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시트와 가여운 짐승들-24화 (24/104)

24화.

“그래. 용의 살결에 돋아난 갑옷 같은 물질이다. 그게 인간은 상상도 못 할 만큼 억세고 단단하거든. 어떤 검으로도 꿰뚫을 수 없고 어떤 화마로도 집어삼킬 수 없다. 그러니 겨우 독초 따위가 해를 입히는 건 불가능하지. 게다가 반짝이는 빛깔은 세상의 어느 보석보다도 찬란해서, 바닥에 떨어진 부스러기라도 가져 보겠다고 탐욕하는 인간이 한둘이 아니야.”

그는 거기서 잠시 멈추고 해시트를 훑어보았다. 아래에서 위로 천천히.

“뭐랄까. 꼭 너처럼 예쁘지만, 너처럼 연약하진 않은 종족이랄까.”

그 즉시 해시트가 코웃음으로 받아쳤다.

“실컷 지껄여라. 내가 즉위하는 날이 네 명줄이 끊어지는 날이 될 테니.”

“황제가 되면 날 죽일 거야?”

“아량을 베풀어 죽이진 않더라도, 내치긴 해야겠어. 반드시.”

“아니, 억울해서 내가 먼저 돌아가시겠는데. 대체 누굴 한물간 사냥개 취급이야?”

이 경우엔 과연 누가 적반하장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레이가 먼저 기가 막힌다며 있는 대로 짜증을 부리기에 해시트와 라피난은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그의 주장에 반론을 펼쳤다.

“솔직히 그때 가선 네놈은 하등 쓸모없지. 지금도 네 출신 때문에 뒤에서 말 많은 거 무시하느라 귀 아프다.”

“이레이. 그래서 내가 몇 번이나 주의를 주지 않았나. 최소한 사람들 보는 앞에선 언행에 주의하라고.”

“젠장, 너희 둘은 꼭 이럴 때만 손발이 잘 맞더라.”

결국 늘 이런 식이었다. 두 사람의 협공에 마뜩잖은 표정을 지어 보인 그가 별안간 손끝으로 촛대의 불꽃을 건드릴락 말락 손장난을 치면서 말을 이었다.

“걱정 마, 해스. 네가 즉위하면 존댓말 해 줄게.”

아주 큰 선심 쓴다는 말투였는데 어째 허풍처럼 들리진 않았다. 해시트의 눈이 슬쩍 커졌다.

“정말이냐?”

“나 거짓말 못 해.”

“그 말부터가 완전히 거짓이잖아.”

“뭐 그럼 두고 보든가. 진짜인지 거짓인지.”

휘잉, 작은 불꽃이 그의 단단한 손가락을 피해 이리저리 일렁이고 있었다. 사냥꾼에게 쫓기는 사슴인 양 애처롭기 그지없었다.

“대신 사람들 앞에서만이야. 그 정도는 양보할 테니까, 너도 그런 재미없는 농담 집어치워. 죽인다느니, 내친다느니.”

“…….”

농담이 아니었다고 농담하면 이번엔 이레이도 농담으로 끝내지 않겠다 싶었다. 해시트는 침묵했다. 이레이가 슬쩍 눈꺼풀을 올려서 그녀의 존재를 확인했다.

“알겠지? 해스.”

“…….”

“젠장. 대답 좀 할래?”

확답을 받고 싶어 한다. 그런데 왜 그런 씁쓸한 목소리로 청하는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알고 싶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조금 혼란스러운 가운데, 라피난이 슬그머니 손을 뻗어 이레이의 손을 촛대에서 걷어 내고 말했다.

“잠깐만, 이레이.”

“음?”

“그 ‘사람들’에 분명 나도 포함이겠지? 따지고 보면 내가 네 상사긴 하다.”

믿을 수 없게도 희미한 장난기가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이레이는 거의 치를 떨며 라피난의 손을 뿌리치고 몸을 일으켰다. 벌떡!

“네가 무슨 사람이야? 너 사람 새끼 아니라고 군대에 소문 다 났다.”

“누가 그런 소리를 했나.”

덜컹, 라피난도 지지 않고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연초록과 진파랑 안광이 허공에서 희번득 맞부딪친다. 둘 다 참으로 멀대 같은 장신이어라, 해시트의 시선은 그들을 좇아 자연스레 위로 올라갔다.

먼저 이레이의 빈정거림이 울려 퍼졌다.

“누구긴?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시지, 이 철면피 냉혈한아. 상종 못 할 일 중독자에 권위주의자라고 아주 소문이 자자하게 났던데. 너 야근하는 거 기다리느라 퇴근을 못 해서 자녀 계획에 차질 생긴 애들이 한둘이 아니래.”

“말 잘했군. 내 야근의 이유 중 팔 할이 바로 너 때문이다, 이레이 린 경. 자네가 친 사고 수습하느라 석 달 만에 일 년 치 비상 예산을 전부 소진했을 때 누가 보고서를 썼는지도 기억 안 나나?”

“야, 그건 내가 써 갔더니 네가 다시 쓰겠다고 내가 기껏 써 간 거 찢어 버렸잖아.”

“경위서를 써 오랬더니 자네가 사직서를 써 왔잖나. 찢어서 입에 처넣으려다 참은 거다.”

“책임지고 그만두겠다는데 뭐가 문제야?”

“그 책임감이 문제다. 제발 나잇값 좀 해라. 반말에 집착하는 것도 관두고.”

“싫어.”

“……전하. 부디 내치시죠.”

스윽, 해시트를 돌아보는 라피난의 안색이 그새 더 창백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렇게 유치한 말싸움을 해 댔으니 피곤할 만도 하다. 해시트는 곰곰이 고개를 주억거리고는 손마디를 세워 책상을 두드렸다.

“둘 다 남의 방에서 소란 떨지 말고, 놀 거면 나가서 놀아라.”

그들이 기운을 빼는 사이 창밖의 비바람도 서서히 잦아들었더랬다. 잠잠해진 빗소리에 덩달아 천둥 번개까지 흔적을 감췄으니, 해시트의 두 뺨에 발그스름한 혈색이 돌아온 건 당연했다. 이제 옛날이야기고 자시고 관심 없다.

“못 들었어? 나가라고.”

그녀가 내놓고 손을 내저었다. 이레이는 끝까지 미련을 보였다.

“내 얘기 아직 안 끝났는데. 들어 봐, 그래서 그 섬에 사는 드래곤에겐 비밀이 하나…….”

“하나도 안 궁금해.”

“……알겠다. 잘 자라.”

그가 입맛을 다시며 라피난을 쳐다봤다. 그나마 혼자 쫓겨나는 처지가 아니라 다행이라는 듯이.

이윽고 나란히 선 두 남자가 출입문으로 걸어갔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해시트가 문득 입을 열었다.

“이레이 린.”

“음?”

이레이가 곧장 그녀를 돌아봤다. 해시트는 그가 제 얼굴에 드러났을 수심을 눈치채길 원하지 않았으므로 일부러 촛대를 멀찍이 밀어 내고 말했다.

“너 어디 가서 그런 허무맹랑한 옛날이야기 같은 거 떠들고 다니지 마라. 그러다 신관들 귀에 들어가면 이단으로 몰려 귀찮아질라.”

“누가 귀찮아지는데. 나? 아니면 너?”

“라피난이.”

“갑자기 왜 쟤 이름이 튀어나오지?”

“왜겠나? 다들 알다시피 수습은 저놈이 하잖아.”

뜻밖의 언급에 라피난이 얕게 신음하는 소리가 들렸다. 해시트는 빙그레 미소 지었고, 이레이는 소리 내어 실소했다.

“참고하지. 잘 활용하면 근위대장 나리를 엿 먹일 수 있겠군.”

“농담 말고, 입조심하겠다고 약속해.”

해시트가 집요하게 그를 다그쳤다. 이쯤에서 ‘그럼 나도 너를 내치지 않겠다고 약속할게.’라고 한 마디만 더 한다면 모든 게 일사천리겠지만 그렇게 해 주지는 않았다.

그녀가 가장 좋은 방법을 알면서도 끝내 써먹지 않았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는 이레이가 천천히 입가의 웃음기를 지워 냈다. 잠시 후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소원이시라면야 뭐…….”

까딱, 한쪽 눈썹을 튕기고 평소 말투로 돌아가 덧붙인다.

“하지만 아주 허무맹랑한 얘긴 아니야. 드래곤은 실제로 존재하거든.”

“그래, 바로 그런 헛소리를 조심하라는,”

“진짜야. 내 눈으로 보고 왔어.”

“…….”

그 말에 방 안에 새삼스러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황당해서 말문이 막힌 해시트와 무표정한 라피난을 한 번씩 쳐다봐 준 끝에, 기어코 이레이는 신전에서 이단으로 몰리기 딱 좋은 헛소리를 나불대기 시작했다.

“예전에 드래곤 슬레이어나 되어 볼까 하고 그 섬에 찾아갔었지. ‘카렌’에.”

“아무튼 입만 열면 거짓말이지.”

“진짜라니까. 가긴 갔는데, 웅크려 잠들어 있는 노쇠한 흰 드래곤을 봤더니 죄다 귀찮아져서 죽이지 않고 돌아왔을 뿐이야. 원래 빛깔이 흰색인 건지 늙어서 백발노인이 된 건지 모를 정도로 늙었더라니까, 어쨌든 그 먼 곳까지 찾아간 노고에 보답받고자 비늘만 몇 개 뽑아서 돌아왔었다.”

너무 얼토당토않아 헛웃음이 났다.

“그래서 그 비늘은 어쨌고?”

“동쪽에서 온 젊은 수집가에게 팔았지. 값을 어마어마하게 쳐주더군.”

“부귀영화에는 관심 없는 줄 알았더니 의외네.”

“모르는 소리. 모험 후 얻는 성취는 꽤 좋아해.”

“그랬어?”

글쎄, 그렇다기엔 이레이는 해시트와 함께해 온 이래 그녀가 제안한 모든 권력과 명예를 단칼에 거절해 왔다. 싫다는 놈을 억지로 설득해서 앉혀 둔 자리가 고작 백인 소대의 대장직이었으니 해시트가 의아해하는 것도 당연했다. 이레이는 그녀의 의문을 비웃듯 대답해 주었다.

“기억 안 나? 그래서 널 따라왔다고 했잖아.”

“…….”

“네가 여자라서.”

겨우 촛불 몇 개로 밝혀 둔 어두운 방에서 이레이의 새파란 눈동자가 손쉽게 그녀를 꿰뚫었다. 그 눈이다. 해시트가 가장 싫어하는, 해시트를 보는 이레이의 눈.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욕망이 득실거려서 결국엔 도망칠 수밖에 없는.

괜히 상대해 줬다. 싸늘하게 표정을 굳힌 해시트가 곧바로 라피난에게 시선을 돌렸다.

“끌고 나가.”

“죄송합니다.”

졸지에 불똥을 맞아 놓고도 라피난은 억울한 기색 없이 고개를 조아렸다.

전쟁터도 아닌 타국의 성에 체류 중이었다. 해시트는 아직 성년식을 치르지 않은 황태자였고, 세상 사람들 모두가 그녀를 남자로 알고 있었으니 이 정도 반응이 결코 유난은 아니었다.

라피난은 지체하지 않고 이레이를 밖으로 끌어냈다. 어쩐 일인지 순순히 끌려 나와 준 이레이가 방문이 닫히기 무섭게 질문을 꺼냈다.

“라피난. 해스의 즉위식은 언제쯤이지?”

황태자 성년식도 아니고 황제 즉위식을 묻는다. 역시나 반성 따위는 개나 준 게 분명하고, 그저 즉위식 이후에 해시트에게 존댓말 할 생각으로 벌써 아득한 모양이다. 라피난은 못내 질려 하면서도 내색하진 않았다.

“세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지. 첫째, 황태자 전하께서 성년식을 치른 후에. 둘째, 당대 황제께서 서거하신 뒤에.”

“그리고?”

“……셋째.”

마지막에 그는 조금 뜸 들이다 덧붙였다.

“앞선 두 가지 조건이 모두 충족되었다는 전제하에, 제 주제도 모르고 황태자 전하를 두고 전리품 운운하던 애송이가 마침내 정신을 차리고 더는 경거망동하지 않게 되었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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