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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시트와 가여운 짐승들-19화 (19/104)

19화.

“낯짝도 두껍다. 영웅은 무슨.”

“나도 낯짝이 간지럽긴 한데 다들 그렇게 부르더라고.”

간지러움이라곤 모를 것 같은 빤빤한 낯짝에 무심코 웃음이 새어 나오고 말았다. 애써 입꼬리를 내린 그녀가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 라피난에게 손짓했다.

“다른 방법이 없구나. 라피난.”

“예.”

“이레이를 근위대 부대장에 앉혀라. 이렇게 된 거 네 직속 부하로 두고 관리하는 셈 쳐. 전쟁에서 세운 공으로 훈장도 하나 수여해 주고…… 아, 이틀 뒤에 대신 회의가 있던가? 거기서 저놈에게 좋은 신분을 내리는 쪽으로 말 꺼내 볼 테니 그것도 미리 준비해 둬. 뭐 별로 내키진 않지만, 이 자식을 적당히 대단한 놈으로 만들어 놓으면 저쪽에서도 함부로 손을 못 쓰겠지. 그게 내 걱정을 덜어 내는 일이고.”

“바로 착수하겠습니다.”

그러자 이레이가 번쩍 한 손을 들어 올렸다.

“저기 미안한데 해스, 난 네가 걱정 덜 하는 것보단 많이 해 주는 편이 더 좋아.”

“뭐?”

해시트는 그의 표현을 단박에 이해하지 못했다. 해시트의 이해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이레이의 사고방식이 그녀의 상식에서 많이 벗어나 있던 탓이다.

“나한테 쓸데없는 감투 같은 거 씌울 생각 말라고. 직무 태만의 끝이 뭔지 보고 싶은 게 아니라면.”

“그러는 너는 생의 끝을 보고 싶은 모양이지? 감투 대신 형틀을 차고 싶은 모양이고. 간이 배 밖으로 나와도 네놈 같을 수는 없을 거다. 라피난. 너도 뭐라고 한마디…… 하고 있군, 그래……. 눈으로.”

라피난에게 지원사격을 요청하려던 해시트가 급히 시선을 거둬들였다. 여기가 전쟁터였고 이레이가 적군이었다면 라피난은 방금 눈으로 백 명쯤 죽였다. 해시트가 옆에 있는데도 차마 표정 관리를 하지 못하는 그를 보자, 그에게 이레이를 맡기고 나 몰라라 했던 지난날이 조금 미안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레이는 조금의 눈치도 보지 않았다. 슬며시 고개를 기울여 해시트와 라피난을 한 번씩 번갈아 본 게 끝이었다.

“그러지 말고 내가 살아 돌아왔을 때 상을 줘.”

감히 거래를 제안한다. 심지어 다음은 통보였다.

“아, 작위는 빼고.”

말하는 족족 기가 막혔음이라. 결국 해시트는 성난 목소리로 비아냥거렸다.

“이래 놓고 죽어서 오기만 해. 묘비에 매년 훈장을 하나씩 새로 달아 주마.”

“무덤까지 지어 준다니 고마워. 그런데 살아 돌아오면 뭘 해 줄 거야?”

“아량을 베풀어 죽이지는 않으마.”

“으음……. 아무리 봐도 내가 밑지는 장산데.”

이레이가 새파란 눈을 끔뻑거리며 턱을 어루만졌다. 가증스러운 연기였다. 곧 태도를 달리해 속사포처럼 쏘아붙였으니까.

“해스, 그럼 내가 대회에서 승리한다면?”

“뭐라?”

“혹은 내가 황제에게 사소한 위협깨나 돌려주고 온다면? 그가 너에게 그랬던 것처럼, 죽이거나 다치게 하진 않고 적당히 놀랄 정도로만……. 그땐 진짜 상을 줄 건가?”

“허.”

가당치도 않다. 해시트는 비뚜름하게 웃고 말았다.

“할 수 있다면 어디 해 봐. 나도 내가 너에게 무얼 주게 될지 궁금하구나.”

그야 그때는 그녀도 몰랐으니까.

설마 닷새 뒤의 사냥대회에서 그가 어떤 사고를 칠지, 알았다면 결코 자만에 차 입방정을 떨지 않았을 것이다.

*

사냥대회 참가자로는 주최인 황제를 비롯해 황가와 혈연으로 맺어진 일곱 가문의 대표, 그리고 황태자의 대타인 이레이 린까지 총 아홉 명이 선발되었다.

실제로 숲에 들어가는 인원은 그보다 훨씬 많았지만, 그 아홉 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황제의 경호원들이었으므로 숲속에서 누가 자객으로 돌변한들 이상할 게 없었다.

개회 날 아침, 이레이의 처소로 찾아온 라피난은 무심한 얼굴로 그의 말안장에 활시위와 화살통을 달아 주었다.

“전하께서 하사하신 거다.”

듣는 이레이의 표정은 전혀 황송하지 않았다.

“기왕이면 직접 가져다주지, 야박하긴.”

“바쁘신 분이니까.”

“너는 한가하고?”

“……내가, 우리 가문을 대표해서 자네와 함께 숲에 들어간다면 좋겠지만 규정상 적통의 장자는 위험한 대회에 참가할 수 없다.”

얼핏 들으면 혼자 잘해 보란 소리로 들렸고 꼬아 들으면 그래서 미안하단 소리로 들렸다. 이레이는 꼬아 듣기로 했다. 흘긋, 그가 조금 전 라피난이 매달아 준 화살통을 곁눈질하며 말했다.

“저 활시위 부러뜨리진 않았지?”

“화살깃에 독을 발라 놓긴 했는데.”

“진짜?”

“농담이다.”

“얼굴이 영 겉늙었다 싶더니 농담도 늙은이처럼 하네. 정말 재미없다.”

“없나? 그나저나 너에게 내 나이를 밝힌 기억은 없군.”

“그 정도야 척하면 척이지.”

이레이 린과 라피난 카일은 일견 비슷한 점이 많았다. 남들보다 머리 한두 개는 큰 덩치라든가, 전장에서 뿜어내는 위압감 같은 것에서 말이다. 하지만 이목구비의 생김새나 평소 말하고 행동하는 성격은 마치 물과 기름처럼 겉돌았다.

짐작건대 앞으로도 오랫동안 화목하긴 어려울 터다. 일단은 반목하지나 않기로 잠정적 합의를 본 지 얼마 안 됐을 시기였다. 이때는.

“스물셋.”

말에 올라탄 이레이를 향해 라피난이 문득 입술을 달싹였다. 그에 곧바로 얄미운 휘파람 소리가 따라붙었다.

“역시 노안이야.”

“너는.”

“나도 비슷해.”

라피난이 돌연 인상을 찌푸렸다.

“너도 동안은 아닌데.”

“……나 간다.”

중얼거리는 라피난의 표정에서 진심을 느낀 이레이가 빈정이 상한 나머지 그대로 고삐를 잡아당겼다. 이랴! 해시트가 보았다면 몇 번쯤 한숨을 내쉬었을 광경이었다. 너네 둘 다 진짜 창피하다.

*

황제의 우아한 몸짓은 이레이가 아는 어떤 여자와 제법 닮아 있었다.

“저 숲에 붉은 사슴 한 마리가 있다.”

숲속을 가리키는 우아한 손끝, 자연히 해시트의 가느다란 손가락을 떠올리게 한다. 순서를 따지자면야 응당 해시트가 그를 닮은 것이겠지만, 이건 닭과 달걀의 문제가 아니다. 이미 모든 기준이 해시트로 맞춰진 이레이에게는 레오니스 황제의 면면에서 그 여자를 찾아내는 일이 그저 재미있었다.

“누구든 사슴을 발견해 먼저 잡아오는 자가 승리하는 경기다.”

한데 닮은 사람을 구경하려니 머잖아 그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게 된다. 이레이는 아쉬움을 느낀 즉시 고개를 돌려 천막 아래에 앉아 있는 해시트를 찾아냈다.

아직 쌀쌀한 초봄의 뜰이었다. 해시트가 앉아 있는 먹감나무 의자는 그녀의 머리카락처럼 너무나 새카매서 꼭 그녀만을 위해 만들어진 듯했다. 그 위에서 어찌나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있던지, 그러나 냉랭한 무표정과는 어울리지 않게 두 뺨을 발갛게 물들인 채였다.

그때 마침 시선이 마주쳤다. 이레이는 기다렸다는 듯 입 모양으로 질문했다. 추워? 해시트는 놀랐는지 주변을 두리번거리고는 불시 험악하게 인상을 찡그렸다. 동그란 입술이 더 동그란 모양으로 움직였다. 닥치고 앞이나 봐. 그러고는 또 안면몰수했다.

하여간에 야박하기로는 그가 지금껏 만난 어떤 암살 의뢰인보다도 더했다. 죽지 말라며 작위까지 하사하겠노라 우길 땐 언제고. 불현듯 치민 불만에 눈을 가늘였을 때, 거대한 나팔 소리가 하늘 높이 울려 퍼지며 대회의 시작을 알렸다.

이레이는 냉큼 고삐를 고쳐 쥐었다.

“붉은 사슴이라 이거지.”

풍문에 황제께서 직접 고른 사냥감이렷다. 그가 이레이의 붉은 머리카락을 염두에 두지 않았을 가능성은 애당초 따져보지도 않았다. 그인즉슨 금일 저 숲에서 달릴 붉은 사냥감은 한 마리가 아닌 두 마리라는 것이다.

이윽고 이레이의 새파란 눈은 또다시 황제의 뒷모습을 좇기 시작했다. 황제가 타고 있는 적갈색 말갈기가 바람결에 부드럽게 흩날렸다.

*

거두절미 사냥대회의 결과부터 말하자면, 이레이 린은 감옥에 갇혔다. 그 미친 자가 사슴이랍시고 말을 잡아 왔기 때문이다.

대회 시작 후 달랑 반 시간이나 지났을까.

“어…… 이게 사슴이 아니고 말이었어? 난 또 색깔이 빨갛길래 붉은 사슴인 줄 알았지. 어쩐지 덩치가 너무 크더라.”

감히 황제의 말을 사냥해 놓고 그딴 걸 변명이라고 지껄여 댔으니―심지어 그 말이 진짜로 빨간색이었던 것도 아니고 적갈색이었다―당연히 목소리 끝에 마침표가 찍히기도 전에 수십 개의 칼날에 목을 맡기고 포승줄에 끌려갈 팔자였다.

그나마 즉결 처형을 피할 수 있었던 건 그 순간에도 용케 정신머리를 붙들어 맨 해시트가 쩌렁쩌렁하게 일갈해 준 덕분이었다.

“뭣들 하느냐! 저놈을 당장 감옥에 가둬라!”

그게 ‘죽이진 말고’라는 말의 완곡한 표현이었음을 눈치챈 자는 이레이와 라피난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그 적갈색 말이 하필 황제가 가장 아끼는 짐승이었다는 점과, 황제가 잠시 냇가에 손을 씻는 사이에 이레이가 호위병 세 명을 죽이고 그 짐승을 갈취했다는 점, 마지막으로 무슨 술수를 부렸는지 태어나서 지금까지 주인의 손길 외에는 허락한 적 없다던 흉포한 말을 손쉽게 숲 밖으로 끌고 나왔다는 점까지.

그 외에 하나하나 나열하기도 힘든 자잘한 죄목이 모두 붙은 결과, 그는 그냥 감옥도 아니고 탑 꼭대기 감옥에 갇혔다.

*

“솔직히 말해. 네놈 나 싫어하지.”

창살 너머 이레이를 거의 씹어 먹을 듯이 노려보며 해시트가 질문했다. 곧장 돌아오는 반문은 짐짓 흔쾌했다.

“정말 솔직해도 돼? 후회할 텐데.”

“닥쳐, 닥쳐, 닥쳐! 대답하라고 물어본 거 아니거든!”

분명 감옥에 갇힌 건 저쪽인데 분통이 터지는 건 또 이쪽이다. 해시트는 그것까지 참을 수 없었다. 이 순간에조차 부루퉁하게 딴죽을 거는 이레이와 비슷하다면 비슷했다.

“뭐야. 그럼 왜 물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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