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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시트와 가여운 짐승들-25화 (25/104)

25화.

“……허.”

짧은 헛숨을 찬 이레이의 입술이 꾹 가로 닫혔다. 그 표정에 어린 불만이 증오보다는 섭섭함에 가까워서 라피난은 끝내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건 전하의 심복으로서 한 말이었다.”

차라리 이레이가 진심으로 화를 냈다면 그도 아무런 거리낌 없었을 것이다.

“네 친구로서도 한마디 해도 된다면……, 나중에 상처받고 싶지 않거든 처신 똑바로 하도록.”

라피난은 곧바로 몸을 돌려 복도를 떠났다. 드래곤이니 용의 비늘이니, 듣다 만 전설의 결말 같은 건 역시나 전혀 궁금하지 않은 사람처럼. 혹은 그 전설의 끝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처럼.

혼자 남은 이레이는 라피난의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불현듯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래.”

라피난을 이해한다고 했다. 어느 정도는 연민한다고도 했다.

“어차피 너도 머잖아 주군과 친구 중에 하나를 골라야 할 거다.”

그리고 희미하게 피워 올린 미소엔 흥미로움이 완연했다.

*

잡음이 좀 있긴 했으나 어쨌든 알테 공국에서의 일은 잘 마무리되었다.

이번 암살에선 이레이가 어렸을 때 배워 두었다는 독수리 조련술이 요긴하게 쓰였다. 해시트는 그를 치하하는 의미에서 얼마 전 그녀를 불쾌하게 만들었던 그의 방만함을 용서해 주기로 하였다. 머잖아 그녀의 성년식이 기다리고 있는 바, 너그러운 마음으로 대의를 도모하고자 한 것이다.

제국 역사상 가장 성대한 성년식이 되어야 했다. 결코 작은 실수도 용납되어선 안 됐다.

행사가 다가올수록 해시트는 초조해졌다. 마음을 담대히 먹으려 노력했지만, 급기야 남들 눈을 피해 라피난의 처소에 긴히 찾아오고야 말았다. 현관문 앞에 선 그녀가 노크하려 손을 올렸을 때였다.

“명문가 도련님이라더니 진짜였나 봐?”

귀에 익은 목소리가 열린 문틈으로 흘러나왔다. 해시트는 반사적으로 움직임을 멈췄다. 이레이의 목소리였다.

“가구들이 전부 고급이군. 이런 집을 두고 일 년에 절반 넘게 전장에서 지내려니 아쉬웠겠어.”

이런 우연은 예상하지 못했다. 해시트는 선뜻 안으로 들어서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예전에 이레이의 집에서 한 차례 사고를 겪은 뒤로 출입하기 전 노크하는 버릇이 생겨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그런가 하면 해시트가 도착했을 때 이미 비스듬히 열려 있던 현관문은 아마도 이레이가 안으로 들어가면서 제대로 닫아 두지 않은 듯했다.

열린 문틈으로 라피난이 나타났다. 그는 술잔 두 개를 들고 나와서 그중 하나를 소파에 앉아 있는 이레이에게 건넸다.

“여긴 무슨 일로 왔나.”

“읽고 싶은 책이 생겨서 도서관에 갔더니 네가 빌려 갔다더라고.”

“네가 서책을 찾다니 별일이군.”

“드문 일이긴 하지. 웬만한 책은 옛날에 다 읽어 버려서 한동안 흥미가 떨어졌었거든. 어쨌든, 다 읽었으면 나한테 넘겨라. 괜찮지?”

술잔을 홀짝이던 이레이가 불시 몸을 일으켜 거실을 배회하기 시작했다. 남의 집에 처음 방문한 손님치고는 거침없는 태도였다. 라피난도 그를 저지하는 대신 무심한 턱짓으로 책장의 특정 칸을 가리켰다. 까딱.

“알아서 가져가도록.”

“으음, 아냐, 이쪽 칸엔 없군.”

“잘 찾아봐. 서고에서 빌려 온 서책은 전부 그쪽에 꽂아 뒀어.”

“여기 없다니까. 사서 말로는 네가 일 년 넘게 연체 중이라던데, 너 혹시 그 책 잃어버린 거 아니야?”

이레이가 툭 의심을 내뱉었다. 그새 그에게서 관심을 끄고 소파에 착석했던 라피난이 문득 짜증 서린 눈빛으로 그를 돌아봤다.

“이봐, 내가 그럴 사람으로…….”

왜인지 그 말을 끝맺지 못하고 입술을 다물어 버린다. 움찔 경련하는 눈썹이 무언가를 깨달은 사람 같았다.

“……이레이.”

“응.”

이레이는 걸음을 옮기며 대꾸했다. 여유롭지만 착실한 걸음이 곧 책장의 가장 구석진 자리에서 멈춰 섰다. 그는 허리를 굽혀 그중에서도 가장 아래에 있는 칸에서 서책 한 권을 뽑아 들고 말했다.

“여기 있군.”

“…….”

“역시 네가 빌린 물건을 잃어버릴 사람은 아니지. 그것도 이렇게 위험한 책이라면 더더욱.”

위험한 책이라니? 책이 위험할 수도 있나?

묘한 표현에 인상을 찌푸렸던 해시트는 이내 얼마 전 읽었던 서책의 제목을 떠올렸다. <고문의 역사>. 고대에 행한 잔인한 고문 방법과 각종 고문 도구의 제작 및 사용법을 총망라해 둔 모음집이었다.

몇 가지는 읽는 내내 구역질이 나서 원수에게도 활용할 엄두가 안 나던데, 혹시 그런 종류의 서책이라면 과연 위험하다 정의해도 이상하진 않을 성싶었다.

그때 이레이가 손바닥으로 가죽 표지를 툭툭 털어 내더니 소파로 되돌아갔다. 마시던 술잔은 책장의 빈자리에 아무렇게나 내려 둔 채였다. 서책을 앞뒤로 뒤집어 보다가 별안간 그 제목을 읽었다.

“<카이렌의 날개 달린 짐승들>.”

카이렌. 왠지 들어 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명확하지 않은 기시감에 해시트가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이레이의 목소리가 계속되었다.

“숨겨 두고 싶었던 건가? 다른 사람들이 읽지 못하도록.”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 그 서책이 필요하다면 가져가라.”

라피난은 앞선 반응이 무색할 정도로 태연하게 받아쳤다. 이상한 건 이레이가 그의 태도를 걸고넘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품에서 웬 보석을 꺼내 가까운 테이블에 내려 두었다.

탁. 울리는 소리가 물질의 단단한 밀도를 짐작하게 했다.

“보답이다. 예전에 수집가에게 팔고 남겨 두었던 거야. 이런 날을 대비해서 남겨 둔 건 아니었지만.”

보석은 흰색에 가까운 옅은 금빛을 띠고 있었다. 납작한 타원 형태에 거의 사람 손바닥만 한 크기 때문인지, 실내에서도 한눈에 알아볼 만큼 요란한 빛을 발산했다. 꿈속에서나 보았을 법한 아름다운 보석이다. 세상의 모든 금은보화를 하나씩은 몸에 둘러 보았을 해시트도 저런 빛깔은 생전 처음 보았다.

이레이는 그런 물건을 스스럼없이 라피난과 비교했다.

“꼭 네 머리색 같지 않나? 아무리 봐도 늙어서 하얗게 센 백발 같은데 희미하게 금빛이 섞여 있기는 해.”

“……전혀.”

닮은 줄 모르겠는데. 반박하는 라피난의 목소리는 여느 때처럼 냉랭했다. 그는 아주 잠깐 그 보석에 눈을 두었을 뿐, 잠시 후엔 고맙다는 인사조차 없이 다시 술잔을 기울였다. 이레이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곤 그에게 손을 흔들었다.

“간다. 나는 참고로 이 책 반납 안 할 거야. 혹시 또 읽고 싶어지거든 날 찾아와라.”

“이유는.”

“글쎄……. 아마 우리가 친구라서?”

피식, 이레이가 대수롭지 않게 웃었다. 라피난도 바로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그렇군.”

이레이의 발소리가 현관으로 가까워졌다. 해시트는 당황했다. 이대로 있다간 그들의 대화를 엿들었음을 들킬 처지였다. 그야 가신들이 나누는 대화를 주군이 우연히 좀 들었기로서니 흉이 될 것 없었지만, 왜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 듣고 있었는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이해하기 힘들었다. 결국 그녀는 이레이가 문을 열기 전에 허겁지겁 문짝을 두드렸다.

똑똑!

거침없는 노크 소리가 울려 퍼졌다. 건너편에서 이레이가 문고리를 잡아당기기 직전이었다. 해시트는 시치미를 뚝 떼고 목을 가다듬었다.

“나다, 라피난.”

“해스?”

곧장 이레이의 의아한 말투가 넘어오더니 벌컥 문이 열렸다. 어딘지 얼빠진 얼굴이 보인다. 그리고 정말 생각지도 못한 질문이 들이닥쳤다.

“너 이 자식이랑 집까지 들락거려?”

잔뜩 고조됐던 긴장감이 와르르 무너져 내린다. 해시트의 표정이 떨떠름해졌다.

“그게 뭐. 네 숙소에도 간 적 있잖아.”

“요즘엔 안 오잖아.”

“그거야…….”

갈 이유가 없으니까, 라고 대답하려다 괜히 머뭇거렸다. 그의 집엔 가야 할 이유가 있더라도 어떻게든 가지 않을 이유를 만들고 말 터였다. 해시트는 그와 단둘이 한 공간에 머무를 때 긴장하는 자신을 아직 인정하기 싫었다.

“그런데 이레이, 그 책은 뭐냐?”

“어? 아아, 이건…….”

일부러 그의 품에 들린 서책을 가리켰다. 원체 크고 두꺼운 서책이라 도리어 자연스러운 질문처럼 흘러갔다. 이레이가 말끝을 끌며 책을 내려다보았을 때, 갑자기 라피난이 그의 어깨를 짚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오셨습니까. 전하.”

“라피난.”

“부르셨으면 제가 찾아뵀을 텐데요.”

등장 시점이 꼭 이레이가 대답하지 못하게끔 제지한 것 같기도 했다. 물론 그럴 리는 없었다. 해시트는 자연스럽게 수긍했다. 세상에 의심할 사람이 없어서 설마 그녀가 라피난을 의심하겠는가. 하늘이 두 쪽 나고 바다가 갈라진들 절대로 불필요했다.

서책에서 관심을 끈 해시트가 바로 본론을 꺼냈다.

“성년식에서 입을 예복 때문에. 요즘 살이 빠져서 치수를 고쳐야 할 것 같다.”

그녀의 옷에 쓰일 옷감은 황실 재단사에게 가기 전에 라피난을 먼저 거치는 편이다. 옷을 맞추려면 신체 곳곳을 줄자로 재고 즉석에서 피부에 천을 덧대어 보아야 하는데, 해시트가 마음 놓고 그런 행동을 허락할 만한 이는 라피난뿐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준비해 오겠습니다. 들어와 기다리시죠. 그런데 그것 때문에 여기까지 오신 겁니까?”

라피난은 못내 의아하단 기색을 비쳤다. 어차피 라피난에게 속내를 숨길 마음이 없었던 해시트는 한숨과 함께 이마를 짚었다.

“불안해서 그래. 이제 정말 끝이라고 생각해서 그런가.”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별문제 없이 지나갈 겁니다.”

“그래야지. 반드시…….”

손을 내리고 집 안으로 들어서려는데 불쑥 손목이 잡혔다. 이런 짓을 할 만한 사람도 해시트가 아는 한 하나뿐이었다. 그녀는 짜증을 참으며 이레이를 봤다. 허락도 없이 황태자의 손목을 낚아챈 무뢰한이 불경하게도 그녀의 소맷자락마저 걷어 내 팔꿈치께를 확인하고 있었다.

“살이 그냥 빠진 게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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