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시트와 가여운 짐승들-22화 (22/104)

22화.

“뭐?”

“얼마 전 술집에서 시비가 붙은 걸 저자가 도와줬다는데, 심상치 않은 기세로 이름을 물어 대길래 제 이름을 팔고 돌아왔답니다. 저자가요.”

저자, 라피난이 친히 손가락을 틀어 이레이를 가리켰다.

“아주 바보 천치지요. 차라리 히첼이니 메이사르니 평범한 가명을 썼으면 곱게 넘어갔을 텐데 스스로 팔자를 꽜어요. 웃기지도 않습니다.”

“허, 어디 도용할 이름이 없어서 카일 가문 직계 장자의 이름을……. 아무튼 저놈 상식은 매번 상상을 초월한다니까.”

해시트가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절레절레. 그러면서 한심한 눈빛을 이레이에게 쏘아 주었더니 그가 발끈해서 인상을 확 찌푸렸다.

“뭐야. 반응이 그게 끝이야?”

“뭐가. 너무 조금만 놀려서 섭섭해?”

“그 여자가 무슨 선물을 보냈는지 물어보지도 않는군.”

“오해라는데 굳이 캐물을 필요 있나. 그야 아까는 좀 궁금했다만……, 난 또 라피난 녀석이 드디어 맞선이라도 봤나 했다.”

시큰둥한 해시트의 대꾸 뒤로 더욱 무심한 라피난의 음성이 따라붙었다.

“전 맞선 같은 거 안 봅니다.”

“누가 그걸 모를까 봐?”

휙, 해시트가 다시 라피난을 돌아보았다. 만면을 잔뜩 이지러뜨린 채였다.

“설마하니 맞선을 안 본다는 소리가 연애도 안 하겠다는 소리인 줄은 몰랐지. 네 아비는 네가 이대로 후사 없이 늙어 죽을까 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더군. 나한테 얼마나 눈치를 주는지 알기는 해? 마주칠 때마다 그래서 네놈 휴가는 언제이고 혹시 요즘 만나는 여자는 없어 보이느냐며 어찌나 송구함을 찾아 대는지, 내가 오죽하면 그따위 칠령팔락한 소문에 마음이 들떴겠느냐고!”

옳다구나 그간 쌓인 원한을 터뜨렸지만 사죄받을 길은 요원해 보였다.

“전하의 착각이십니다. 제 아버지에게 감히 황태자 전하께 눈치를 드릴 만한 역심은 없습니다.”

“누가 카일 가문 당주의 충심이 의심스럽다더냐? 이러다 네 녀석을 혼자 늙어 죽게 만든 범인 소리 들을까 봐 신경이 쓰인다고, 내가.”

“그렇게 신경 쓰이신다면 폐하께서 절 책임지시면 되겠네요.”

“너 내가 농담 그딴 식으로 하지 말랬지.”

“그렇게 싫으시다면 진담으로 바꾸겠습니다.”

“하아, 이놈이고 저놈이고 소름 끼쳐 죽겠군.”

“농담입니다.”

미소 한 번 비치지 않고 농담을 운운한 그가 계속 딱딱한 무표정으로 말했다.

“어차피 저는 독신으로 늙어 죽겠다고 집안에 밝혀 두었으니, 전하께서 신경 쓰실 필요도 없습니다.”

“그게 언제였는데?”

“재작년이었나. 아마 그쯤이요.”

“젠장, 맞아. 딱 그즈음부터 네 아비가 나에게 눈치를 주기 시작했어…….”

모든 수수께끼가 풀리는 순간이었다. 해시트가 욕설을 뇌까렸다. 가만히 두 사람을 지켜보던 이레이가 불쑥 끼어든 것도 바로 그때였다.

“내 눈치는 안 보이나 봐?”

“응?”

묘한 분위기에 휩쓸려 해시트와 라피난이 동시에 그에게 시선을 돌렸을 때, 이레이는 예고 없이 고삐를 높이 치켜들며 해시트와 잠깐 눈을 맞췄다.

“나중에 얘기하지. 난 먼저 가 있겠다.”

그러고는 감히 사령관의 허락을 구하지도 않고 까마득한 선두를 차지해 버린다. 이랴! 멀어지는 흑마 위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해시트가 황당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저거 왜 저러냐? 라피난.”

“글쎄요.”

이어진 라피난의 대답은 해시트가 듣기엔 모호하기 그지없었다.

“한 말씀 올리자면 저는 전하께서, 주군으로서는 한없이 만점에 가까우신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건 마치 주군 이외에 다른 분야에선 점수를 논하기 힘들다는 말처럼 들렸다. 애당초 그 밖의 다른 걸 장래 희망으로 삼아 본 적 없던 해시트에게는 그저 당연한 소리에 그쳤을 뿐이다.

“네가 웬일로 입에 발린 소리를 하는구나.”

“네. 저도 이제 나이가 들어서요.”

더욱이 적진을 코앞에 두고 그런 시답잖은 대화를 오래 곱씹었을 리가. 그런 여유 따위 없었다.

그러나 머지않아 그녀는 난감할 정도의 여유를 맞닥뜨리게 된다. 외려 그렇게 얻은 시간을 모두 머리 아픈 고민에 쏟아부어야 할 만큼.

*

다음 날, 목적지에 도착한 해시트와 제국군을 반긴 것은 갈가리 찢긴 적진의 깃발과 활짝 열린 성문이었다.

들리기에 어느 빨간 머리 남자가 쥐도 새도 모르게 성 안으로 잠입해 반란 귀족과 그 가족들을 죽여 목을 내걸었고, 아침엔 황태자 해시트의 명으로 백성들에게 곳간을 열어 주었다고 한다. 수탈당하던 변방의 백성들이 해시트와 제국군에게 열렬한 환대를 바친 것은 너무나 자명했다.

“봐, 저기 황태자 전하께서 오셨다!”

“전하! 제국이 저희를 구해 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전하. 감사합니다!”

“전하!”

“황태자 전하!”

해시트는 자신을 향해 엎드려 절하는 백성들을 내려다보다가 뒤늦게 고개를 돌렸다. 멍하던 시선 끝에 한 남자가 닿자 불시 그녀의 눈빛이 굳어졌다.

악다문 잇새로 말소리가 샌다.

“이레이 린.”

“예, 전하.”

그 부름에 응한 이레이가 뻔뻔하게 예를 갖췄다. 천천히 무릎을 꿇으면서 결코 해시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해시트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나와 장난하나?”

“그건 아니고.”

겨우 그녀만이 들을 수 있는 작은 목소리로 그가 사과했다.

“미안해. 화풀이할 데가 필요했어.”

“…….”

“네가 내 눈치를 너무 안 봤잖아.”

그래서 화가 났다고.

그렇듯, 단지 약간의 신분 변화가 있었을 뿐 세 사람의 관계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처음 만남으로부터 일 년이 훌쩍 넘는 시간이 지나갔음에도, 해시트는 여전히 이레이를 길들이지 못해 고군분투하는 중이었다.

*

무거운 군장을 짊어지고 헛걸음만 하게 된 병사들의 허무함을 헤아려, 돌아가는 길엔 잠시 샛길로 빠지기로 했다. 이른바 땡땡이인 것이다.

제국군은 사막을 횡단하는 대신 숲으로 우회해 나무 그늘 밑에 드러누웠다. 마침 선선한 가을 날씨라 계곡 앞에 막사를 치고 놀기도 적당했다.

특히 어린 병사들이 좋아했다. 두어 놈이 훌렁훌렁 옷을 벗어 던지고 물속으로 뛰어들자 모두 기다렸다는 듯 뒤를 따라 계곡의 저 끝까지 사람 머리로 다글거렸다.

물에 들어갈 수 없는 해시트는 물가와 멀찍이 떨어진 곳에 안락의자를 가져다 놓고 독서를 즐길 따름이었다. 라피난이 날벌레를 쫓아내는 물약을 가져오겠다며 자리를 비운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스륵 책장을 넘기면서 조용히 읊조렸다.

“거슬리니까 저리 꺼져라.”

꺼지는 대신 근처 바위에 걸터앉길 택한 이레이가 여상하게 질문했다.

“그건 무슨 책이야?”

“……고문의 역사.”

“아, 그 책이라면 나도 알지. 라피난이 시험공부용으로 가져다줬던 책 사이에 섞여 있었거든. 창의적인 고문 도구가 꽤 많던데……. 놋쇠로 된 황소에 가둬서 달궈 죽이는 형벌이었던가, 아마?”

저리 가라고 했거늘 꿋꿋하게 아는 척하는 게 짜증 났다. 해시트는 일부러 책 속에 시선을 박아 두고 말했다.

“잘 찾아보면 그 황소가 지하실 어딘가에 있겠군. 언젠간 네게 써먹을 일이 생길지도 모르겠어.”

“그냥 성질을 내.”

일순 이레이의 한쪽 입술이 비죽이 하늘로 치솟았다. 결국 해시트는 책장을 덮었다. 탁! 소리가 거칠었다.

“이 몸이 왜? 경이 목숨 걸고 싸워 준 덕분에 아군은 아무런 피해 없이 회군 중이다. 돌아가면 공적을 치하할 테니 기대해도 좋아.”

“고맙지만 사양하지. 목숨까지 건 적은 없어서.”

“그럼 재미로 학살했나?”

“말했잖아. 화풀이였다고.”

“감히 누구에게 화가 났다는 거야?”

그러자 이레이가 바위에서 일어나 무릎을 툭툭 털었다. 드디어 자리를 뜰 마음이 생겼나 보다. 하지만 돌아서기에 앞서 살뜰히 해시트와 눈을 맞추고 그녀의 속을 긁었다.

“너한테 화내는 게 싫으면 저 자식에게 화가 났다고 해 줄까?”

흘긋, 그가 눈짓한 길목에 때마침 라피난이 물약을 챙겨 돌아오고 있었다.

해시트는 곧장 들고 있던 서책을 그의 머리께로 집어 던졌다.

“꺼져.”

퍽! 이레이의 손바닥에 가로막힌 서책이 그의 머리 근처에는 얼씬도 못 하고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

“…….”

나뒹구는 초라한 몰골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레이는 허리를 굽혀 떨어진 물건을 주웠다. 표면에 묻은 흙을 잘 털어 내 내민다.

“네가 자꾸 까먹는 것 같길래, 아무래도 주기적으로 알려 줘야 기억할 것 같아서.”

“…….”

머뭇거리는 해시트의 손을 억지로 끌어와 서책을 올려 준 그가 그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차가운 체온이 두꺼운 종이를 타고 넘실댔다. 그는 항상 손이 차다. 그래서 해시트는 그와 닿을 때마다 할 말을 잃곤 했다. 입술이 딱 달라붙어 모든 질문이 사라지고 만다.

막 근처에 돌아와 두 사람을 발견한 라피난은 선뜻 끼어들지 못하고 그 자리에 멈춰야 했다. 한 걸음을 더 내딛지 못해 조용히 지켜보기만 했다.

“통치자로선 분명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시지.”

그의 주군이 백성이 아닌 자에게 야속한 것까지는 차마 다그칠 수 없었기에.

*

다시 다음 날이 밝았을 때, 이레이는 언제 제 맘대로 굴었냐는 듯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러니까 어제보다는 조금 덜 제멋대로이되 충분히 시건방진 꼬락서니 말이다.

“해스, 수도까지 경주할까? 지는 사람이 술 사기로 하고.”

“너나 많이 마셔라.”

“왜? 라피난은 한다는데.”

“…….”

밀려드는 배신감에 라피난을 노려봤지만, 라피난은 대놓고 해시트의 시선을 피하며 먼 산을 구경할 따름이었다.

보아하니 그가 이레이와 해시트의 어색함을 풀어 주려 먼저 판을 짠 모양인데, 평소 그의 행동거지를 생각해 보면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오지랖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