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눈빛과 말투는 무심하기 그지없었다.
“억지로 굶어서 한계까지 말렸군. 이러니 성격이 점점 예민해지지.”
“……신경 꺼라.”
탁, 해시트가 그를 뿌리쳤다. 찰나도 못 가서 도로 붙잡혔다.
“놔라.”
“굶기 시작한 지 얼마나 됐지? 하루에 먹는 음식의 양을 말해 봐.”
“감히 이 몸에게 명령하지 마.”
“설마 물과 소금만 먹고 버틴 건 아니겠지?”
“…….”
“젠장, 매번 상상을 초월하는군. 이젠 밥 먹으란 잔소리까지 해야 하나.”
오랜만에 의원 놀이라도 하고 싶은 것인지 빈정거리는 말투가 마치 작정하고 환자를 혼내는 듯했다. 해시트는 라피난과 한 차례 눈짓을 주고받고 마지못해 변명했다.
“입맛이 없었다. 그뿐이야.”
“거짓말.”
“믿기 싫으면 믿지 말든가.”
다시 팔을 비틀어 빼내자 이번엔 이레이도 순순히 그녀를 놓아 주었다. 하지만 보란 듯이 허공에 손바닥을 펼쳐 보인 뒤엔 비죽이 실소하면서 그녀의 정곡을 찔렀다.
“하긴, 누가 봐도 묘령의 여인이니.”
해시트는 이를 악물었다. 이 망할 무뢰한이 이젠 아예 눈치도 안 보기로 결정했나 보다.
“숨 쉬기 힘들 정도로 흉부를 압박했다가 회의 중에 기절하느니 차라리 기아가 되는 쪽을 택했군.”
“야.”
“내가 뭐 틀린 말이라도?”
그가 어깨를 가볍게 들었다 놓았다. 그녀가 한마디도 반박하지 못하리란 사실을 확신했기에 취할 수 있는 태도였다.
그래, 그의 말이 다 맞다.
나날이 붉어지는 뺨과 자라지 않는 키, 낭랑한 목소리와 시나브로 곡선을 띤 육체는 한시라도 방심했다간 그녀의 비밀을 온 세상에 까발리기 충분했다. 고지를 코앞에 두고서 허무하게 고꾸라질 수는 없었다.
들통나지 않으려면 습관적으로 굶어 빼빼 마르거나 어지럼증이 도질 만큼 몸을 압박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며칠을 굶고 나면 안색이 눈에 띄게 창백해져서 이레이와 말싸움할 기력마저 잃곤 했다.
해시트는 그냥 고개를 돌려 버렸다.
“이제 마지막 고비야. 이번 고비를 넘기고 나면 너도 다시는 내게 그런 말을 못 할 거다.”
마지막.
왜인지 그 단어가 해시트의 입에 오른 순간, 한발 멀리서 그녀를 지켜보던 라피난이 선고받은 죄인처럼 질끈 두 눈을 감았다. 그리고 아무도 그를 보지 못했다.
*
“라피난과는 어떻게 알게 된 사이야?”
이레이가 아주 오래전부터 그 사연을 궁금해해 왔다는 것은 해시트도 잘 알고 있었다.
솔직히 지금까지 캐묻지 않은 게 조금은 기특할 지경이다. 그러니까 그가 오밤중에 잠들려고 노력 중이던 사람의 멱살을 다짜고짜 들어 올려 짤짤 흔든 다음에 그렇게 묻지만 않았어도 해시트는 순순히 대답해 주었을지도 모른다.
이 새끼가 진짜 돌았나? 멍하니 눈을 끔뻑이던 그녀는 일단 이레이의 손등을 깨물었다. 까득!
“악.”
이레이가 손등을 가리며 떨어져 나갔다.
“따갑잖아! 갑자기 무슨 짓이야?”
“정말이지 내가 묻고 싶구나. 갑자기 이게 무슨 짓…… 아니, 도대체 어떻게 매번 내 방에 들어오는 거냐?”
처음에 암살자로 만났을 땐 바깥의 보초를 다 죽여 놓고 기어들어 왔기에 그나마 납득할 구석이라도 있었건만 이후로는 유혈 사태 하나 없이 제집인 양 들락거리는 꼬락서니가 딱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심각한 그녀의 질문에 이레이가 엄지손가락으로 창문을 가리켰다.
“창문으로 들어왔는데.”
퍽이나 대답이 됐다. 만일 해시트에게 그를 들어 올릴 악력이 있었다면 옳다구나 하고 창문으로 내던졌을 터였다.
“수단이 아니라 방법을 물어본…… 아아, 됐다. 그냥 대답하지 마라.”
“왜?”
“상상만 해도 뒷골 당겨.”
“산책하러 나갈래?”
“뭐?”
대화가 사방으로 튀었다. 해시트는 갈피를 잡지 못했고 이레이는 뻔뻔했다.
“어차피 제대로 못 자고 있었잖아. 뜬눈으로 밤을 지새울 바에야 그냥 나하고 놀아.”
“허, 살다 살다 별 황당한 경우를 다 보는군…….”
그녀는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그로부터 채 몇 분이 지나기도 전에 그와 함께 정원을 노닐고 있었다.
처음 밟는 곳이었다. 황궁에 이런 아름다운 정원이 숨어 있는 줄을 여태 모르고 살았다.
“여기까진 한 번도 와 본 적 없어.”
이레이는 감탄하는 해시트의 뒤통수를 뿌듯하게 바라보다가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얼른 표정을 고쳤다. 그가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집주인 자격이 없으시군.”
“그 집주인에게 쫓겨나고 싶으냐?”
“그럴 리가.”
부디 어여쁘게 봐주시지요. 정중한 아부가 밤공기에 사르르 녹아내렸다. 가늘게 뜬 초승달과 퍽 잘 어울리는 목소리였다.
드문드문 무너진 돌담 사이로 풀과 꽃이 무질서하게 흐드러져 있었다. 추측건대 먼 옛날 성벽을 확장하느라 허문 흔적으로 보였다. 찬찬히 시선을 돌리는 곳마다 깨뜨리고 부순 흔적이 남아 있었는데, 이상하게 흉하지 않고 고즈넉한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이레이는 바위에 쌓인 낙엽을 손으로 쓸어 내 그녀에게 자리를 권했다. 해시트는 마땅한 이유도 없이 망설이다가 털썩 걸터앉고 말했다.
“산책로로 제법 쓸 만하겠는걸. 보수 공사를 하라 일러야겠군.”
“관둬. 건드려 봤자 지금만 못할 거다.”
기껏 공을 치하해 주었거늘 반응이 영 신통치 못하다. 해시트는 입술을 비죽거렸다가 깊숙이 숨을 들이마셨다. 흐읍. 선선한 밤공기가 오랜 불면으로 몽롱하던 머리를 조금이나마 맑게 씻어 준다. 그래서인지 날숨은 비교적 잘게 흐트러졌다. 시시콜콜한 질문이 바로 꼬리를 물었다.
“이런 곳은 어떻게 알았나?”
“묻지 마. 비밀이다.”
이레이는 딱 잘라 거절했다. 그래 놓고 해시트가 인상을 찌푸리자 흘끔 그녀의 눈치를 살피고 덧붙였다.
“알면 다쳐.”
“뭐래.”
“마음이.”
진짜 뭐라는 거야. 도통 대화가 알맞게 이어지지 않았다. 해시트는 저도 모르게 실소하고 말았다.
“네놈 따위가 내 마음을 다치게 할 수 있을 성싶으냐?”
“그거야 모르는 거지.”
이레이가 그녀를 따라 웃었다. 그러고는 또 흘끔 곁눈질을 했다가, 이번에는 떼어 내지 않고 그대로 멈춰 서 빤히 시선을 기울였다.
문득 해시트는 지금 그녀의 뺨을 스치는 차가운 밤공기가 그의 체온과 비슷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윽고 그의 손이 그녀의 뺨을 슬며시 감싸 쥐었을 땐 그 짐작이 맞았음을 확신했다.
이상하다. 닿는 손도 뱉는 말도 전부 다 차갑기만 한 남자가 어째서 보는 눈만은 따스하다 못해 종종 뜨거운지 여전히 알 수 없었다.
그때 이레이가 말했다.
“한번 도전해 보고 싶긴 해.”
“…….”
“너는 상처받으면 어떤 표정을 짓는지 궁금하거든.”
그러고는 거울 앞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제 모습을 훑어보는 사람처럼 잠시 눈을 가늘인다.
해시트는 조금 전 그에게 들은 막말을 너무 자세히 곱씹지 않으려 애썼다. 너는 상처받으면, 그러는 너는 상처받으면? 어떤 표정을 짓는지 궁금하거든, 지금까지 너는 어떤 표정을 지었길래? 눈앞의 멍청이 같은 남자는 조금 전에 스스로 마음이 다쳐 본 적 있음을 이실직고했단 걸 알기는 할까? 몰랐으면 좋겠다.
해시트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뺨에 닿은 남자의 손을 야멸차게 쳐 냈다. 화제를 돌린다는 게 그만, 그다지 내키지 않던 이야기를 먼저 꺼내고 말았다.
“라피난과는 어마마마의 장례식에서 처음 만났다.”
“젠장, 뭘 또 그렇게 인상 깊게 만났대.”
즉각 이레이가 빈정거렸다. 해시트는 황당해졌다.
“너 지금 나한테 욕했나? 감히?”
“너 말고 라피난한테 한 거야.”
“아닌 것 같은데.”
“맞아. 아무튼 계속해 봐. 그때 둘 나이는 몇이었고, 어쩌다 그놈의 ‘대의’라는 것에 홀려서 함께했는지.”
아무튼이고 자시고 어째 추궁받는다는 기분을 지울 수 없었지만 이미 물꼬를 튼 뒤였다. 그녀는 마뜩잖게 이레이를 흘겨보면서도 이야기를 이어 갔다.
“나는 열한 살, 라피난은 열일곱 살.”
“그리고?”
“장례식은 열흘 동안 이어졌고, 녀석은 마지막 날에야 나에게 말을 걸었다. 포장을 뜯지 않은 사탕을 줬어. 포장지가 너무 단단하게 묶여 있어서 뜯느라 애를 먹었는데 끝까지 도와주지도 않더군.”
“예로부터 야박한 놈이었군.”
“뭐, 사탕에 독을 발라 두었다고 오해를 살까 봐 그랬다는 건 훨씬 나중에야 알았지. 예전부터 야박한 놈이었던 건 맞아.”
해시트가 살짝 웃었다. 이레이는 무심하게 질문할 차례를 가져갔다.
“너는 그때도 암살 위협을 받고 있었나?”
“정확히는 그때부터 시작되었다고 봐야지. 어마마마가 돌아가신 이후에.”
그래서 라피난도 그때야 해시트에게 찾아왔을 것이다. 그때부터 그런 일이 벌어질 것을 예상했기 때문에.
“그렇군.”
이레이가 한발 늦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씁쓸한 표정이었다. 반면 해시트는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목소리가 가벼워졌다. 결코 좋은 추억이 아닌데도, 너무 오랜만에 꺼내 보아서인지 기억이 새록새록했다.
“어마마마가 돌아가시고 반년쯤 지나자 폐하께서는 세르히라 양과 연애를 시작하셨다. 사별한 남자가 새 여인을 만나는 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지. 다만 그녀가 너무 일찍 아이를 가진 건 내겐 큰 문제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황제 폐하의 유일한 걱정거리는 적통에 대한 압박감을 못 이겨서 내 성별을 속였다는 것뿐이었고, 만약 새로 태어날 아이가 남자아이라면……, 그분께선 마침내 그 걱정거리를 치우려 드실 테니까.”
어쩌면 해시트는 아바마마의 걱정거리밖에 안 되는 제 처지를 죄스러워하며 그냥 콱 죽어 버렸을지도 모른다. 라피난을 만나지 않았더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