 자라야 하는지 처음부터 알고 있던 사람처럼 행동했다.
매사 신경질적으로 반응했고, 그것을 타고난 고상함으로 포장했다. 어느 지나가던 멍청이라도 그녀가 존귀하신 황태자 전하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모두가 그녀를 두고 실로 완벽한 황태자라며 입을 모아 칭송했다. 도무지 사내아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빼어난 아름다움에 일장 탄복하면서도 그 누구도 해시트의 성별을 의심하진 못했다.
황제도 가끔은 탄식했을 것이다.
아, 정말로 남자아이였다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그녀가 여자라는 사실을 바꿀 수는 없었다. 정말 신의 섭리대로라면, 그녀는 진작 올바른 적통에게 후계 자리를 넘기고 적당한 나라의 왕 혹은 왕자와 결혼했어야 할 운명이었으니까.
다시 말해 아직 신이 분노하지 않았기 때문에 살아남아 여기까지 온 것이다.
‘황태자의 성년식’.
이 고비마저 넘기면 해시트는 전위받을 모든 자격을 갖추게 된다. 이후엔 무를 수 없었다. 당대 황제가 서거한다면, 차기 황제는 반드시 해시트가 될 수밖에 없다.
자격을 갖춘 황태자를 암살하기란 지금까지와 비교했을 때 하늘과 땅 정도 차이가 난다. 그리하여 해시트가 넘어야 할 마지막 고비인즉슨 황제에겐 마지막 남은 기회가 되었으리라.
절체절명이다. 당신과 나 모두가.
해시트는 수행원의 얼굴을 주욱 훑어본 뒤 나직이 한마디를 내뱉었다.
“못 보던 얼굴들이 많군.”
성년식에 쓰일 성물은 황태자가 직접 헬렌밀 대신전에 방문해 빌려 오는 것이 지엄한 전통이었다.
신성 도시 헬렌밀을 왕복하려면 아무리 빨리 마차를 달려도 열흘은 필요하다. 성스러운 목적을 위해 꾸려진 만큼 황태자 수행원들의 복장은 단정함을 넘어 얼굴의 반을 감색 복면으로 가린 채였다.
그 틈에 로브까지 뒤집어쓰고 조용히 섞여 든 이레이도 있었고, 라피난은 눈에 띄는 백금발을 그대로 드러내고 언제나처럼 해시트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고개를 기울인 라피난이 작게 속삭였다.
“전부 황제궁에서 보낸 자들은 아니고 이쪽에서 준비한 자들도 섞여 있습니다. 만약 무슨 일이 생기거든 절대 마차 밖으로 나오지 마시고 기다리십시오. 안전한 상황이 되면 제가 직접 문을 열겠습니다.”
“앞엔 네가 대기하나?”
“후방은 이레이가 지키고요.”
어느 쪽이든 두 사람만 믿고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건 변함없다. 해시트는 무거운 한숨을 삼켰다.
“알겠다.”
“이만 출발하시죠.”
라피난이 한 번 더 고개를 조아리고 마차 문을 열었다. 묵묵히 그의 안내에 따르던 해시트가 돌연 걸음을 멈추더니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양옆으로 늘어선 수행원 사이에 선 누군가를 쳐다본다. 물끄러미, 그리고 확신에 찬 미소를 입가에 퍼뜨렸다.
“너는 아는 얼굴이야. 오랜만이구나.”
“예, 예?”
느닷없는 인사에 깜짝 놀란 수행원이 말을 더듬었다. 아직 앳된 기운이 남은 여성의 목소리였다. 입대한 지 얼마 안 되었는지 그녀의 군장에 마땅한 장식이 없는 것을 확인한 해시트가 다시 그녀와 눈을 맞추고 말했다.
“내가 전장에서 귀환할 때마다 마차를 따라와서 직접 깎은 나무 조각을 바쳤지? 잘 간직하고 있다. 최근 안 보여서 궁금했는데 입대했을 줄은 몰랐어. 이름이 뭐지?”
수행원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모두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향한 가운데―와중에 이레이 린은 탐탁잖게 팔짱을 끼고 중얼거렸다. 저거 혹시 여자 좋아하는 거 아냐?―잠시 후 수행원이 큰 몸짓으로 경계하며 복면이 휘날리도록 커다랗게 외쳤다.
“쥰 데이티니스입니다, 전하! 모실 수 있게 되어 영광입니다!”
“나이는?”
“열여덟 살입니다!”
“그래, 쥰.”
해시트는 귀청이 따갑지도 않은지 차분하게 덧붙였다.
“앞으로 잘 부탁한다.”
훗날 당사자에게 듣기로는 그때 쥰의 눈엔 해시트가 동화 속 왕자님처럼 멋지게 보였다던데, 본의 아니게 소녀의 순정을 짓밟고 만 데에 해시트도 조금은 미안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첫사랑은 아니었겠지, 그런 자기 위안까지 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특히.
*
헬렌밀 대신전으로 향하는 여정은 예상보다 순조로웠다. 봄이었고 태양은 여름보다 짧은 대신 부족하지 않게 따뜻했으며 등진 곳에선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해시트도 그들이 출발하자마자 일을 벌일 거라고는 예상하지 않았으므로 긴장을 늦추고 체력을 비축하려 노력했다. 그녀도 암살을 계획할 땐 언제나 상대방의 체력과 정신력이 얼마만큼 바닥나는 시기를 기다리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마냥 방심하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그녀는 별수 없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며칠이나.
그리하여 몇 번의 낮과 밤을 보내고, 다시 부서지던 햇빛이 가물어 어둠이 찾아온 어느 밤에 순식간에 상황이 급변했다. 선두에 선 여섯 마리의 말이 돌부리에 걸려 일제히 넘어진 것이 시작이었다. 지름길을 쫓아 숲을 가로지르려던 마차는 숲을 절반도 빠져나가지 못했다.
히이잉!
거친 말 울음과 함께 온갖 것이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사람의 살이 찢기고 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뒤엉겼다. 낭떠러지 아래로 아득히 멀어지는 비명이 연달아 들리더니 곧 나무 위에서 화살 비가 빗발쳤다. 수행원 절반이 갑자기 태도를 돌변해 아군에게 달려들었다. 아비규환이었다.
이쯤 되면 아예 사고사로 위장할 마음도 없는가 보다. 아니면 다 죽여 버릴 자신이 있다는 거다. 해시트는 라피난이 단단히 일러둔 대로 당장 마차 문부터 걸어 잠그고 무기를 챙겼다.
콰직, 콰직! 마차 천장에 화살촉 박히는 소리가 섬뜩했다. 그중에 몇 발은 넘어진 말들에게 쏟아진 모양이다. 그러잖아도 심하게 흔들리던 마차는 군마의 몸부림을 버티지 못하고 전복했다.
쿠웅! 육중한 충격에 깨진 창문이 해시트의 몸 위로 쏟아져 내렸다. 해시트는 팔로 얼굴을 보호했다. 성년식에 흠집 난 얼굴로 참석하면 신관이 성수를 발라 주다 말고 부정을 탔다는 둥 헛소리를 할 것이다.
한쪽 발목이 비틀렸는지 시큰한 통증이 찾아왔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발목은 신발로 가릴 수 있다. 별안간 깨진 창문을 비집고 들어온 주먹이 걸쇠를 풀어 헤치더니 냅다 문짝을 떼어 냈다.
“전하! 이쪽으로, 크윽……!”
“넌 모르는 얼굴이군.”
해시트의 검이 그의 목 중앙을 꿰뚫었다.
“라피난의 지시를 어겼으니 우리 편도 아닐 테고.”
까드득, 검을 박아 넣은 채 옆으로 비틀자 시뻘건 핏물이 배어 나왔다. 해시트는 검을 뽑아내며 솟구치는 피를 피해 몸을 웅크렸다. 당연히 완벽하게 피할 수는 없어서 깨끗한 흰옷에 핏물이 방울방울 튀었다.
그녀가 슬며시 인상을 찌푸린 순간, 아예 얼굴을 피로 뒤집어쓴 라피난이 창틀에 걸친 시체를 끌어내 옆으로 패대기쳤다.
“안에 계십시오. 화살이 말들을 집중적으로 노려서 발이 묶였습니다.”
다급한 행동과 달리 말투만은 침착했다. 덕분에 해시트도 계속 냉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파악된 적군의 수는?”
“아군의 두 배 이상입니다만 지상에 있는 자들은 거의 처리했고 나무에 매복 중인 적을 찾아내야 합니다.”
라피난은 말하는 틈틈이 달려드는 적군의 배에 검을 찔러 넣고 발로 걷어차길 반복했다. 이윽고 마부석에서 뜯어낸 나무판자를 깨진 유리창 위에 덧대며 신신당부했다.
“약속하십시오. 절대 나오시면 안 됩니다.”
그러고는 해시트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검 손잡이로 땜질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가 문짝의 걸쇠를 걸기 전에 이레이가 나타났다.
“그냥 나와. 내가 안전하게 모시지.”
“이레이.”
해시트가 눈을 크게 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핏물을 뒤집어쓴 남자의 모습은 지금껏 전쟁터에서 익히 봐 온 그대로였다. 다만 그런 모습으로 그녀에게 손짓한 적은 없었다. 그것도 이렇게 명령하듯이.
“나오라니까.”
“방금 라피난이 한 얘기 못 들었나? 말이 죽어서,”
“못 듣긴 했지만 들었어도 상관없어. 나와.”
급기야 이레이는 라피난이 기껏 돌려놓은 문짝을 우악스럽게 뜯어내고 해시트의 팔목을 잡아당겼다. 무심한 표정이었다. 그 순간에도 달려드는 적군 하나를 해치운 라피난이 버럭 언성이 높이며 그를 밀쳤다.
“제정신인가? 아무리 자네라도 이 화살 속을 뭘 어떻게 하겠다고!”
“화살이 뭐가 어쨌다고?”
홱, 때마침 그의 뒤통수로 화살이 날아들었다. 이레이는 돌아보지도 않고 한 손으로 화살을 낚아챘다. 그리고 제대로 겨낭하지도 않은 채 하늘로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