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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시트와 가여운 짐승들-18화 (18/104)

18화.

라피난이 해시트를 무시하다니. 설마 그녀를 못 본 게 아니고서야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분명 눈이 마주쳤으니 못 봤을 리도 없었다. 충격받은 해시트는 화를 내야 한다는 인식조차 없이 멍하니 미간을 찌푸렸다.

“저놈 왜 그냥 가지?”

“음, 오해했나 본데.”

“오해? 무슨 오해 말이냐?”

그러자 이레이가 어깨를 으쓱 들었다 내리고는 손가락으로 허공에 긴 직선을 그었다. 주우욱, 그 시작점과 끝점이 해시트의 목덜미와 배꼽을 이었다.

“오해할 만하잖아. 그나저나 눈치껏 자리 비켜 줄 줄도 알고, 의외로 개방적인데. 저 녀석.”

자연스레 해시트의 시선은 방금 전 이레이가 그린 직선을 따라서 궤를 함께했다. 스스로 걷어 낸 셔츠 아래 허연 피부와 배꼽이 눈에 들어왔다. 망했군. 다른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녀는 거의 소파에서 튀어 오를 기세로 소리를 내질렀다.

“악! 저 새끼 잡아 와, 지금!”

오도독! 무심결에 깨문 나무껍질이 목구멍으로 쑥 넘어갔다. 이레이가 두 눈을 부릅떴다.

“해스. 너 그거 삼킨 거야? 미쳤어? 얼른 뱉어!”

“지금 그딴 게 문제냐? 당장 저 새끼 잡아 오라고 했…… 쿨럭!”

왜 기침이 나지. 그러고 보니 머리도 좀 어지럽다. 아예 팽팽 돈다.

“젠장, 벌써……. 그래서 내가 물고만 있으랬잖아! 그게 씹으니까 진통제지 삼키면 코끼리 마취제거든!”

참 빨리도 말해 주는구나. 따끔하게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혀가 움직이지 않았다.

그건 그렇고, 코끼리는 또 뭐지?

생경한 단어 앞에서 까무룩 눈이 감긴다. 마침내 졸려서 기절하는구나 싶었다.

*

‘그러니까, 황제 앞에서만 해스한테 존댓말을 사용하면 된다는 거 아냐?’

잠결에 익숙한 목소리를 들었다. 두 남자가 해시트의 머리맡에서 어찌나 쏙닥거리던지 거의 귀에다 대고 읊어 주는 수준이었다.

‘도대체 몇 번째 얘기하는지 모르겠군. 잘 들어라, 이레이.’

‘아까부터 듣고 있었어.’

‘성 안에서 누군가가 너를 지켜보고 있다면, 아니 원칙대로라면 누가 지켜보고 있지 않더라도 그래야 하지만, 너는 필히 해시트 전하 앞에서 예의를 갖춰야 한다. 비단 황제 폐하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전제로 하는 말이야. 알겠나? 성 안의 모든 사람 말이다. 설령 전하께서 허락하셨을지라도 네놈의 막돼먹은 언행이 전하의 위엄을 떨어뜨려선 안 돼.’

‘싫다.’

‘……이유는.’

‘모든 사람이면 너도 포함이잖아.’

‘……좋아. 나는 빼라.’

‘그런데 라피난. 혹시 내가 황제에게도 예의를 갖춰야 하나?’

‘이레이. 자네 혹시 가난을 못 이겨 상식을 내다 판 적이라도 있나.’

라피난의 신경줄을 야금야금 갉아 먹을 대화가 끝없는 도돌이표를 그리며 반복됐다. 아무래도 언젠간 이레이 린 저 망할 놈 때문에 큰 고초를 겪게 되리라는 불길한 예감을 떨치기 힘들다. 해시트는 잠결에도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반드시 그 전에 그를 내치리라 다짐했다.

‘그래서 날짜는 언젠데?’

‘닷새 뒤.’

‘으음, 얼마 안 남았네.’

‘잘할 수 있겠나?’

뭐가 닷새 남았고 뭘 잘할 수 있냐는 것인지 당연히 알 도리가 없었다. 그때 이레이가 대답했다.

‘그래 봤자 사냥대회인데 뭘.’

뭐?

‘황제가 주최한다고 해서 특별할 건…….’

젠장.

해시트가 벌떡 몸을 일으켜 앉았다.

“아바마마께서 사냥대회를 여셨다고?”

“오, 드디어 깼군.”

“전하. 정신이 드십니까?”

곧장 그녀에게 다가온 두 남자가 태연하게 벼르던 일에 착수했다.

우선 이레이부터.

“이거 몇 개게.”

냅다 해시트의 턱을 잡아챈 그가 그녀의 눈앞에 손가락을 펼쳐 보였다. 세 개? 반사적으로 대답했더니 손가락 한 개를 도로 접는다. 이건? 두 개……. 두 번이나 대답해 줬는데도 턱에서 손을 안 뗀다. 잘했어. 씨익 웃으며 해시트를 칭찬해 주더니 이윽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자, 그럼 이제 날 따라 해 봐. 아, 에, 이, 오, 우.”

“지금이라도 깨어나셔서 다행입니다, 전하. 이틀이나 잠들어 계셔서 좀 곤혹을 치렀거둔요. 일단 외부에는 피로 누적으로 인한 몸살이라고 밝혀 두었습니다.”

“아, 에, 이…… 뭐? 뭔 살?”

“몸살이요.”

얼떨결에 이레이가 시키는 대로 발음기관을 운동시키던 해시트는 더럭 멍청한 표정이 되어 라피난을 바라보았다. 그새 두꺼운 서류 뭉치를 챙겨 온 라피난이 여느 때와 같은 밋밋한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또 해시트 혼자만 기가 찼다.

“농담이지? 이 몸은 여태 감기에도 한 번 걸려 본 적 없어. 고작 출정 한 번 다녀왔다고 앓아눕는다면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하겠나?”

“몸이 약해지셨구나, 생각하겠죠.”

“그래! 그걸 알면서 어떻게……!”

“그래도 부하가 준 독을 먹고 생명이 위태로웠다고 밝히는 것보단 낫지 않겠습니까.”

“아아, 젠장 맞아……. 이게 다 저 망할 새끼 때문이었어…….”

쓰러지던 순간이 기억난 해시트가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처참한 그녀의 반응에 제 발 저린 이레이가 돌연 딴청을 부리는 가운데, 라피난은 일말의 동요 따위 없이 바로 안건을 이어 갔다.

“달리 잡음은 없었으니 안심하십시오. 오히려 이번 일을 계기로 너무 잦은 출정을 지양하자는 주장도 나왔습니다. ‘그’ 튼튼하던 황태자 전하께서 과로로 쓰러지셨으니 다들 놀랄 만하지요. 덕분에 여름으로 잡아 두었던 북녘 탐사도 무기한 연기되었습니다.”

“그건 잘됐군. 병사들도 조금은 쉴 수 있겠어.”

“예. 그 대신에…….”

그때 이레이가 라피난의 말을 끊고 끼어들었다.

“뭐야. 그럼 결국 내 덕이네? 괜히 눈치 봤군.”

“반성하는 척이라도 하지?”

퍽! 더 지껄이기 전에 냅다 그 얼굴로 베개를 집어 던졌다. 윽. 이레이는 얕게 신음하며 뒤로 물러섰지만, 그가 일부러 피하지 않고 맞아 주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어서 더 얄미웠다. 해시트는 까드득 이를 갈다가 불현듯 자신의 잠옷을 내려다보고는 라피난에게 물었다.

“네가 갈아입혔나?”

“송구하게도 그렇습니다.”

라피난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화를 내려 꺼낸 질문이 아니었던지라 해시트는 휘 손을 내저었다.

“처음도 아닌데 송구할 것까지야.”

방금 베개로 얻어맞은 무뢰한이 갈아입힌 것만 아니라면 되었다. 그 무뢰한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었지만.

“왜 처음이 아니야? 너 쟤한테 옷시중도 시켜?”

“전하, 그래서 아까 드리던 말씀 말인데요.”

“아, 그렇지. 계속해 봐라.”

“오. 둘이 이제 내 말은 무시하기로 합의 봤나?”

해시트와 라피난은 그조차 상종하지 않기로 무언의 합의를 봤다.

“북녘 탑사 일정이 취소된 대신에 황제 폐하께서 작은 행사를 제안하셨습니다. 황제궁 안에서 벌일 수 있는 것으로요.”

“깨면서 들었다. 사냥대회라지.”

“예. 개회는 닷새 뒤입니다.”

“눈 뜨자마자 고생길이군. 차라리 전쟁이 나을 지경이야. 거긴 너라도 있지.”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 진력이 난다. 질린 얼굴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는 해시트를 내려다보면서 라피난은 어쩐 일인지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그게, 이번엔 전하께서 고생하실 일은 없겠습니다.”

“응? 뭐라고?”

“잠들어 계신 동안 이야기가 진행되어서 미처 보고드리지 못했습니다만…….”

별안간 도로록 굴러간 초록 눈동자가 그동안 철저하게 공기 취급당하던 누군가를 담는다. 해시트도 덩달아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닿은 끝에 이레이가 산뜻한 미소를 만면에 피어 올리고 있었다. 빵긋!

설마…….

“아니지?”

해시트는 무엇을 의심하는지도 모른 채로 일단 부정하고 봤다. 불행히도 라피난 카일은 헛된 희망을 심어 주지 않는 지독한 남자였다.

“이번 사냥대회엔 전하가 아니라 이레이 린 경이 황태자궁 대표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이 새끼들이 주군이 잠든 사이에 이런 대형 사고를 쳐 놓고도 잘도 숨을 쉬고 있었다.

*

명분은 이번 토벌전에서 두각을 드러낸 신인을 향한 호기심이었고, 실상은 그 핑계로 해시트의 새 수족을 제거하려는 목적일 것이다.

즉각 심각한 표정으로 회의에 돌입한 해시트와 라피난을 이레이는 창가에 걸터앉아 팔짱을 낀 채 지켜보았다. 창을 등진 그림자가 한 뼘가량 옆으로 이동했을 때, 그는 기다려 줄 만큼 기다려 주었다고 판단했는지 불쑥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뭐가 문제지? 이번이 첫 사냥대회도 아니라며. 여태 네가 살아서 돌아온 걸 보면 난 뭐, 아주 괜찮을 것 같은데.”

그 가당치도 않은 오만을 바로잡아 주는 것이 해시트의 주군 된 도리였으나 지금은 실천하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까. 단, 닷새 뒤에 열릴 사냥대회가 그 전까지와 별반 다를 바 없다면 말이다.

해시트는 침대 밖으로 걸어 나왔다.

“내가 살아서 돌아왔다기보다 폐하께서 날 죽일 마음이 없으셨던 거지. 적어도 황제궁 안에서는.”

“그런 거야?”

“그런 거야.”

이틀이나 누워 있었다는 말이 과장은 아니었는지 온몸이 삐걱거렸다. 잠들어 있는 동안에는 헤라꽃 차를 마실 수 없었으니 그 때문일 수도 있다.

예로부터 다양한 용도의 약재로 쓰이는 헤라꽃은 그 꽃잎을 달여 마시면 각성 효과가 있었고, 줄기까지 함께 달이면 일시적으로 월경을 미뤄 주는 효과를 가졌다. 전쟁터에 머무르는 일이 잦은 해시트에겐 만병통치약이나 다름없었다.

보통 복용을 중단하면 사흘 안에 피가 비치기에 평소 꼬박꼬박 챙기다가 보름 이상 성에 체류할 때만 거르곤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전조 증상처럼 아랫배에 옅은 통증이 올라오고 있었다.

약의 부작용은 월경통이 극심해진다는 것. 이래서야 이레이를 대신해 사냥대회에 나가겠다고 우길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해시트는 꾹 짜증을 누르고 말했다.

“그분께서 나를 없애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지만 결코 당신과 관련된 흔적을 남기실 분이 아니야. 지금까지 사냥대회에서는 단지 불구 좀 될 뻔하고 사냥감처럼 위협을 당했을 뿐, 실제 생사까지 오간 적은 없다. 하지만 너는 다르겠지.”

“나는 죽여도 뒤탈이 없을 테니까. 작위도 가문도 없는 한낱 전쟁 영웅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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