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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시트와 가여운 짐승들-27화 (27/104)

27화.

“그즈음 라피난이 다시 나를 찾아왔다. 나는 열두 살, 녀석은 열여덟 살이었지.”

“…….”

“그때도 라피난은 나에게 사탕을 줬어.”

포장지가 너무 단단히 묶여 있어서 뜯는 데 오래 걸리는 사탕. 그걸 당장 뜯어서 입에 넣지 않으면 미련 없이 돌아가 버릴 것처럼 쳐다보기에, 해시트는 어쩐지 조바심이 나서 열심히 손가락을 놀렸었다.

“사탕을 입에 넣고 굴리고 있자니 그 녀석이 그러더군. ‘또래에 비해 키가 좀 작으시군요.’ 그리고 다음 날엔 갑자기 말 두 마리를 내 앞에 끌고 와서 그러는 거야. ‘키 크는 덴 승마가 좋다고 합니다.’ 그날부로 녀석에게 말 타는 법을 배워야 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해시트는 그때 라피난이 왜 그녀를 선택했는지 모른다. 황가에 맹목적으로 충성한다는 카일 가문의 핏줄이 어째서 당대 황제가 아닌 어린 황태자에게 발동하였는지, 도무지…….

“라피난은 수업 중에 이 몸이 말에서 고꾸라져도 내가 먼저 명령하기 전엔 부축조차 안 해 줬다. 맞아. 처음부터 그런 놈이었어. 가끔 보면 얼굴도 그때부터 하나도 안 변한 것 같아……. 어려서 노안이더니 어느새 동안이 되어 버렸어.”

푸스스 실없는 웃음소리가 흩어진 뒤에 때아닌 침묵이 찾아왔다. 해시트가 이다음 이야기를 해도 좋을지 망설인 탓이다. 웬일로 이레이는 아무런 독촉도 하지 않고 묵묵히 기다려 주었다. 해시트의 입술이 다시 열릴 때까지.

“또 반년이 지나서…… 내 인생의 첫 번째 자객이 찾아왔다.”

그까짓 것도 추억이라고 잠시 들떴던 목소리가 단숨에 무거운 추를 매달고 바닥을 디뎠다. 해시트는 더 이상 웃지 않았다.

“하필 승마 수업 중이라 안장에 앉은 채로 옆구리를 창에 꿰뚫렸지. 즉사하지 않은 게 기적이었어.”

“어쩌면 신이 도왔을지도.”

불현듯 이레이가 중얼거렸다. 물씬 어두워진 분위기를 환기해 보겠답시고 농담을 건넨 것이라면 해시트가 해 줄 말은 하나였다.

“그 입을 좀 닥쳐 주면 고맙겠군.”

“얼마든지.”

으쓱, 이레이가 순순히 두 손바닥을 허공에 내보였다. 그러면서 시선으로는 명확하게 해시트의 옆구리를 훑었다. 언젠가 전장에서 보았던 거대한 흉터를 떠올리는 모양이었다. 해시트는 애써 그 시선을 무시했다.

“자객은 증거를 인멸한답시고 라피난에게 달려들었다가 그 자리에서 단검이 목에 박혀 즉사했다. 난 의원을 부르겠다는 녀석을 붙잡고 안 된다고 애원했지. 울었는지 어쨌는지는 기억이 안 나. 다행히 똑똑한 녀석이라 바로 알아듣더군. 정신을 차려 보니 치료는 완벽하게 끝나 있었고, 녀석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뭐라고 했는데?”

중요한 순간에 뜸을 들이는 그녀를 향해 이레이가 넌지시 질문을 던졌다. 이번만큼은 그녀에게 필요한 배려가 시간이 아닌 손길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처럼. 그리하여 고요히 등을 떠밀어 주는 손길에 마냥 밀려난 해시트가 말했다.

“‘걱정 마십시오. 의원도 죽였습니다.’”

말했다.

드디어…….

오래 벼르던 것을 내려놓은 해방감에 저절로 눈이 감겼다. 그러자 바로 어제 일처럼 그날의 모습이 또렷이 재현됐다.

처음엔 라피난이 해시트를 안심시키기 위해 거짓말을 한 줄 알았다. 아니었다는 걸 알았을 때, 정말로 죽은 의원의 시체를 마주했을 때, 그 시체를 절벽 아래로 떨어뜨리는 라피난을 목격했을 때, 그날 해시트가 느낀 충격은 여전히 해시트의 마음 한편을 고스란히 차지하고 있다. 생생하다는 말로는 부족할 것이다.

라피난은 어린 해시트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그녀와 눈을 맞췄었다. 차가운 목소리로 다정함이라고는 없이, 우는 그녀를 어르고 달랬다.

“일단은 살아남지요. 죽어 마땅한 놈들은 차근차근 죽이더라도 말입니다.”

“죽어 마땅한 놈들…….”

“예. 죽어 마땅한 놈들.”

피도 눈물도 없이 차가운 이성.

어린 해시트는 그의 냉정함을 간절히 바랐다.

갈망하고 염원했다. 저 칼날 같은 이성을 가질 수 있기를…….

“부럽다.”

불시에 밤공기를 뚫은 이레이의 목소리가 해시트의 귓가에 닿았다.

“나도 너 우는 거 보고 싶어.”

그것이 그에겐 간절한 염원이라고.

“…….”

“…….”

산통을 깨도 정도가 있다. 해시트는 멍하니 벌어졌던 입술을 꾹 다물고 물씬 살기 어린 눈으로 그를 노려봐 주었다.

“이걸 확 죽여 버릴 수도 없고 진짜.”

“그래, 그 험악한 말버릇을 어디서 배웠나 내심 궁금했거든. 만날 죽이지도 못할 거면서 죽이네 살리네. 그런데 이제 알겠어. 라피난 흉내를 내는 거였군.”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널 죽이고 싶은 건 내 진심이다. 누구 흉내 따위가 아니란 말이다.”

“그래? 나도 네 우는 얼굴 보고 싶은 거 진심인데, 그럼 우리 이렇게 할까?”

“또 무슨 수작…….”

“내 목숨을 너한테 줄게.”

“뭐?”

“언젠가 내가 죽으면, 다시는 울 수 없을 때까지 실컷 울어 줘. 나를 위해서.”

“…….”

나를 위해서. 그가 되뇌었다. 장난기 없이 차분한 얼굴이었다.

“체통 없이 바닥을 기면서 울부짖어도 좋고, 가슴에 멍이 들도록 내리치면서 통곡해도 좋아. 남들 몰래 이불을 뒤집어쓰고 숨죽여 우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 어쨌든 내가 죽은 다음에라도 꼭 구경할 수 있도록, 눈물이 말라붙을 때까지 참지 말고 울어야 해. 그리고 두 번 다시는 다른 이 때문에 울지 마라.”

하나부터 열까지 완벽하게 불가능한 당부였다. 그야말로 농담인지 진담인지 여부를 가릴 가치조차 갖지 못할 황당무계한 발언이었다. 그런 소리를 늘어놓는 저의는 더더욱 판단할 필요 없었다. 그런데도 끝까지 귀담아듣고서 한 차례 곱씹은 뒤에야 입이 떨어졌으니 억울하다.

“꿈 깨라.”

그러자 이레이가 차분하던 낯에 작은 미소를 끌어 올렸다.

“내 꿈이라는데 네가 왜.”

해시트는 그만 일어나려 했다. 오늘은 그의 흰소리를 너무 오래 들어 주었다. 그러나 그녀가 자리를 뜨는 것보다 상황이 더 빠르게 흘러갔다. 이 소담하고 아름다운 정원에 갑작스러운 새로운 인물이 등장한 것이다. 정확히는 ‘새 인물들’이었다.

“해스, 이리 와.”

그녀는 부지불식간에 이레이의 손에 이끌려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하필이면 있으나 마나 한 가느다란 초승달만이 밤하늘에 떠 있는 밤이었다. 그나마도 언제부터인가 구름에 가려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토록 어두운 밤에, 해시트는 빨간 머리 남자와 함께 나무 뒤에 숨어서 소담한 정원을 훔쳐봤다.

레오니스 황제와 그의 연인이 달밤 아래 밀회를 즐기고 있었다.

아무리 공식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관계라고는 하나 이런 야심한 시각에 사람들의 눈을 피해 만날 이유라면, 불온한 상상력이 드는 게 당연했다. 해시트는 몇 가지 가능성을 머릿속으로 떠올려 보았다. 암살, 계략, 부정한 청탁과 속살거림. 그리고 마지막에 떠오른 것은 은밀한 사랑의 언어였다.

달빛 아래 두 사람이 서로의 뺨을 쓰다듬는다. 이제 해시트의 불온한 상상력은 모두 쓸모없어졌다. 저 밤하늘에 있으나 마나 한 초승달처럼 매가리가 없었다. 그녀는 역시나 쓸모없는 의문을 가질 따름이다.

애틋할까.

혹시 사랑하고 있을까.

인간사엔 어째서 사랑이 필요한가.

다행인지 불행인지 의문이 호기심으로 변할 기회는 없었다. 황제와 연인의 밀회는 금세 끝이 났고, 그러자 해시트의 어깨를 감싸 쥔 빨간 머리 남자가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기 때문이다.

“상처받았나?”

그도 쓸모없는 질문을 한다. 오늘은 모두가 그런 날인가 보다. 해시트가 슬며시 그의 팔을 걷어 냈다.

“호들갑 떨지 마라. 네가 이곳에서 내 암살 의뢰를 받았으리라는 것까지 충분히 짐작하고 있었으니까.”

“오.”

그가 의외라는 듯 한쪽 눈썹을 치켜뜨기에 해시트는 짐짓 우쭐해했다.

“그런 게 아니라면 황태자궁의 군식구가 이런 밀회 장소를 알 턱이 없지. 처음에 날 죽이라는 의뢰를 받았을 때 이곳에 와 본 거지? 참, 예전부터 궁금했는데 그때 돈은 얼마나…….”

“그렇군. 내 생각이 짧았다.”

“뭐가?”

너무 짚이는 게 많아서 되묻지 않고는 못 배겼다. 여태 이레이가 생각이 짧은 짓을 적당히 했어야지 말이다.

그는 허리를 굽혀 해시트와 눈을 맞췄다. 그것만으로 부족했다면 한쪽 무릎이라도 꿇을 것 같은 표정이었다. 이내 차가운 손끝이 그녀의 눈가를 훑었다. 황당했다.

“울지 마.”

“…….”

“이런 건 죽을 때까지 안 보는 게 나았어.”

버석한 손끝이 마른 눈가를 간질이고 지나갔다. 진실로 그녀는 울고 있지 않았으므로 이레이의 손끝에 물방울이 어리는 일은 없었다. 단지 그가 호들갑을 떠는 중이다. 혹시 지금 해시트의 눈동자를 반짝이게 하는 촉촉한 기운이 어느 순간 동그랗게 고여서 아래로 떨어질까 봐.

당연히 그럴 일은 없다. 해시트는 문득 좁아진 목구멍을 능숙하게 풀어 헤쳤다.

“누가 운다고.”

그런 초라한 모습은 절대로 이레이에게 보여 주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가 살아 있는 한 절대로.

*

“간밤 사이 황제궁 앞으로 짐승 백골이 무더기로 흘러들었다더군요. 우연이 겹쳐서 숲속에 묻어 두었던 것들이 빠져나왔다는 정황입니다만, 그보다는 누군가 짐승들의 무덤을 파헤쳐 일부러 가져다 놓았다고 보는 게 더 신빙성 있겠죠. 물론 그런 간 큰 자가 성 안에 존재할 리는 없겠지만 말입니다.”

오늘따라 라피난의 아침 인사가 길었다. 해시트는 그가 가져온 따뜻한 헤라꽃 차에 우유를 들이부으며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난 잘 몰라. 심문하고 싶은 거면 나 말고 당사자를 찾아가든지.”

그나마 사람 말고 짐승 무덤을 파헤치는 데 그쳤으니 나름 잘 참았다고 칭찬해 주어야 할까. 해시트가 어떤 고민 중인지 라피난이 안다면 배신감에 치를 떨 게 뻔하다. 도대체 어쩌다가 그 미친놈에게 이렇게 익숙해졌는지 그녀도 경악스러울 따름이었다.

해시트가 말했다.

“남서쪽 동상 뒤에 페하의 밀회 장소가 있더구나. 정확한 위치를 알려 줄 테니 앞으로 눈여겨보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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