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그래서 더 먼 미래에 가만 생각해 보면, 두 남자가 절친한 악우로 거듭난 게 대충 이때쯤인가 싶다. 당연히 그맘때의 해시트는 그들의 꿍꿍이를 몰라 꺼림칙함을 지울 수 없었으나 금세 그 생각마저 저어하기에 이르렀다.
어차피 깊이 생각해서 좋을 게 하나도 없었다. 이레이에 대해서는. 황제가 될 때까지 그를 곁에 두고자 결정했을 때 이미 그렇게 마음먹지 않았던가. 하물며 여전히 면역되지 않은 그의 눈빛 앞에서는 더욱 조심스럽다.
“그럼 술 말고 훈장으로 해.”
해시트가 재빨리 말안장에 올라탔다.
“내가 이기면, 네놈은 수도 도착하자마자 훈장을 받는 거야.”
“뭐? 야, 잠깐.”
“이랴!”
그녀는 이레이와 라피난이 말에 오르기 전에 냅다 출발해 버렸다. 비겁해도 어쩔 수 없었다. 저 지독한 괴물들을 이길 가망성이라도 두려면 평범한 인간인 해시트에겐 이 정도 고점은 줘야 했다. 평범한 인간이라니, 표현이 어째 좀 이상하다 싶지만…….
다행인 점은 그 뒤로 이레이가 한동안 해시트를 ‘그런 눈’으로 바라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덕분에 해시트는 비교적 편안한 마음으로 이레이를 대할 수 있었고, 도무지 이름 붙이기 힘든 괴상하고 거친 시선을 잠시 잊고 지냈다.
그녀가 다시 그 시선과 조우하게 된 것은 그로부터 한 달 후다.
*
매년 있는 알테 공국과의 외교 행사가 그 발단이었다.
“화친단?”
말 꺼내기 무섭게 이레이가 얼굴을 구기고 되물었다. 어지간히 싫단다. 너무 싫어하니까 괜히 더 시큰둥하게 대꾸하게 됐다.
“그래. 일주일 뒤에 라피난과 출발하니까 너는 네 소대나 잘 지키고 있어라.”
그래서 알테 공국과의 외교 행사로 말할 것 같으면, 60일 동안 서로의 나라에 가장 귀한 손님을 보내고 맞이해 극진하게 대접하는 연례행사로써 장장 백여 년 전부터 이어져 온 두 나라의 전통이었다. 올해는 저쪽에서 장자를 보내기로 한 만큼 이쪽에서도 해시트가 행차해야 구색이 맞았다.
사실은 화친단에 소속된 귀족 하나를 암살하기 위해 해시트가 자원해야 했다는 내막이 있었지만 이레이에게는 자세히 알려 주지 않았다. 귀찮은 것보다, 굳이 그럴 필요 없었기 때문이다.
“나도 갈래.”
어차피 이 불나방 같은 놈이 얌전히 집 지키며 기다릴 리 없었으니까.
해시트는 씨익 웃으며 미리 준비해 온 서책 한 권을 그에게 내밀었다.
“알테 공국에서 지켜야 할 예의범절이다. 쩨쩨하게 시험 같은 건 안 볼 거지만 거기서 시비 걸리면 나는 안 구해 줄 거니까 알아서 숙지해 두든가. 혹시 질문 있나?”
“음, 방금 하나 생각났어.”
“해 봐.”
“걱정된다는 말을 그렇게 돌려서 하는 이유가 뭐지? 그냥 내가 위험해지는 게 싫다고 하면 되잖아.”
이레이가 인상을 찌푸리고 툴툴댔다. 해시트는 방금 내려놓았던 서책 위에 손바닥을 올렸다. 여차하면 회수다.
“따라오기 싫으냐?”
“잘못했어.”
드디어 그를 다루는 법을 알 듯 말 듯, 그러나 여전히 아리송한 한편으로 이따금 놀랍도록 즐거운 마음이 들었다. 해시트는 다시는 그녀의 고유한 화법을 침해하지 않겠다는 굳은 약속을 받아 낸 뒤에야 이레이에게 서책을 돌려주었다.
같이 가서 일 좀 하겠느냐 물었으면 오만 거만을 떨며 미적거렸을 놈이 떼놓고 다녀오겠다고 말하자마자 손톱을 물어뜯으며 초조해하는 꼴이 우습고 신기했다. 며칠 뒤 알테 공국으로 향하는 행렬의 마차 안에서 해시트는 체통 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재미있었다.
……근데 이럴 줄 알았다면 절대 안 데려왔을 거다.
“천둥이 무서운가?”
불쑥, 갑작스런 이레이의 질문에는 즐거운 기색이 선연했다. 해시트가 그를 꾀어내면서 느낀 ‘재미’의 오백 배쯤은 족히 되는 농도라 정말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녀는 애써 창문 쪽을 바라보지 않으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냥 좀 낯설군. 제국엔 이런 일이 흔치 않아서.”
“그게 그거잖아.”
“다르거든.”
갑자기 비바람이 몰아치고 난리다. 저녁이 되자마자 슬금슬금 비가 떨어지더니, 밤이 깊자 거기에 천둥 번개까지 합세했다.
외교는 빌미일 뿐 본래 목적은 암살이었던 고로, 알테 공국에 도착한 이래 해시트는 당연하게도 라피난과 밤늦도록 회의하는 일이 잦았다.
그런 밤마다 이레이는 경호를 핑계로 그녀의 방에 눌어붙어 나갈 생각을 않았는데 대부분 출입문에 비뚜름하게 기대서서 불퉁한 눈초리로 그들을 지켜보거나 시답잖은 수다로 훼방을 놓곤 했다. 오늘도 그런 밤 중에 하나였다. 그런데 하필이면 천둥 번개가 찾아온.
번쩍!
또 한 번 날카로운 빛이 방 안으로 들이닥치자 라피난은 서둘러 창가로 달려가 단단히 커튼을 친다. 해시트는 조금 전 제가 어깨를 움찔거렸는지 확신이 없었다. 곧 이어진 이레이의 목소리에 아차 싶었을 뿐이다.
“무섭다고 솔직하게 고백하면 내가 멈춰 볼 수도 있어.”
저게 진짜 사람을 놀리려고 작정했다. 해시트는 마침 쥐고 있던 깃털 펜을 집어 던졌다.
“제발 허세는 작작! 그리고 방금 건 천둥이 아니라 번개라는 거다, 이 무식한 종자야!”
쉭! 날아간 펜촉 끝이 아슬아슬하게 이레이의 뺨을 스치지 못하고 그의 손에 허리를 붙들렸다. 이레이는 낚아챈 펜대를 이리저리 돌리면서 얄미운 미소를 지었다.
“기껏 선심 썼더니 왜 폭력이야? 기다려 봐, 다음번엔 천둥이니까. 내 장담하지.”
그때 라피난이 해시트의 앞에 불 밝힌 촛대를 내려 주었다. 넌지시 입을 연다.
“제국의 하늘은 미케나 신의 축복을 받아 늘 고요하지요. 놀라실 만합니다.”
해시트에게 건네는 것처럼 보였으나 실상은 이레이를 향한 타박이었다. 적당히 좀 놀리라는 그의 완곡한 경고에 이레이가 짧게 혀를 찼다.
매사 피도 눈물도 없는 라피난은 해시트 앞에선 가끔 잘 익은 복숭아처럼 물렁물렁해진다. 그놈의 주군이 뭐기에. 아니면 제국의 미래가 그리도 중요할 수도 있다. 그것도 아니라면 혹시 그가…….
갑자기 무엇이 불안해졌는지, 그때껏 멀찍이서 해시트의 속을 긁어 대던 이레이가 불현듯 걸음을 떼어 냈다.
“좋아. 기왕 분위기 깨진 거, 오늘 치 작당 모의는 집어치우고 내가 해 주는 옛날이야기나 듣는 게 어때? 천둥 따위는 까맣게 잊어버릴 만큼 재미있을 거다.”
“구연동화에도 취미가 있는 줄은 몰랐구나. 근데 안 어울리니까 관둬.”
해시트가 냉소했다. 이레이는 어깨를 으쓱 들었다 놓았다.
“설마. 내 취미는 너밖에 없어. 충심 빼고 모든 것을 너에게 바쳤지.”
“건방 좀 그만,”
“아니라는 걸 알 텐데.”
성큼, 순식간에 책상 앞에 선 그가 보란 듯이 해시트의 앞에 깃털 펜을 올렸다. 탁. 작은 마찰음은 그와 동시에 창밖에서 울려 퍼진 요란한 천둥소리에 완전히 파묻혔다. 우르릉, 쾅! ‘다음번’엔 천둥일 거라던 그의 예언대로.
이레이가 말했다.
“내기를 할 걸 그랬네.”
“…….”
해시트는 촛불 때문에 불그스름하게 물든 뺨 위로 속눈썹 그림자를 드리운 채 그를 올려다보았다. 오랜만에 마주한 들끓는 시선 앞에서 움츠러드는 기분이 들었다. 다행히 라피난이 적당한 때 끼어들어 준 덕분에 티 나지 않게 도망칠 수 있었다.
“전하. 피곤하실 테니 오늘은 일찍 주무십시오.”
그가 곧장 이레이에게 고개를 돌렸다.
“우린 그만 나가지.”
“해스, 혹시 들어 본 적 없나? 야만족 베누스의 바다를 건너 하염없이 남쪽으로 가다 보면 드래곤의 섬이 있다는 전설.”
이레이는 하나뿐인 친구의 제안을 가뿐히 무시한 채 해시트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렇다면 해시트도 이레이의 재미없는 옛날이야기를 깔끔히 무시하고 그를 내보내야 하는 게 마땅했으나, 또다시 커튼 틈새로 번쩍이는 번개가 새어 들어오자 없던 흥미라도 긁어모으고 싶어졌다.
“……전설이라.”
그녀가 깍지 낀 손등에 턱을 올리고 말했다.
“어지간히 떠들고 싶은가 본데, 어디 한번 해보든지.”
이 기이한 기상현상이 영 께름칙해서 혼자 있기는 싫다고 순순히 고백했을 리가. 이미 다 들통났다 하더라도 그럴 수는 없었다. 그러니 드래곤의 전설이 궁금해졌다고 해 두자. 눈치가 있다면 겁먹어 하얗게 질린 그녀의 안색을 응당 못 본 척해 줘야 할 거다.
잠시 후 이레이가 피식 웃음을 삼키며 그녀 맞은편으로 의자를 끌고 왔다. 내친김에 한 개를 더 끌고 와서 쿠션을 두들기니, 라피난도 마지못해 돌아와 그의 옆에 앉았다. 세 사람이 촛불 앞에 옹기종기 모여 앉고 나서야 본격적인 옛날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인간의 마지막 땅을 떠나 남쪽으로 70일간 항해하면 저 멀리 반짝이는 붉은 섬이 보인다. 그곳이 바로 드래곤의 섬, ‘카렌’이야.”
“어느 나라의 전설이지? 나는 처음 듣는군.”
웬일로 시작부터 라피난이 딴죽을 걸어 댔다. 이레이는 묘연한 눈빛으로 그를 봤다.
“그래? 잘 생각해 봐. 어쩌면 예전에 들었는데 잊어버린 것일지도 몰라.”
“…….”
“그리고 나도 정확한 기원까지는 알지 못해. 내가 아는 건 그곳이 몹시 붉고, 거대하고, 아름다운 섬이라는 것뿐이야. 또 드래곤이 살고 있고……. 아, 그리고 ‘카렌’이 붉은 이유는 그 섬에 서식하는 새빨간 독초 때문이라는 것도 알지. 평범한 인간이 함부로 다가갔다간 온몸의 구멍에서 피를 토하며 죽기 십상이라는 것도…… 응? 나 제법 많이 아네?”
“드래곤이란 녀석은 피부가 되게 두꺼운가 봐? 용케 그런 데서 사는군.”
이번엔 해시트가 비아냥거렸다. 그녀는 이레이의 말을 하나도 믿지 않는다고 내색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하긴 드래곤이니 붉은 독초니, 신조차 믿지 않는 신성제국의 황태자가 신과 궤를 함께하는 전설 속의 종족을 믿는다면 그야말로 우스꽝스러울 터다.
이레이는 그런 그녀의 반응을 이해한다는 듯 평소보다 부드러운 말투로 표현을 정정해 주었다.
“피부가 아니라 비늘.”
“비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